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바람은 사람을 밀어내고, 소년은 벽을 붙잡았다

우리가 저마다의 벽 앞에서 포기를 미루고 싶은 진짜 이유

by heelight

제주에 오면 바람부터 만난다.
현무암 구멍마다 날카로운 숨소리를 내며 몰아치는 그것은, 아무 말 없이 사람을 밀어낸다. 몸도, 마음도, 때로는 삶의 의지까지도.


어느 날 내가 본 건 바람이 아니라, 그 바람 속에서 버티고 있는 한 아이였다.




8미터, 먼지 쌓인 홀드 위에서


열네 살 민준이는 산을 오르지 않았다.
학교 체육관 한쪽, 낡은 인공암벽을 올랐다. 8미터 높이의 벽. 홀드는 먼지에 덮였고 매트는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다. 소위 ‘제대로 하는 애들’은 오지 않는 버려진 구석.


그런데 민준은 매일 그곳에 있었다. 혼자.


벽 한쪽에 매달린 오토빌레이 줄을 걸고, 민준은 같은 루트를 반복했다.
손가락 끝이 갈라지고 하얀 초크 가루가 땀에 엉겨 붙을 때마다, 민준의 세계는 오히려 선명해졌다.


대답 없는 벽을 향해 몸을 던지는 사람은, 이미 자기 안에서 수많은 결론을 내린 사람이 아니라
결론을 끝내지 않으려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있는 것’들의 소란과 ‘없는 것’의 고요


점심시간의 복도는 잔인했다.
친구들이 배달 음식을 펼쳐놓고 ‘있는 것’을 자랑하며 떠들 때, 민준의 도시락통에는 밥과 김치, 계란뿐이었다. 포장지 소리와 진한 소스 냄새 사이에서 민준은 늘 ‘없는 것’으로 평가받았다.


“민준아 너 클라이밍 한다며? 신발은 어디 꺼야?”
“… 집에 있는 거 신어.”


비죽 새어 나오는 웃음들.
이 장면이 아픈 이유는 민준이 가난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타인의 부족함을 확인하며 안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준은 그 웃음을 보지 않았다.

대신 창밖의 오름을 보았다. 부자든 가난하든, 제주의 오름은 늘 거기 있으니까.


민준에게는 아마 그 **‘거기 있음’**의 감각이 절실했을 것이다.
세상이 자꾸 밀어내도, 풍경만은 자리를 지키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어른의 문장은 생존이 된다


어느 날, 작업복을 입은 한 남자가 체육관 문을 열었다.
한때 국가대표였던 강수였다. 그의 손바닥은 굳은살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수많은 벽을 이겨낸 사람만이 가진 훈장 같은 손.


그는 근사한 조언 대신 현실을 먼저 짚었다.


“신발부터 바꿔. 그 운동화로는 안 된다.”


그건 단순한 장비 이야기가 아니었다.

“너, 계속해도 된다.”
어른만이 줄 수 있는 방식의 허락이었다.


누군가에게 응원은 한 줄의 문장이지만,
민준 같은 아이에게는 그 문장이 곧 생존이 된다.


강수는 반복해서 말했다.


“팔로 버티지 마. 다리를 써.”
“힘으로 올라가지 말고, 균형으로 올라.”


클라이밍 기술이었지만, 이상하게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었다.
민준의 손에는 상처가 늘었지만, 눈빛은 오히려 편안해졌다. 결과가 아니라 확신을 가진 얼굴로 변해갔다.




두려움은 없어지는 게 아니라, 같이 가는 것


강수는 민준을 서쪽 해안 절벽으로 데려갔다.
홀드도 없는 거친 현무암. 바람은 절벽 틈새를 할퀴며 울었고, 파도는 발밑에서 아득하게 부서졌다.


“무섭지?”
“네.”
“그게 정상이야.”


나는 이 대화가 참 좋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무서워하면 약한 사람’이라고 배워왔으니까.


두려움은 없애는 것이 아니라, 품고 함께 올라가는 것이었다.
정상에 선 민준은 처음으로 웃었다.




결과보다 소중한 ‘다음 날의 문’


대회 날, 민준의 낡은 신발은 유독 눈에 띄었다.
결과는 예선 탈락.


사람은 보통 여기서 무너진다.
“역시 나는 안 돼.”
그 말이 가장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수는 짧게 물었다.


“너, 남 보려고 올라갔냐?”
“… 좋아서요.”
“그럼 됐어.”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민준은 결과와 상관없이 다음 날 체육관 문이 다시 열릴 것을 알았고, 자신의 신발이 무엇이든 벽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을 버틴 사람의 소리, “됐어”


일주일 뒤, 민준은 다시 빈 체육관을 찾았다.
강수는 없었지만 민준은 벽을 올랐다.


7미터. 7미터 반.
그리고 마침내 8미터 정상.


창밖으로 제주의 오름과 바다가 펼쳐졌다.
민준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됐어.”


그 소리는 성공의 환희도, 허세도 아니었다.
그저 오늘을 버텨낸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담백한 안도였다.




제주 바람은 오늘도 분다. 여전히 사람을 밀어내고 삶을 흔든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 바람을 맞으며 다시 벽을 잡는다.


혼자 오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누군가의 한 문장이 등을 받치고 있다.


“괜찮아, 그게 정상이야.”
“내일도 와.”
“좋아서 하는 거면 됐어.”


우리가 벽을 오르는 이유는 누군가에게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오늘, 포기를 조금 더 미루고 멈추지 않기 위해서다.




작가의 말

이 글은 제주의 바람 속에서, 벽을 놓지 않던 한 아이의 뒷모습이 오래 남아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도 버티게 한 ‘한 문장’이 있다면, 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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