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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희미 Jun 01. 2021

연극 유리동물원(2021) 리뷰

2021. 05. 29 아트원씨어터 2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에서 2021.04.06-2021.05.30 공연된 연극 <유리동물원>을 관람했다.

5월 29일 토요일 6시 30분 공연이었고, 캐스트는 아래와 같다.



직접 찍은 캐스트보드와 커튼콜 사진을 제외하면 이 포스트에 사용된 모든 사진의 출처는 제작사인 MBZ컴퍼니의 공식 트위터(https://twitter.com/mbzcompany)임을 미리 밝힌다. 또한 본 포스트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자, 연극 <유리동물원>과 테네시 윌리엄스의 다른 몇몇 극들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을 밝힌다.




<유리동물원>은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명한 대표작들 중 하나다. 2014년 명동예술극장에서 관람한 이래로 7년만에 이 극을 다시 만났다. 그 사이에 2017년이었나 테네시 윌리엄스의 다른 극인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를 예당 토월극장에서 관람했었다. (두 극 모두 남성 주연 톰, 브릭을 이승주 배우가 연기했다) 작가의 또다른 유명작인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까지 한꺼번에 놓고 보면 이 세 가지 극 속에는 다른 듯하면서도 비슷한, 돌고 도는 몇몇 테마들이 있다. 이를테면 미국 남부라는 직간접적인 배경, 현실 도피적인 인물들, 자전적 요소, 어긋난 가족 같은 것들. 아만다-블랑쉬-매기 이 세 여성 인물들에게도 유사성이 있다. 셋 다 좀 히스테릭한 여성들이다. 그들의 히스테리는 과거에 겪은 상실로부터 유래한다. 아만다는 남편과 결혼하면서 남부에서 지낼 때 누리던 안락하고 교양 있던 생활을 잃어버렸고, 결혼 후 남편 또한 상실한다. 먼 곳으로 떠난 그의 생사 여부는 사실 확인되지 않았지만 죽었든 살았든 아만다에게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아만다에게 있어 남편은 영영 상실된 사람이다. 블랑쉬 역시 남편을 잃었고 ‘아름다운 꿈’이라는 뜻을 가진 집안의 농장 벨 레브Belle Reve 또한 상실한다(결국 이게 블랑쉬의 꿈이 상실된 것이라고 많이들 해석한다). 매기는 유년기 끔찍한 가난으로 인해 본인이 인간으로서 추구했던 욕망을 좌절당했다. 이후 부잣집 아들 브릭과 결혼하지만, 브릭이 그녀와 부부관계를 맺지 않기 때문에 좋은 집에서 돈 걱정 없이 남편과 서로를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그녀의 욕망은 또 한 번 꺾인다.


위에 언급한 세 명의 ‘남부 여성’들은 정말 뜨거운 양철지붕 위에 올라와 털을 곤두세우고 있는 고양이마냥 불안정하다. 관객들은 극이 진행되는 내내 그들의 삶에 녹아든 강렬한 불행과 거기서 파생된 광기 및 욕망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유리동물원>의 로라는 언급한 세 여성들과는 결이 전혀 다른데, 마찬가지로 시선을 뗄 수 없는 인물이다. 로라는 다정하고 착하지만 극도로 유약하고 수줍음을 타고 무능력하다. 그녀는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고 절름발이에, 결혼할 상대도 없고, 일할 의지나 능력도 없다. 가족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동안에는 비교적 안전할지 몰라도 장차 그녀의 삶이 불행해지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아만다도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어떻게든 딸을 도우려고 한다. 그래서 자신과 톰 대신 로라를 한평생 책임져 줄 사윗감, 멋진 신사를 데려와 로라와 이어 주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 계획은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역시나 파멸로 끝난다.


현대의 많은 관객들은 테네시 윌리엄스가 여성을 그려내는 방식을 불편해하고 거슬려할 것이다. 블랑쉬는 정신병원에서 어떻게 됐을까? 매기는 브릭과 정말 행복해질 수 있을까? 톰이 떠난 후 로라와 아만다는 잘 살았을까? 이 질문들을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면 예스라고 대답하기 어렵다. 그 시절에 성폭행을 당하고 정신병원에 갇힌 여자의 남은 인생이 평온했을 리 만무하고, 브릭은 매기를 사랑한다기보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는 그녀의 삶에 대한 열정에 감화된 것뿐이다. 따라서 설령 아이가 생긴다 한들 그들은 매기가 원했던 이상적인 가족은 될 수 없을 것이다. 남편도 없고 생계를 책임져 주던 아들도 잃어버린 늙은 아만다가 혼자서 문제투성이 딸을 데리고 잘 살아갈 것 같지 않다. 이미 비참한 삶을 살아온 여성들이 극중 또 비참한 일을 겪고 앞으로도 비참하게 살아갈 테니까, 보는 관객은 이 작가 여자 너무 싫어하는 거 아니냐? 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인디펜던트에서 1994년에 쓰인 재미있는 아티클을 하나 찾았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극에서 여성 인물을 실제로 연기한 배우들의 인터뷰가 포함되어 있다. THEATRE / Tennessee Williams and his women | The Independent | The Independent


인상적으로 읽은 몇몇 구절만 인용해 보겠다.

Although they are often brutalised by the situation, I think of the women as the cats, the fighters. Stella loves sex and she loves it with Stanley. That means she has to put up with a lot. That doesn't make her a victim, it's something she wanted. It's so rare to see plays where women express their desires. It doesn't matter whether they are fulfilled or frustrated, it's never invisible. Their desire drives them. That was really shocking. Women who wanted sex and had their own desires.
The women are survivors. If Blanche weren't a survior she would have been dead before the play began. She has come to Stella's to live, to survive. It may be the last post, but she hasn't slashed her wrists. There's received opinion that she's a nymphomaniac. Not true. That she's a prostitute. Not true. Olivier never really liked the play. He only did it because Vivien Leigh was desperate to do it. It's nonsense to suggest that his women are just gay men. Men and women are far more similar in our sexuality than we are brought up to believe. The women's parts in his plays are the best parts. That's so unusual. We get used to it being the other way round and having to flesh roles out. Men find it rather difficult to play what are seen as subsidiary roles.
Many of his women commit violence to themselves and so many actresses are excited by the possibilities of this. We tend to turn upon ourselves and implode when unhappy. Williams understood that in an uncanny way. They humiliate themselves, like Blanche in front of Stanley (in A Streetcar Named Desire), and when it all goes wrong, they take a lot of pills and sit and drink. There's a terrific sense of inevitability. It's fatalistic, but at the same time self-induced. He charts them moment by moment. You watch them drink and you're thinking, 'Don't] Don't]' They prostrate themselves on the altar of soul- searching, and you know it's all going to go horribly wrong.


요약하면 당시에는 자신만의 욕망을 가지고 그것을 당당히 드러내는 여성 인물을 보는 것 자체가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으며, 윌리엄스는 여성이 불행을 마주했을 때 드러내는 자기파괴 양상을 실감나게 포착했고, 그의 극에서 여성은 정말 드물게도 가장 좋은[중심적인] 역할을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테네시 윌리엄스가 실제로 여성을 싫어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고 내 알 바도 아니지만, 아무튼 그가 단순히 여성을 싫어했기 때문에 극중에서 여성을 고통받게 했다는 식의 해석은 납작한 것 같다. 그의 여성 인물들이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극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실상 테네시 윌리엄스의 여성 인물들은 여성이라기보다 작품 자체가 내보이려 하는 삶의 비극성, 위선, 허위의식, 인간의 나약함 따위를 표현하기 위한 도구이며 이것은 남성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물론 여성이기에 그 메시지가 더욱 강하게 전달된다. <레 미제라블>에서 가브로쉬가 죽는 장면을 생각해 보라. 노인, 여성, 아이 등 약자가 비참하게 사망할 때 작품의 비극성은 극대화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여성 인물들이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피해가기는 어렵다. 나도 블랑쉬와 로라의 자기파괴적인 면모를 안타까워하면서 사랑한다. 매기의 생명력을 사랑하고 ‘과거의 영광을 되풀이하려는’ 아만다의 개츠비스러운 야망도 사랑한다. 그러나 거칠게 말하자면 요즘은 자기 팔자 자기가 꼬는 듯한 블랑쉬와 로라를, 자신의 행복을 타인에게 의존하는 매기를, 약간 꼰대 같은 아만다를 너그럽게 봐 주지 못할 관객이 많지 않을까. 테네시 윌리엄스의 작품들은 시대를 뛰어넘는 메시지를 담았기에 오랜 기간 사랑받았지만, 당연하게도 시대적 한계 역시 내포하고 있다.


연극 <유리동물원>의 연출 및 제작진도 이 한계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던 듯하다. 온라인 관객과의 대화라는 질의응답 이벤트가 있었던 모양인데 다음과 같은 답변을 발견했다.



“특히, 로라의 캐릭터를 원작처럼 표현해서는 연극 <유리동물원>을 2021년에 공연하는 의미를 찾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로라가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건 맞지만, 모두가 바깥세상의 현란함에 현혹돼 자기 성찰을 게을리하는 시대에 자기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힘을 가진 존재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서울대병원 입구 근처에서 연극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나 시대의 반영이라고 했나 아무튼 그런 문구가 붙은 포스터 보드를 본 적 있는데, 그 문구에 걸맞는 대답이다. 저런 연출 의도는 극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실제로 나는 이번 <유리동물원>을 보면서 2014년에 본 공연과 비교했을 때 로라가 상당히 다르다고 느꼈다.


물론 2014년 공연도 훌륭했다. 극의 완성도나 배우의 연기 문제가 아니다. 2014년 공연이 원작의 허망하고 부유하는 듯한 분위기, 비극성을 훌륭히 재현했다면 2021년 공연은 인물들이 각자의 삶을 지속해 나갈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본다. 난 이 공연의 톰, 아만다, 로라는 별로 걱정되지 않았다. 2014년 공연을 봤을 땐 하루종일 여운에 빠져 우울했는데 이번에 보고 나와서는 그들이 각자 잘 살아갔을 것이고 심지어 언젠가 한 번쯤은 다시 만났을 거라는, 이런 톰이라면 아버지와 달리 긴 방황 끝에 결국 가족을 다시 찾아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무리 똑같은 원작을 기반으로 해도 이렇게 연출에 따라 전혀 다른 극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 사람들이 봤던 극도 다시 올라오면 자꾸 또 보러 가는 것이다. 물론 캐스트에 따라서도 느낌이 천차만별이다.





<유리동물원>은 작가의 자전적인 요소가 특히 두드러진다고 평가받는 작품이다. (다른 작품들에도 자전적인 요소가 여기저기 녹아들어 있긴 하다.)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떠난 집, 나레이터이자 남자 주연인 톰이 어머니 아만다와 다리가 불편한 누나 로라를 부양하고 있다. 톰은 화물 컨테이너에서 일하지만 틈만 나면 글을 쓰고 밤에는 잠까지 줄여 가며 영화를 보러 다닌다. 톰에게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모험가의 기질이 있다. 그는 자신을 옭아매는 모든 답답한 현실로부터 도피해 멀리 떠나고 싶어한다. 그에게 가족은 짐 같고 짜증나는 존재지만, 동시에 사랑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휘종 배우는 현실적인 삶의 압박에 답답해하는 꿈 많은 사회 초년생이면서 재간둥이 아들 겸 남동생이라는 톰의 포지션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전체적으로 어리고 치기 있는 느낌이었는데 또 무게를 잡아야 할 때는 충분히 차분하고 진지했다. 톰이 극의 진행을 이끄는 나레이터인 만큼 까다로운 역인데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장면장면을 잘 넘나들어서 관객인 나는 편안하게 이끌려 갔다. 아만다 역의 양서빈 배우와 케미스트리가 좋았다. 양서빈 배우의 아만다는 정말 인상 깊었는데 남부의 고상하고 교양 있는 집안 출신이었던 만큼 어느 정도는 새침떼기고, 이미 나이가 들었는데도 소녀 같은 면이 있고, 어머니라 필연적으로 아이들을 가슴 깊이 사랑하고, 어떻게든 낙관적으로 살아 보려 노력하지만 뜻대로 안 되는 일들이 차곡차곡 쌓여 왔기에 사실은 조금만 톡 건드려도 폭발해 버릴 것 같은 상태라는 걸 놀랍도록 설득력 있게 전달했다.



짐은 플루로시스(폐렴)에 걸렸다는 로라의 말을 잘못 알아듣고 로라를 ‘블루 로즈’라고 부르는데, 로라가 푸른 장미라면 아만다는 노란 수선화다. 수선화는 영어로 나르키소스라고 불리는데, 어린 시절 그리스 로마 신화 좀 읽었다면 아마 나르키소스가 못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반해서 죽었다는 일화를 기억할 것이다. 그래서 수선화의 꽃말은 자기애다. 파란색과 노란색이라는 보색대비(한색과 온색의 차이)와 푸른 장미는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자연에서 날 수 없는 꽃이지만 수선화는 봄이 되면 흔히 볼 수 있는 들꽃이라는 생명력의 대비는 로라와 아만다가 얼마나 다른 인물인지 잘 보여준다. 아만다는 끊임없이 블루 마운틴에 살 무렵의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나는 이런 사람이었다고 자식들에게 자랑한다. 스스로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자기 자식들 역시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애들, 재능 있는 애들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로라는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극중 인물들은 로라에게 남의 눈에도 거의 띄지 않는 아주 사소한 결함만 있을 뿐이라고 하지만, 로라에게도 극을 보는 관객에게도 로라의 결함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다리를 끌며 걷는 로라는 힘겨울 것이고 그 걸음걸이를 지켜보는 관객 역시 불편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관객의 입장에서 본다면 로라의 결함만이 가시적으로 눈에 띈다. 로라뿐만 아니라 이 극에 등장하는 다른 모든 인물들에게도 다 결함이 있다. 아슬아슬하게 중독의 경계를 넘지 않는 톰의 알콜 및 니코틴 남용과 방랑벽, 아만다의 히스테리와 모든 일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려는 버릇, 짐의 허풍과 바람기, 그것들이야말로 진짜 눈에 띄지 않는 결함이다. 언뜻 로라만이 집안에 갇혀 사는 히키코모리 문제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까 제작진의 답변을 다시 인용하여) “모두가 바깥세상의 현란함에 현혹돼 자기 성찰을 게을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공연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하나만 꼽으라면 이 사무치게 아름다운 왈츠 씬. 로라가 불편한 다리에 제약받지 않고 자유롭게 춤을 춘다. 살면서 처음으로 내가 날아오를 수도 있겠다고 느낀 로라의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장면이라 나까지 뭉클했다. 톰, 아만다, 로라가 사는 집 맞은편에는 파라다이스 뮤직홀이 있어서 밤마다 미러볼 조명과 음악소리가 흘러나오는데 그 음악과 조명이 로라의 좁고 어두운 세계였던 집을 한순간이나마 말 그대로 천국처럼 만들어 주었다. (욕망전차에서도 블랑쉬가 내린 역을 낙원Elysian Field 이라고 한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이런 네이밍 참 재밌다.)


이 왈츠가 끝날 때쯤 로라는 협탁에 놓아 두었던 유니콘 형태의 유리 장식품을 실수로 쳐서 떨어뜨리고 만다. 뿔이 사라진 유니콘은 평범한 말과 똑같아졌고, “이게 네가 가장 아끼는 거였잖아”라고 안타까워하는 짐에게 로라는 그래도 이제 이 아이는 다른 말들과 더 잘 지낼 수 있을 테니까 오히려 잘된 걸지도 모른다고 대답한다. 처음에는 춤을 못 춘다고 하던 로라는 짐의 리드를 받으며 점차 다리의 불편함을 신경쓰지 않고 춤을 추기 시작했고, 점차 ‘나도 남들처럼 할 수 있구나’라고 스스로를 긍정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로라는 마침내 자신 또한 다른 사람들처럼 살아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그 자신감은 푸른 장미처럼 세상에 없는 존재인 유니콘의 뿔을 거세했다. 로라는 이제 자신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남들이 사는 실제 세계 속에서 살아갈 것이기 때문에. 로라는 뒤늦게 짐으로부터 사실 약혼한 여자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기만당한 셈이지만, 사실 로라에게는 더 이상 자신을 푸른 장미라 부르는 짐이 필요하지 않다. 또한 짐에게 줘 버린 뿔 잃은 유니콘을 포함해 더 이상 어떤 유리 동물도 필요하지 않다. 극 마지막에 로라는 유리동물원의 모든 동물들을 바깥으로 꺼내 둔다.


김이후 배우와 김이담 배우도 좋은 케미스트리를 보여주었다. 김이후 배우의 로라는 전반적으로 좋았고, 김이담 배우의 짐은 신사답게 차려입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가벼운 느낌인 게 좋았는데 로라에게 조언을 할 때나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고백할 때는 조금 더 진중했으면 훨씬 입체적으로 보였을 것 같아서 그 부분만 아주 살짝 아쉬움이 남는다.



무대 사진은 단독으로 촬영하지 못하게 했는데 공식 트위터에도 전체 무대 사진이 없어서 아쉽다. 무대가 전체적으로 창살에 뒤덮인 감옥처럼 꾸며져 있고, 정중앙에 아버지의 사진이 걸려 있으며, 바로 아래 역시나 창살에 둘러싸인 로라의 유리동물원이 있다. 결국 이 집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유리동물원이고 그 안에서 생활하는 가족들은 깨지기 쉬운 유리 조각품처럼 너무도 연약하고 쉽게 상처받는 인간들이다. 그들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외부로부터 안전한 집 안에서 나름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집은 벗어나고 싶은 답답한 공간이 되기도 하고 가족이라는 관계 역시 많은 불편함을 준다. 유리는 세심하게 관리해야 한다던 로라의 말처럼 가족 간의 관계 역시 단순한 애정과 미련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섬세한 배려가 필요한 것 아닐까.





커튼콜 촬영. 이날 두 여성 주연분 막공이라고 무대인사가 있었다. 좋은 공연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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