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대물/사극을 좋아한다.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살아 보지 않은 과거에 대한 환상과 향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지나간 시대라서 통용되는 낭만과 멋스러움도 있다. 이제는 한물 간 구닥다리 기술들과 아날로그적 생활방식이 괜히 좋아 보이기도 한다.
되짚어 보면 시대물 중에서도 영국 배경의 작품들을 많이 봤다. 유명작이 많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일단 내 전공부터가 영문학인데다 빅토리아 시대 작품으로 석사논문을 썼기 때문에 그냥저냥 공부하다 관심이 생겨서 본 것도 많다. 그래서 전에 본 작품도 다시 들여다보고 원작이 있으면 책도 한번 펴 보고 역사 공부도 좀 하려고(사실 세계사에서 영국은 대체로 만악의 근원이다;) 영국 시대물 영화&드라마 특집 리뷰를 기획해 보았다.
문제는 시대물이라고 해도 장르가 로맨스, 스릴러, 첩보물, 전쟁물 등등 천차만별인 것이다. 하지만 그걸 일일이 세부적으로 나누긴 너무… 귀찮다…. 그래서 리뷰를 쓰기 위해 심플하게 다음과 같은 기준을 적용해서 작품을 선정했다.
(1)소설 등 책이 원작이거나 배경이 역사적 실화와 관련이 있으며
(2)내가 재미있게 봤고/보고 있고 취향이나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작품
첩보물은 내가 유독 좋아하는 장르라서 원산지(?)에 관계없이 나중에 따로 이것저것 묶어 리뷰를 쓸 생각이라 제외했다. 또 <아웃로 킹>이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블랙 47>등등 아일랜드나 스코틀랜드가 주된 배경으로 나오면서 잉글랜드와 대항하는 주제를 담은 작품들 역시 따로 묶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제외했다.
개인적으로는 영국 작품 하면 일단 뭔가 고전적 건축물들이 즐비한 도시(높은 확률로 런던), 시도 때도 없이 비 오거나 하늘이 허옇게 뜬 우중충하고 흐린 날씨, 똥 씹은 표정으로 지나가는 사람들, 회푸른 화면 필터 등이 떠오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뜬금없는 미장센이 가끔씩 등장하지만 기본적으로 철저하게 서사적인 작품이 많았다. 반대로 프랑스 작품은 서사를 상당히 배제하고 미장센으로 승부 보는 작품을 많이 본 것 같다.
또 사진처럼 아름답고 한적한 시골 풍경이 나올 때도 꽤 많다. 작중 인물의 지위나 거주지에 따라 아예 이쪽이 주된 배경인 경우도 있다. 벌써부터 <엠마>나 <이성과 감성>, <오만과 편견> 같은 유명한 로맨스 작품들이 떠오른다.
우선 <엠마>는 이번 리뷰에서 제외했다. 최근에 안야 테일러조이 주연으로 아름답게 리메이크되었지만, 내가 이 작품을 그닥 재미있게 보지 않았다. 원작 소설도 개인적으로 좀 심심하다고 느꼈다. <제인 에어>도 제외했다. 좋아하는 작품이지만 이건 원작을 포함해 여러모로 할 얘기가 너무 많아서 한도 끝도 없어질 것 같아 나중에 다른 글에서 다루기로 했다. <브리저튼>은 재밌게 봤는데 나중에 따로 리뷰하려고 제외했다. 이렇게 머릿속에서 열심히 소거법을 적용해가며 작품들을 선정해 아래의 리스트를 만들었다.
1. 더 페이버릿
최후의 스튜어트 왕조 군주인 앤 여왕 시대를 다룬다. 앤 여왕, 말버러 공작부인(사라 처칠)과 그녀의 사촌 애비게일 마샴 이 세 여성이 각자 이야기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서로의 욕망이 뒤엉키는 란티모스 감독의 비교적 덜 껄끄러운 수작.
2. 이성과 감성
약간 토끼같이 생긴 젊은 휴 그랜트가 당당한 펭귄처럼 차려 입고 나온다. 그가 연기한 에드워드는 등짝 한 대 치고 싶은 남자지만 얼굴이 휴 그랜트라 혀만 차고 말았다. 시대를 감안하고 봐도 앨런 릭맨과 케이트 윈슬렛의 나이 차이가 좀 신경쓰이는데, 앨런 릭맨의 잘생김과 순정에 자꾸 감화되어 그래… 둘이 행복하다면… 하고 말았다.
3. 오만과 편견(콜린 퍼스가 다아시로 나오는 드라마 버전)
영국인들은 이 드라마에 나오는 콜린 퍼스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동상까지 만들어 호수에 처박았다.
4. 메리 셸리:프랑켄슈타인의 탄생
『프랑켄슈타인』의 저자 메리 셸리의 삶과 작품 속 내용을 절묘하게 교차시킨다. 엘 패닝의 작품 선택이 늘 인상 깊은데 이 작품은 특히 좋았다.
5. 서프러제트
4와 함께 보면 더 좋을 듯한 작품. 영국에서 여성들이 참정권을 얻어내기까지 감내해야 했던 투쟁의 기록을 생생하게 포착한다. 위대한 쟁취를 위해 피와 땀을 희생한 여성들의 이야기.
6. 청춘의 증언
베라 브리튼이 출판한 동명의 회고록이 원작이다. 1차 대전을 배경으로 전쟁이 침투한 사회와 무너져 내리는 인간의 삶을 진솔하게 그려낸다. 눈물 한 바가지 쏟으면서 영화관 나왔던 작품. 알리시아 비칸데르의 연기가 정말 훌륭하다.
7. 다키스트 아워
게리 올드먼이 연기하는 처칠. 밑에 있는 <철의 여인>과 같이 보면 재밌을 것이다. 두 작품 모두 약간 주연 배우의 연기력 폭발 원맨쇼 같은 느낌이 든다. 비교하면 이 영화가 더 프로파간다적이다.
8. 채링크로스가 84번지
작중 배경이 영국과 미국을 오가긴 하지만 이야기의 주축이 되는 서점이 런던에 있고 앤소니 홉킨스도 나오니까 적당히 영국 시대물이라고 치겠다. 실존인물들이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동명의 책이 원작이다. 다 보고 나서 이런 명작을 뒤늦게 본 내 자신이 그렇게 한심할 수가 없었다. 이 영화를 보고 실컷 운 다음 충동적으로 펜팔 어플을 깔았는데, 당연하게도 내가 기대했던 감성은 없어서 마음에 상처만 입었다.
9. 철의 여인
특정 의견이나 관점을 거세하려고 애쓴 티가 팍팍 나는, 즉 몸 사린 티가 팍팍 나는 대처 전기 영화. 욕을 조금이라도 덜 먹기 위해 메릴 스트립을 데려오는 치트키를 썼다.
10. 더 크라운
조지 6세의 서거와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부터 시작하는 영국 왕실의 근현대사. 제작진이 고증을 매우 열심히 했고, 연출과 미장센이 훌륭하고, 의상·소품배·경에 제작비를 아낌없이 쏟아부은 게 보인다. 제목 그대로 군주제에 관한, 군주제에 의한, 그러나 군주제에 커다란 의문을 던지는 드라마.
딱 열 개만 골라서 대략 시대순(스튜어트 시대~근현대까지)으로 나열했다.빅토리아 시대가 배경인 영화/드라마는 너무 많아서 따로 묶으려고 일부러 제외했다. <천일의 스캔들>, <어톤먼트>, <다운튼 애비>, <킹스 스피치> 같은 작품들을 추가로 고려 중이다. 영국 시대물 리뷰를 하는데 이것들을 빼자니 왠지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넣자니 또… 뭔가 애매해서…. (특히 튜더 시대와 그 이전 시대에는 내가 별로 관심이 없다;) 의욕과 기력이 생기면 추가로 쓰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