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시네필인 친구가 이 영화를 보고 오더니 내가 좋아할 영화라며 꼭 보라고 추천을 했다. 같이 봤으면 더 좋았겠지만 멀리 사는 바쁜 친구라 약속 잡기도 힘들고 상영관도 별로 없길래 어찌저찌 나 혼자라도 시간을 내서 관람했다. 호불호가 심하게 갈릴 영화인데 친구의 예상대로 나는 아주 재미있게 봤다. <로스트 도터>는 매기 질렌할의 감독 데뷔작이며 엘리나 페란테가 쓴 동명의 소설 (국내에는『잃어버린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됨)을 각색한 작품이다. 올해 94회 아카데미 각색상, 여우주연상(올리비아 콜먼), 여우조연상(제시 버클리) 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고 78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했다. 아래 리뷰부터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다.
그리스 비극의 한 장면을 재현한 듯 비장하고 음울한 오프닝 시퀀스와 함께 영화가 시작된다. 주인공 레다 카루소는 비교문학을 전공한 교수이자 능력 있는 학자이며 두 딸을 가진 48세 여성이다. 어느 저녁, 그녀는 그리스의 한 휴양지 섬에 홀로 렌트카를 몰고 도착한다. 느긋한 휴가를 보내기 위해서 해변이 보이는 넓은 아파트까지 미리 임대해 두었다. 처음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레다는 대부분의 여행객들과 마찬가지로 설렘과 기대를 느끼며 멀리 보이는 해변도 둘러보고, 빌린 아파트 내부도 웃으면서 돌아본다. 푹 자고 일어난 후에는 낮부터 해변에 나가 수영을 즐기거나 책을 읽는 등 자유를 만끽한다.
주인공이 여행지에 도착하면서 시작하는 플롯이니 관객은 당연히 이 여행이 어떤 여행이 될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찝찝한 오프닝 시퀀스를 떠올려 보면 아무래도 그다지 밝고 즐거운 여행은 아닐 것 같다.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다. 아니나 다를까 초반부터 뭔가 불안한 기운이 감돈다. 식탁 대접에 담겨 있던 먹음직스러운 과일들은 사실 아래쪽이 몽땅 썩어 먹을 수 없는 상태다. 레다가 혼자서 여유를 즐기던 조용한 해변에는 질 나쁘고 예의 없는 대가족 한 무리가 들이닥쳐 시끄럽게 떠든다. 잠자는 공간, 즉 그 어디보다 고요하고 편안해야 할 침대 위에 매미 한 마리가 들어앉아서 큰 소리로 울어 댄다.
휴가의 목적은 휴식이다. 레다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휴식하기 위해 이 섬에 찾아왔다. 하지만 레다는 민폐 대가족 때문에 도무지 편안하게 쉴 수가 없다. 휴양지에서 휴식을 방해받다니 아주 짜증나는 상황이다. 그런데 그 대가족 중에서도 쉬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 있다. 바로 작은 어린아이의 엄마인 니나다. 니나는 끊임없이 칭얼거리는 딸을 돌봐야 하고, 딸의 비위를 맞춰 주어야 하고, 딸과 함께 놀아 주어야 한다. 한시도 눈 돌릴 틈이 없다. 천사처럼 예쁜 아이와 해변에서 놀며 웃는 젊은 엄마의 모습은 누구나 저절로 미소를 짓게 하는 흐뭇한 광경이지만, 사실 그 표면적인 이미지는 허상이다. 니나는 딸 엘레나에게 구속된 자신의 처지를 지긋지긋해한다. 딸을 사랑하지만 육아를 버티기가 너무 힘들어서 해방되고 싶어한다.
여기까지만 봐도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아름다운 표면 아래에 곯고 썩은 이면이 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그 이면을 구체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한다.
모성과 모순
레다의 눈에 띈 젊은 엄마 니나는 해변가를 시끄럽게 하는 퀸즈 출신 대가족의 일원이다. 니나의 시누이 캘리는 성격이 불 같고 입이 거친 사람인데, 니나는 상대적으로 얌전하고 예의가 바르다. 캘리와 레다는 첫만남부터 말싸움을 하느라 서로 첫인상이 좋지 않았지만 니나와 레다는 어째서인지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음에도 호감 반 호기심 반 섞인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나중에 니나는 레다에게 “처음 봤을 때부터 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느꼈어요.” 라고 고백한다. 둘은 본질적으로 동류다.
니나는 남편 토니와 사이가 좋지 않다. 토니는 캘리와 마찬가지로 껄렁하고 질이 나쁘고 건실하지 못한(적어도 그렇게 보이는) 사람이다. 니나는 아주 어렸을 때 그와 결혼했다. 니나의 말에 따르면 토니는 아내와 딸을 끔찍하게 사랑한다는데, 니나는 남편을 그만큼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휴양지의 아르바이트생 윌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 토니와 윌은 정반대 성향의 남자들이다. 니나가 강렬하게 끌리는, 불륜을 할 정도로 깊이 사랑에 빠진 남자는 윌처럼 다정하고 건실한 타입이다. 토니 같은 ‘나쁜 남자’가 아니라.
결혼할 만큼 서로 잘 맞는 성격도 아니고 토니를 미칠 듯이 사랑하는 것도 아니라면, 니나는 대체 왜 그 어린 나이에 토니와 결혼했을까? 나는 아기가 생겼기 때문일 거라고 추측했다. 이 추측이 맞다면 니나의 어린 딸 엘레나는 니나가 원하지 않았던 아이일 가능성이 크다. 진짜 그렇든 아니든 니나는 엘레나를 포기하지 않고 낳기로 결정했다. 그 결정은 니나의 삶을 힘겹게 만든다. 별로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해야 했고, 깐깐한 시누이와 대가족들 틈에 섞여서 생활하게 됐다. 언제 어디서나 엄마를 필요로 하는 어린 자식이 있으니 혼자만의 여유를 가지기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다. 겹겹의 압박 속에서 니나라는 개인이 설 자리는 사라졌다. 토니의 아내, 대가족의 일원, 엘레나의 엄마라는 정체성은 니나의 자아를 크게 위축시킨다.
특히 엘레나의 엄마라는 정체성이 니나를 너무나 지치게 한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나도 어린 사촌동생을 반나절 돌보면서 진이 다 빠졌던 기억이 있다. 제대로 된 육아를 한 것도 아니었는데 아이 돌보기가 그렇게 어려운 줄 그때 처음으로 뼈저리게 깨달았다) 아직 신체·언어·인지·정서가 발달 단계에 있는 어린아이들은 해야 할 행동과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뚜렷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인내심도 부족하며 원초적인 욕망을 마구잡이로 표출한다. 어른들에게는 상식적이고 기본적인 예의가 아이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애시당초 아이들에게 어른 수준의 지성을 기대해서도 안 되고 요구할 수도 없다. 아이들은 원래 그런 거니까. 아무리 답답하고 아무리 화가 나도 부모라면 이해해야 한다. 부모라면 견뎌 내고 반복적으로 다시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것이 부모의 의무다. 레다의 말대로 아이들은 참혹하리만치 부담스러운 책임(Children are a crushing responsibility)인 것이다.
그러나 부모도 인간인지라 참을 수 없는 순간,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온다. 특히 어느 한쪽이(대부분의 경우 엄마가) 육아를 전담할 경우 그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져서 거의 정신을 붕괴시킬 지경에 이른다. 극중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어린아이의 우는 목소리와 칭얼거리는 목소리는 관객에게까지 노이로제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지독하다. 부모의 애정을 원해서, 관심을 원해서 악의 없이 벌이는 악행들은 눈앞을 깜깜하게 만든다. 부모에게 자식은 언제나 사랑스러운 존재겠지만 자식이 만들어낸 사건사고들까지 사랑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때릴 수도 없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윽박지를 수도 없다. 타이른다고 알아듣지는 않지만 타이르는 것만이 최선일 때가 많다. 양육자에게 자연스레 따라붙는 무력감, 회의감, 우울감은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악몽과 비슷하다.
엘레나가 해변에서 실종되었다가 무사히 돌아왔을 때, 레다는 니나에게 기분이 어땠냐고 물어본다. 니나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내가 죽는 줄 알았다(I thought I was gonna die)고 말한다. 하지만 이후 엘레나를 데리고 쇼핑할 때나 해변에서 놀 때는 엘레나 때문에 힘들고 지친 기색을 숨기지 않는다. 즉 니나는 자신을 구속하는 엘레나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라면서도 정말로 엘레나가 사라지면 죽을 것만 같은 모순된 감정을 느끼고 있다. 레다도 마찬가지다. 레다는 오래 전 아이들에게 시달리다가 맏딸이 7살, 둘째가 5살 무렵 더는 버티지 못하고 가정을 내버려둔 채 혼자 떠났다. 그러나 아이들이 그리워져서 3년 후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아이들 없이 혼자 보낸 3년은 아주 멋졌지만(It felt amazing) 죄책감을 완전히 떨쳐 버릴 순 없었다. 니나 앞에서 이 이야기를 털어놓다가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차오를 정도로, 아이들을 포기했던 일은 레다에게도 큰 상처였다.
이런 모순은 무한하고 마르지 않는 절대적 사랑이라는 보편적 모성 신화의 허상을 벗겨낸다. 모성은 언제나 신성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포장되어 왔지만 아이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것이 항상 긍정적이고 찬란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때로는 아이를 키우는 일에 신물이 나기도 하고 진저리처지기도 하고 심지어 끔찍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레다, 예이츠, 전복된 신화
올리비아 콜먼의 연기도 경이로웠지만 나는 젊은 레다 역을 맡은 제시 버클리의 연기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영화 말미에 올리비아 콜먼이 읊은 대사는 레다라는 인물을 완벽하게 함축한다. “하고 싶은 건 다 해 봐야죠.” 레다는 정말 그렇게 살았다. 플래시백 속 제시 버클리는 레다가 거쳐 온 삶과 레다가 선택한 길을 담담하고 무심하게 보여준다.
사실 레다라는 이름부터가 문제적이다. 이 이름은 예이츠의 시 「레다와 백조」(Leda and the Swan)에서 유래한 것이다. 어린 시절 홍은영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은 사람들이라면 아마 바람둥이 최고신 제우스가 스파르타의 아름다운 왕비 레다에게 홀딱 반해서 백조로 변신해 접근했다는 이야기를 어렴풋이 기억할 것이다. 정숙한 왕비였던 레다는 제우스의 구애를 거절했지만 결국 백조로 위장해 다가온 제우스에게 겁탈당하고 만다. 그 결과 레다가 낳은 아이들 중 하나가 바로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되는 절세미인 헬레네다. 이 일화를 다룬 명화들도 아주 많다. 단순히 포르노그래피적으로 묘사된 그림도 있지만 의미심장한 작품도 있다.
영화 속 레다는 자신의 이름이 ‘고결하지만 반드시 겁탈을 떠올리게 되는’ 도발적인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극중 휴양지가 하필 그리스인 것, 주인공 이름이 하필 레다인 것, 예이츠의 시가 언급된 것 전부 당연하게도 우연이 아니다. 시 전문을 감상하려면:
예이츠의 「레다와 백조」는 이 영화와 마찬가지로 상당히 모호한 시인데, 시인의 조국이었던 아일랜드와 영국 사이에 벌어진 갈등을 염두에 두고 쓰였다고 흔히 해석된다. 겁탈의 주체인 신-남성-지배자 제우스는 아일랜드를 짓밟는 영국을, 겁탈당하는 주체인 인간-여성-피지배자 레다는 침략받은 아일랜드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강압적으로 이루어진 레다와 제우스의 육체적 결합은 어마어마한 거대 갈등(트로이 전쟁)의 불씨(헬레네)를 낳는다. 아일랜드를 흡수·통일하려는 영국의 야욕과 폭력은 1919년 아일랜드 독립 전쟁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영화가 일관성 있게 드러내는 ‘표면과 이면’의 주제가 이 시를 통해 간접적으로 반복된다고 봤다. 아름다운 백조의 이면에는 추악한 애욕을 품은 신의 민낯이 있다. 수면 위를 잔잔하게 떠도는 백조는 사실 발 아래서 미친 듯이 물장구를 친다. 시 속에는 현대 독자들(특히 여성 독자들)을 상당히 불편하게 하는 관능적 성교 묘사, 즉 겁탈당하는 주체인 레다가 강압적인 성관계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즐겼다는 암시가 들어 있는데 이 암시는 엄청나게 문제적이다. 한편으로는 미소지니고 다른 한편으로는 ‘도발적’이기 때문이다.
왜 처음에는 제우스를 거부했던 레다가 나중에 가서는 그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을까? 나의 해석은 이렇다: 잉태의 주체인 레다가 이 성교의 결과를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레다는 비록 무력한 상태로 침략자(제우스)에게 짓밟히지만, 후대에 태어날 레다의 딸(헬레네)은 세상을 들썩이게 만들 것이다. 비록 과거의 아일랜드인들은 오랜 기간 영국인들에게 원치 않는 지배를 받아 왔지만, 후대의 아일랜드인들은 자유 독립을 쟁취하게 될 것이다.
평화의 이면에는 갈등이 있다. 반대로 억압과 폭력의 이면에는 진보와 변화가 있다. 표면이 아니라 이면을 꿰뚫는 안목을 가졌다면 지금 이 순간의 고통과 강압에 굴복할 필요가 없다. 레다는 자신의 분신과 같은 자손(딸=후대의 여성)을 통해 계속해서 살아갈 것이고 심지어 더 나은 세상에서 더 나은 삶을 살아갈 테니까, 오히려 (매우 대범하게도) 이 고통을 기꺼워할 수 있는 것이다. 고통이 아니라 환희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이츠 시 속의 레다는 한편으로는 고결하면서 천박한(성녀이면서 창녀인) 여성, 전형적 미소지니를 답습하는 여성이지만 동시에 자신이 처한 현실을 인지하면서 더 나은 미래를 확신할 수 있는 통찰력을 지닌 여성이다. 제우스의 갑작스러운 겁탈과 원치 않았던 출산은 레다를 옭아매지 못한다. 레다는 도덕성을 손쉽게 내려놓고(전형적인 피해자성을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능동적인 태도로 성교에 참여해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개척하려 한다.
이 시에서 이름을 따온 영화의 주인공 레다 역시 비슷한 영혼을 가졌다. 레다는 두 딸의 엄마지만 스스로의 표현처럼 비정상적인 엄마(unnatural mother)다. 정상성의 범주에 들어가는, 세간에서 자연스럽다고 판단되는 엄마 역할을 거부한다. 정상성을 이탈하면서 따라붙는 죄의식과 도덕적 고통은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대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비정상적인 엄마’로서 벌이는 행위들(커리어 성취, 불륜, 가정 도피)을 마음껏 즐긴다. 겁탈당하는 피해자치고는 ‘비정상적으로’ 성교를 즐기고 긍정한 예이츠 시 속의 레다처럼. 레다의 욕망은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한다. 끝까지 제우스를 거부해 봤자 신의 노여움을 사서 죽기나 했을 것이다. 끝까지 ‘정상적인 엄마’로 남았다면 교수가 될 만한 커리어를 쌓지도 못했을 테고 지나친 스트레스 탓에 정신병에 걸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레다는 정상성으로 포장된 자기파괴를 선택하지 않는다. 아무리 이기적이고 비윤리적일지라도.
물러서지 않는 자아, 아물지 않은 상흔
영화 초반에 레다와 캘리가 처음 갈등을 빚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대가족들과 함께 해변에 도착한 캘리는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 자리를 비켜 달라며 양해를 구한다. 오늘은 캘리의 생일이고, 캘리는 가족끼리 모여 앉아서 생일을 축하받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일하게 레다만 다른 자리로 가고 싶지 않고 여기에 앉고 싶다면서 캘리의 부탁을 거절한다.
사실 캘리의 부탁이 (좀 짜증날 수는 있어도) 못 들어줄 부탁은 아니다. 다른 날도 아니고 생일이라지 않은가. 게다가 캘리는 자리를 양보해 준 사람들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음료수까지 대접했다. 캘리는 대체 왜 레다가 고집을 피우면서 그 자리에 버티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레다의 입장에서는, 생일이든 아니든 가족과 함께 있고 싶든 말든 알 바가 아니다. 그건 캘리의 사정일 뿐이다. 모두가 함께 쓰는 해변에서 특정 자리를 독점할 권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레다는 남의 사정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도 않고 타협하지도 않는다. 남들이 욕하든 말든, 누가 뭐라고 하든, 앉고 싶은 자리에 떡 버티고 앉는다. 물러서지 않는다.
레다의 삶은 이런 굳건한 ‘버티기’의 연속이었다. 레다는 젊은 나이에 결혼해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지만 학자로서의 커리어도 성적인 욕망도 개인으로서의 자유도 무엇 하나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그것들이 엄마라는 정체성(필연적으로 큰 희생을 동반하는 정체성)과 지속적으로 충돌한다는 것이다. 레다는 물러서지 않기 위해 버티고 또 버틴다. 그러다 정말로 질식할 지경에 다다르자(I’m suffocating) 자아와 의무 사이에서 과감히 전자를 선택한다.
앞서 말했듯, 이 선택은 레다에게 자유를 주었지만 동시에 상처로 남았다. 개인으로서 레다는 성공했다. 엄마로서 레다는 실패했다. 실패의 상흔은 아무리 무시하고 억압해도 레다의 가슴 한구석에, 무의식 한 귀퉁이에 머물며 유령처럼 돌아온다. 고통과 죄책감을 묻어둘 수는 있어도 완전히 도려낼 수는 없다. 설령 방법이 있다 해도 레다는 그 방법을 모른다.
이 영화에는 레다가 엘레나의 인형을 훔쳐서 깨끗하게 씻기고 돌보는 기괴한 서브 플롯이 있다. 엘레나는 사라진 인형에 어마어마한 집착을 보이는데, 레다에게도 어린 시절 그런 인형이 있었다. 그 인형의 이름은 미나(Mina)다. 조그만 엄마(Mini-Mama)라는 뜻이다. 레다는 자신이 소중히 여겼던 인형 미나를 딸 비앙카에게 물려주지만 비앙카는 미나를 짓밟고 미나의 몸에 낙서를 한다. 엄마가 자신에게 원하는 만큼 관심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꼭 복수하듯이, 화풀이를 하듯이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이다. 레다는 딸의 행동에 분개한다. 비앙카에 의해 엉망진창이 된 인형 미나는 딸에 의해 삶이 망가진 엄마 즉 레다 자신과도 상응한다. 레다는 크게 화를 내면서 미나를 창 밖으로 내던진다. 인형이 산산조각난 순간 레다가 간신히 붙잡고 있던 엄마로서의 정체성도 무너진다. 오체분시된 인형의 모습처럼, 이것은 끔찍한 외상이다.
훔친 인형을(비앙카가 훼손한 미나처럼 엘레나에 의해 마구 훼손된 지저분한 인형을) 닦고 씻기고 품에 소중히 끌어안는 레다의 행동들은 외상을 치유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인형을 상대로 상징적·간접적인 육아를 재현함으로써 레다는 자신이 ‘정상적으로’, ‘자연스럽게’ 해내지 못했던 엄마 역할을 뒤늦게나마 수행한다.
가끔씩 영화나 드라마에 비슷한 정신과 심리 치료 장면이 등장하곤 한다. 환자에게 정신적 외상으로 남은 과거의 특정 사건을 재현하게 해서 그 당시 자신의 감정을 똑바로 마주하고, 상처를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을 용서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물론 외상이 쉽게 극복되지는 않는다. 레다가 엘레나의 인형을 깨끗하게 닦아내는 과정이 쉽지 않듯이. 어느 정도 말끔해진 듯 보이던 인형의 입 속에서는 징그러운 벌레가 튀어나온다. 이처럼 표면적으로 괜찮아 보여도 외상은 돌발적으로 되돌아올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런 재현 치료는 분명 어느 정도 외상을 완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사람이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도록, 완전히 썩어 버리지 않도록 도와준다.
어머니의 계보
산산조각난 레다의 인형 ‘미나’는 ‘니나’와 발음이 거의 같다. 매우 의도적으로 설정된 두 이름의 유사성은 니나의 미래를 예견한다. 니나는 딸 엘레나의 인형을 훔친 레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경악하며 레다가 미친 여자라고 생각한다. 맞는 말이지만 슬프게도 그 미친 여자는 니나의 미래 모습이다. 레다와 니나는 애초부터 동류였다. 차이점이라곤 그저 같은 삶을 레다가 니나보다 먼저 살았을 뿐이다.
어머니가 된 여성들 사이에는 이름이 닮았다는 단순한 수준을 뛰어넘는 거대한 유사성이 있다. 이 영화에는 딸을 가진 어머니가 셋이나 나온다. 레다, 니나, 아직 임신 중인 캘리. 나머지 둘과 상당히 이질적인 존재로 보이는 캘리조차도 레다와 니나가 앞서 겪은 어머니로서의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영화 말미에 캘리와 레다가 해변가에서 서로를 빤히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마치 영화 초반부에 니나와 레다가 그랬던 것처럼. 세 명의 전혀 다른 개인들이 모성이라는 하나의 공통점을 통해 기이할 정도로 겹쳐진다.
이 어머니의 계보 맨 위에는 고대 그리스 종교가 쇠퇴한 이래 서구 사회 태초의 어머니가 된 이브가 자리하고 있다. 스스로의 욕망에 따르느라 뱀의 유혹에 넘어갔고 선악과에 손을 대서 낙원 이면의 세계를 마주하게 된 여성. (사족인데 영화 초반에 레다가 읽고 있던 책이 단테의 천국Paradiso 이다) 이브의 모든 딸들은 그녀의 욕망, 그녀의 고통, 그녀의 죄책감, 그녀의 기쁨, 그녀의 생명력을 물려받았다. 어머니는 딸을 낳고 다 자란 딸은 어머니가 되어 다시 딸을 낳으면서 이브와 같은 삶을 답습한다. 니나(후대의 여성)는 레다의 배꼽(어머니로부터 나온 탯줄의 흔적)을 찔러서 나와 당신은 같지 않다고 부정하지만 머잖아 자신이 토니의 대가족보다 훨씬 더 거대한 종족의 일원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상당히 섬세하게 구성된 비극이다.
결말은 오프닝 시퀀스로 회귀한다. 레다는 비극의 주인공답게 해변에 픽 쓰러져 죽음을 기다리지만 다음날 아침까지도 죽음은 찾아오지 않는다. 여명이 밝자 레다는 딸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자신은 살아 있다고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살아감이란 죽음보다 훨씬 무거운 형벌이며 더 끔찍한 비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다는 다시금 과일 껍질을 벗긴다. 뱀처럼 길게 이어지도록, 끊어지지 않도록(Peel it like a snake. Don't let It break). 영화에서 묘사되지는 않았으나 껍질 벗기기가 끝난 후 그녀는 아마 마침내 드러난 달콤한 과실을 먹었을 것이다. 망설임 없이, 늘 하던 대로. 그렇게 계속해서 살아갈 것이다.
미처 쓰지 못했는데 영화 속 남성 인물들과 레다 사이의 상호작용도 굉장히 흥미롭다. 특히 관리인 라일 역할로 나온 애드 해리스는 잠깐씩 등장하는데도 존재감이 대단하다. 그러나 <로스트 도터>는 궁극적으로 여성에 관한, 어머니에 관한 영화였다고 생각해서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리뷰했다. 내 친구는 제시 버클리의 젊은 레다를 보고 나를 떠올렸다고 한다. 실제로 내겐 엄청나게 공감 가는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레다만큼 대범해질 자신은 없다. 레다의 이기심과 무책임한 행동들을 질책할 관객도 많을 것이다. 또 극중 현재 시점에서 레다가 대체 왜 저러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관객도 많을 것 같다. 레다가 제정신이 아니라서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다….
이렇게 배배 꼬인데다 부도덕하고 이기적인 인물을 온정적으로 바라보거나 사랑하기란 참 쉽지 않지만 나는 영화를 보면서 레다를 사랑하게 됐다. 원작을 읽어 보진 않았지만 각본의 저력이 느껴졌고, 매기 질렌할의 느슨한 듯 치밀한 연출도 인상적이었다. 극장에서 내리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