부제: 닫힌 문이 다시 열리는 방식
제주의 바람은 깊다. 섬의 동쪽에서 불어온 바람은 오름을 스치고, 서쪽으로 흘러가며 검은 현무암을 어루만진다. 바람은 늘 같은 방향으로 불지만, 그 바람을 맞는 마음은 매번 다르다.
“당신 약 먹었어?” “밥은?”
결혼 40여 년 차 부부의 대화는 이게 전부였다. 함께 살아온 시간은 길었지만, 함께 말한 시간은 점점 짧아졌다. 싸우지 않아서 조용한 게 아니라, 할 말이 없어 조용해진 세월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들마저 필요 없을 만큼 서로의 하루를 짐작하게 된 이후로, 대화는 생활이 아니라 기능이 되어버렸다.
언젠가부터 둘은 같은 방에서 자지 않았다. 남편의 코 고는 소리, 아내의 뒤척임이 서로에게 불편이 되었고, 배려라는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방을 나누었다. 그렇게 ‘문’이 닫혔다. 문제는, 문이 닫히는 동안 마음까지 같이 닫혔는지 서로도 잘 모른 채 살았다는 것이다.
어느 밤, 남편은 혼자 누운 침대에서 오래된 장면 하나를 떠올렸다. 그는 기억의 **‘장면’**을 붙잡고 있었다. 처음 그녀를 봤던 날, 그녀가 입고 있던 초록색 가디건의 색감, 웃을 때 실눈처럼 가늘어지던 눈매. 남편에게 사랑은 그날의 선명한 풍경으로 남아 있었다.
반면, 아내는 기억의 **‘온도’**를 떠올리고 있었다. 상대가 말을 하면 끝까지 들어주던 그의 태도,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그래? 그랬구나”라고 답해주던 목소리의 울림. 아내에게 사랑은 그가 내어준 경청의 시간과 다정한 촉감으로 남아 있었다.
서로 다른 조각을 쥐고 있었기에, 그들은 서로가 같은 길을 걸어왔다는 사실을 자주 잊었다.
“가까워지는 건 사건이지만, 멀어지는 건 습관이어서 그렇다.”
어느 날 아내는 베란다 창고를 정리하다가 오래된 상자 하나를 꺼냈다. 먼지가 소복이 쌓인 사진 앨범 속에서 1980년대 어느 봄, 성산일출봉 정상에 선 신혼부부의 사진이 ‘툭’ 하고 무릎 위로 떨어졌다. 바람에 머리가 흐트러진 채 어색하게 웃고 있는 두 사람. 아내는 그 사진을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밤늦게 물을 마시러 나온 남편이 사진 앞에서 멈춰 섰다. “... 이때 우리가 참 많이 웃었네.”
오랜만에 거실 공기가 흔들렸다. 아내는 방문 틈 사이로 그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우리... 한 번... 다시 가볼까? 저기, 성산일출봉.”
제주 공항 문을 나서는 순간, 40여 년 전의 바람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바람이 옷깃을 스치자, 둘은 동시에 잠깐 멈칫했다. 아내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남편은 말없이 모자를 고쳐 썼다.
서로를 보지 않고,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렌터카 주차장으로 가는 길, 캐리어 바퀴 소리가 바닥을 길게 긁었다. 말이 없는 대신, 그 소리만 또렷하게 따라왔다. 차 문이 닫히며 바람이 유리 밖으로 밀려났다. 남편이 시동을 걸었고, 차는 천천히 성산을 향해 출발했다.
성산일출봉 입구 표지판 앞에 섰을 때, 두 사람은 동시에 멈췄다. 기억은 다시 한번 비대칭으로 엇갈렸다.
“그때 여기서… 당신이 크게 넘어졌잖아. 무릎 다 깨지고.” 남편은 아내가 아파했던 사건을 기억해 냈다.
아내는 웃으며 대답했다. “난 당신이 나 잡아주던 것만 생각나는데. 당신 손이 참 따뜻했어.”
아내는 남편이 건넨 온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남편은 자신이 누군가를 붙잡아 줄 만큼 든든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아내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소중하게 보살핌 받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성산의 계단 위에서 다시 깨달았다.
“서로가 기억하는 서로 다른 조각이 맞춰지자, 비로소 하나의 온전한 추억이 완성되었다.”
정상에 도착했을 때, 해가 수평선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참 멀리 돌아왔네.”
남편은 한참 동안 바다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 그래도, 같이 왔네. 결국.”
남편은 아내 손 옆으로 자신의 손을 가져갔다. 수십 년 동안 잡지 않았던 손. 거부하면 어쩌지, 하는 찰나— 아내가 손가락을 살짝 움직여 남편의 손을 감쌌다. 말은 없었지만, 그 침묵은 40여 년 중 가장 따뜻한 침묵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 대단한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여전히 각자의 방에서 잠을 자고, 여전히 대화보다 적막이 길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문’을 완전히 닫지 않는다는 것이다.
“커피… 탈까요?”
“좋아요. 같이 타요.”
부엌에서 나란히 서서 커피를 타는 뒷모습 위로, 거실 액자에 걸린 두 장의 사진이 겹쳐진다. 40여 년 전 바람에 머리가 흐트러진 신혼부부와, 며칠 전 같은 자리에서 손을 맞잡은 노부부.
관계는 한 번에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함께했던 추억의 장소를 다시 찾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거창한 약속이 아니라, ‘같이’라는 작은 단어에서 두 번째 아침은 시작되고 있었다.”
당신에게도, 마음을 다시 움직이게 할 ‘그때 그곳’이 있나요?
작가의 말
오랜 시간을 함께한 부부에게 ‘사랑해’라는 말은 때로 너무 멀고 어색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관계가 식은 것이 아니라, 서로가 공유했던 눈부신 조각들을 각자의 주머니 속에만 넣어두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 글은 ‘추억’이 가진 회복의 힘에 대해 쓰고 싶어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풍경을 기억하고, 아내는 배려를 기억하는 그 **‘기억의 비대칭’**이 서로를 다시 궁금하게 만드는 시작점이 되길 바랐습니다. 익숙함이라는 습관에 갇혀 서로를 투명인간처럼 지나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다시 한번 ‘그때 그곳’으로 떠나볼 용기를 전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