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한 번 지나간 저녁이다. 로비 바닥은 덜 말라 발자국이 얇게 남아 있고, 젖은 흙내가 극장 안까지 따라 들어온다. 상영관에 들어가니 에어컨 냉기가 아직 남아 서늘하고, 카라멜 팝콘 냄새가 달게 떠다닌다. 서늘한 단맛. 그날은 그 냄새가 유난히 오래 남는다.
상영 10분 전쯤, 예순쯤 되어 보이는 부부가 들어온다.
남편은 A14에 앉는다. 앉자마자 좌석 번호를 다시 확인하더니, 오른손 검지로 옆자리 A15 팔걸이를 툭툭, 일정하게 건드린다. 누굴 기다리는 초조함이라기보다, 그 빈자리에 익숙해지려는 몸짓처럼 보인다.
A15는 비어 있다.
잠시 뒤 아내가 팝콘 통을 두 손으로 꼭 쥐고 들어온다. 통이 살짝 흔들릴 때마다 설탕 코팅이 바스락거린다. 나는 그냥, 무심코 그 소리를 듣고 있다.
그런데 아내는 A15를 지나친다.
그리고 한 줄 뒤, B15에 앉는다.
딱 한 줄의 거리.
남편은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아니, 돌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가 시작되는데도 나는 스크린보다 A15를 더 자주 본다. 왜 옆자리가 아니라 뒷자리일까.
그날 밤, 나는 이렇게 상상한다.
어느 저녁, 남편이 신발을 벗으며 말한다.
“나 샤워하고 나올게.”
평소처럼. 늘 하던 말처럼.
거실 탁자 위에 휴대폰이 엎어져 있다. 욕실 쪽에서 샤워기 물소리가 커진다. 그때 진동이 한 번 울린다. 휴대폰이 유리컵 밑을 스치며 ‘드르륵’ 하고 움직인다.
아내의 손이 먼저 간다. 넘어뜨릴까 봐. 소리가 거슬려서. 그냥—손이 먼저 움직여서.
화면이 켜진다.
“오빠, 오늘 고생하셨어요. 다음에 또 밥 사주세요 ^^”
저장되지 않은 번호.
‘오빠’라는 단어.
그리고 ‘^^’.
아내는 잠깐 웃으려다가, 웃음을 놓친다. 샤워기 소리가 계속 나는데도 다른 소리들이 더 또렷해진다. 시계 초침, 냉장고 모터, 창밖을 지나가는 차 소리.
아내는 화면을 끄지 못한 채로 한 번 더 읽는다. ‘오늘’이라는 글자가 유난히 남는다. 손바닥에 땀이 차기 시작한다.
휴대폰을 내려놓는 동작이 느리다. 소리가 나지 않게, 최대한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닿는 순간, 아내의 손끝이 잠깐 멈춘다.
샤워기 소리가 멈춘다.
아내는 자세를 고친다. 숨을 한 번 삼킨다. 아무 일도 없던 얼굴을 만들려고 얼굴 근육을 먼저 단단히 잡는다.
욕실 문이 열리고 남편이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나온다. 젖은 머리에서 비누향이 난다.
남편이 묻는다.
“뭐 봐?”
아내는 휴대폰을 들어 보이지 않는다. 손바닥으로 화면을 덮은 채, 낮게 묻는다.
“여보… 이거 뭐야?”
남편의 눈이 탁자 위를 찍고, 아내 얼굴로 돌아온다. 그 사이가 너무 짧아서 오히려 길게 느껴진다.
남편이 말한다.
“회사 신입이야.”
“회식 자리에서… 그냥.”
아내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다. 고개를 흔들지도 않는다. 말이 더 나오기 전에 눈물이 먼저 오려고 해서다. 눈물이 오면 소리가 따라올까 봐, 입술을 한 번 더 다문다.
그날 밤, 아내는 등을 돌린다. 남편은 이불을 당긴다. 아내는 이불 안쪽으로 더 깊게 들어간다. 둘 사이에 이불 한 겹이 아니라, 말 한마디가 들어앉는다.
다음 날부터 집 안의 소리가 바뀐다. 큰소리가 아니라 ‘작게 조심하는 소리’가 많아진다. 접시가 부딪히지 않게 설거지를 하는 소리, 문이 세게 닫히지 않게 손잡이를 오래 잡는 소리.
남편은 ‘잘하려는’ 일을 늘린다. 양념치킨을 사 오고, 딸기를 씻어놓고, 바다를 보러 가자고 말한다. 말이 많아질수록 아내의 대답은 짧아진다.
“응.”
“아니.”
“나중에.”
어느 순간부터 남편은 휴대폰을 탁자 위에 엎어두지 않는다. 늘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충전기도 침실 쪽으로 옮긴다. 그 작은 변화가 눈에 더 잘 들어오는 밤들이 있다.
겨울이 깊어지면서 대화는 필요한 말만 남는다.
불 끄는 말,
문 잠그는 말,
밥 먹으라는 말.
어느 아침, 남편이 아주 작게 말한다.
“영화나 볼까.”
아내는 바로 대답하지 않는다. 한참 남편 얼굴을 본다. 남편이 눈을 피하지 않는 걸 보고,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인다.
극장에 도착하자 남편은 아내가 화장실로 들어간 사이 매표기 앞에 선다. 예매 화면을 열어두고 오래 망설인다. 좌석을 고르는 손이 몇 번 멈췄다가, 결국 내려간다.
표를 아내에게 건네고 남편이 먼저 상영관에 들어간다. 뒤따라오는 아내의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그 다음은, 내가 극장에서 본 그대로다.
옆자리는 비어 있고, 한 줄 뒤에서 팝콘이 바스락거린다.
남편의 손가락은 팔걸이 위에서 잠깐 멈췄다가, 다시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진다. 사람들은 먼저 일어난다. 그 부부는 조금 늦게 일어난다.
남편이 통로로 나선다.
아내는 한 줄 뒤에서 따라나선다.
복도에서 남편이 잠깐 멈춰 선다.
아내도 멈춘다.
남편이 한 걸음 떼면,
아내도 한 걸음 뗀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문 앞에서, 아내가 거의 들리지 않게 말한다.
“조금만 더 기다려줘.”
남편은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문을 잡고 서 있다.
아내가 먼저 지나간다.
남편이 뒤따라 나간다.
밖은 비가 그친 뒤 냄새가 난다. 로비에서 따라오던 카라멜 팝콘 향은 문턱에서 끊긴다.
이건 내가 만든 이야기다. 실제로 그 부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 한 줄 뒤라는 선택이, 내 귀에는 이런 문장들처럼 남는다.
“아직은 옆자리에 못 앉겠어.”
“그렇다고 등을 돌리고 떠나진 않을게.”
“내 감정이 따라오는 데 시간이 필요해.”
“당신이 포기하지 않는 걸 알아.”
그리고 어떤 날은, 빈자리 하나가 생각보다 오래 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