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중 청춘 농도를 올리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하고픈 영화. 포스터 속 청량한 이미지를 보고 일본 특유의 여름 감성을 꽉꽉 채워 넣은 영화겠거니 예상을 하긴 했지만 의외로 상당히 묵직한 주제를 담고 있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가볍고 발랄한, 큰 감정 소모 없이 보기 딱 좋은 영화다. 나는 친구와 함께 관람했는데 엔딩 크레딧이 끝난 뒤 둘 다 한껏 광대를 끌어올린 채 미소를 지으며 상영관을 빠져나왔다. 아래 리뷰부터는 스포일러가 있다.
왼쪽부터 ‘킥보드’, ‘맨발’, ‘블루 하와이’라는 귀여운 별명을 갖고 있는 십대 소녀 세 명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이다. 킥보드는 천문부, 맨발은 영화부, 블루 하와이는 검도부다. 생김새도 개성도 각양각색인 이들은 방과 후 강변 근처에 있는 버려진 소형차로 모여든다. 이곳은 그들만의 아지트이며 모여서 주로 하는 일은 오래된 사무라이 영화를 관람하는 것이다. 벽에는 구하기도 어려운 사무라이 영화 포스터들이 붙어 있고,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오래된 TV 화면 너머로는 흐릿한 화질의 DVD 영상이 재생된다. 스마트폰을 쓰는 걸 보면 작중 배경은 현재가 분명한데 이 셋은 대체 어쩌다 이런 구닥다리 취미를 가지게 된 것일까. 원흉은 바로 맨발이다. 맨발은 사무라이 영화 매니아라서 친구들과 자신의 취미를 함께 즐기고 싶어한다. 블루 하와이는 검도부라 검을 쓰는 사무라이 영화에 나름 관심이 있는 듯하고, 천문부인 킥보드는 사실 별 흥미가 없지만 다른 두 친구들과 함께 있고 싶기 때문에 그들의 취미에 어울려 주는 듯하다. 정말로 어디엔가 있을 법한 친구들이다.
사무라이 영화에 심취한 맨발은 <무사의 청춘>이라는 각본까지 직접 집필한다. 하지만 이 각본은 영화부 예산을 따내는 심사 과정에서 탈락한다. 대신 영화부의 아이돌 카린이 쓴 로맨틱 코미디 각본이 채택된다. 결국 맨발은 자기 취향도 아니고 작품성도 의심이 가는 지루한(본인 표현에 따르면 사랑한다는 말이 너무 많이 나와서 ‘아방가르드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 제작을 지켜봐야만 한다. 당연하지만, 협조할 의욕도 응원할 의욕도 없다.
물론 맨발도 요즘 관객들 특히 자기 또래의 관객들은 비장한 흑백 사무라이 영화보다 다채롭고 달콤쌉싸름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더 보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취향이 독특한 거니까 어쩔 수 없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하지만 속이 쓰리다. 열심히 쓴 각본일 텐데 실망스러울 수밖에. 바로 옆에 붙어 지내는 친구들은 이런 맨발의 심정을 다 알고 있다. “너 영화 만들어야 되는데.” 킥보드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맨발은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괜찮다고 얼버무린다.
만약 이들이 십대가 아니라 이미 다 자란 성인이었다면 이 장면은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관객에게도 좀더 무겁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재능에 대한 의구심, 대중성과 작품성 사이의 고민, 생계라는 현실적 문제 등등 고려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인의 대책 없는 열정은 비웃음거리가 되기 쉽고 인생을 비참한 나락으로 이끄는 직통 티켓이 될 때도 있다. 그러나 맨발을 포함한 세 친구들은 (물론 적정선은 지켜야겠지만) 아직 어른들의 가호 아래 마음껏 실수해도 괜찮은 미성년자다. 현실의 장벽에 부딪히는 건 필연이라 해도 체념하기엔 너무 이르다. 도전과 열정이라는 단어를 가장 효과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나이인데 그 특권을 벌써부터 포기하는 건 아쉬운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맨발은 어떤 우연한 만남을 통해 영화를 반드시 찍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미래와 이어지는 과거
사무라이 영화를 상영해 주는 오래된 극장에서 맨발의 눈에 띈 의문의 소년 린타로. 맨발은 자신이 쓴 각본의 주인공과 이미지가 정확하게 들어맞는 린타로를 보자마자 ‘이 사람을 반드시 내 영화에 출연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은 초면이 분명한데 린타로는 어째선지 맨발을 이미 아는 눈치다. 이유는 몰라도 맨발이 말을 걸려 했더니 식겁하며 도망친다. 하지만 맨발의 집념이 더 강했다. 맨발은 고생 끝에 린타로를 붙잡아서 영화 출연 제의를 한다.
킥보드가 읽던 책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린타로의 정체를 알려주는 가장 노골적인 복선이다. (첫 촬영 날 시대극 복장을 한 린타로의 머리 위로 ‘미래적인 기술’인 드론이 지나가는 장면도 의미심장하다.) 린타로는 시간을 역행한 소년이다. 미래인인 그는 어느 날 (미래에는 거장 감독이 된)맨발이 찍은 영화를 보고 큰 감명을 받는다. 그래서 맨발의 영화들을 모두 찾아보았지만, 딱 하나 데뷔작만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았다. 분명히 상영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영화는 소실된 것이다. 맨발 감독의 데뷔작이 너무나 보고 싶었던 열성팬 린타로는 급기야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역행하기에 이른다.
맨발과 린타로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 자신이 속한 동시대에 외면받는 과거의 영화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린타로가 사는 미래에는 현재 우리가 보고 즐기는 영화가 아예 사라졌다. 미래 사람들은 너무 바빠서 5초 이상의 영화를 소비하지 않는다. 1분만 되어도 너무 긴 영상이라고 평가받는다. 아무도 더 이상 남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 줄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誰も他人の物語に使う時間なんてないんだよ).
짧게 언급되었지만 아주 중요한 대목이다. 미래의 문제점은 영화가 없어졌다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극단적인 소통의 부재다. 제작자의 의도를 전달하는 매체라는 점에서 영화는 제작자와 관객 간 소통의 창구다. 소통은 쌍방향적인 것이다. 하이파이브를 할 때 어느 한쪽이 손을 들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라. 기껏 손을 든 사람만 허공에 팔을 내저으며 뻘쭘해지는 것이다. 아무리 제작자가 좋은 의도를 전달하고 싶어해도 귀 기울여 주는 관객이 없다면 메시지는 그대로 사장된다. 타인의 창작물(타인의 삶)에 줄 수 있는 관심이 평균 5초 정도인 세상은 얼마나 삭막하고 냉랭할까. 모두가 자기 자신의 사정에 매몰되어 타인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최소화한 세상, 그런 세상은 사실 생각보다 가까이 와 있을지도 모른다. 오구리(조명 담당)가 하긴 나도 2시간쯤 되는 영화를 보다가 잠든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영화의 평균적인 러닝타임을 버거워하는 관객은 지금도 많다. 당장 내 주변에도 영화 전체를 관람하는 게 번거로워서 유튜브로 요약 영상을 찾아보는 것이 더 좋다는 지인이 있다. 감독이 압축하고 압축한 두 시간조차 너무 길게 느껴지고 받아들이기 피곤해서, 쓸데없는 부분은 쳐내고 그냥 ‘핵심만’ 흡수하고 싶어한다. 사람들이 긴 글보다 짧은 글을 선호하는 경향성도 갈수록 뚜렷해진다. 다들 글을 세세히 꼼꼼히 뜯어보기보단 글 말미에 ‘한 줄 요약’을 달아 주길 기대한다. 타인의 이야기를 소중히 음미하고 공감하고 간직하는 시대는 지나간 것만 같다. 즉각적이고 짧고 명료한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는 시대니, 인스턴트식 소비 또한 당연한 수순인 것만 같다.
맨발은 왜 영화를 만들고 싶어할까. 맨발이 어느 날 밤 합숙하면서 팀원들에게 직접 이야기한다. 자신의 사무라이 영화 취향은 사실 할머니의 취향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맨발이 생각하는 영화란 스크린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이어 주는 것이다(映画ってさ、スクリーンを通して今と過去を繋いでくれるんだと思う).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는 과거가 된다. 하지만 맨발은 과거를 단순히 과거로 남겨 두는 것이 아니라, 기록함으로써(영화를 만듦으로써), “미래와 이어지고 싶다”(未来へ繋げたい)고 한다. 이 염원 덕분인지 기적(타임 리프)이 일어난다. 맨발이 정말로 미래, 즉 린타로와 이어지게 된 것이다. 자신이 만든 영화를 통해서.
사생결단의 진검승부, 공존불가능성
맨발이 좋아하는 사무라이 영화에서 상대를 ‘베는’(斬る) 것은 상당히 중요한 개념처럼 묘사된다. 나는 사무라이 영화에 별로 식견이 없는 문외한이지만, <썸머 필름을 타고!>에서 틈틈이 보여주는 영화 장면들과 맨발의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사무라이 영화에도 고착화된 장르적 문법이 있다는 사실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 문법에 따라 사무라이 영화 클라이맥스에서 주인공 사무라이는 자신의 숙적과 사생결단의 진검승부를 벌여야만 한다. 마치 서부극 클라이맥스에서 카우보이 둘이 등을 맞대고 총을 든 채로 몇 발짝 나아갔다가 쓰리 투 원! 하는 순간 뒤돌아 총질을 하면 한 명이 털썩 쓰러지는 클리셰처럼 말이다.
두 명의 무사가 서로를 ‘베는’ 행위는 물론 상대방을 죽이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지만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삶과 죽음을 단칼에 결정하는 승부를 벌이기로 했다는 것은 그들이 서로를 ‘자신의 목숨을 걸어도 좋은 상대’로 인정했다는 뜻이다. 즉 상대에 대한 일말의(어쩌면 상당히 커다란) 애정까지 있는 상태에서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누는 것이다. 맨발의 각본 <무사의 청춘>에서는 주인공이 자기 마을을 폐허로 만든 숙적을 찾아 복수하려 한다. 그런데 이 숙적이 누구인지 주인공은 마지막까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 숙적은 아마 러닝타임 내내 주인공과 친밀한 관계를 쌓은 친구일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정체가 밝혀지고 승부를 앞둔 순간 엄청난 긴박감이 생긴다.
맨발은 영화를 찍기로 했을 때부터 시종일관 각본을 고치면서 <무사의 청춘>을 어떻게 마무리지어야 할지 고민한다. 그도 그럴 게 클라이맥스가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린타로를 만나고 린타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린타로와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면서, 드디어 결말을 어떻게 할지 결정하게 된다. 놀랍게도 주인공과 숙적은 서로를 베지 않기로 하는 것이다! 사실 서로를 그토록 잘 이해하고 애정까지 가지고 있다면 화해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꼭 케케묵은 사무라이 영화의 문법을 답습할 필요는 없다. 우여곡절 끝에 촬영이 끝나고 편집도 끝나고 상영이 시작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클라이맥스를 앞두고 맨발은 갑자기 상영을 중단한다. 강당에 모여 영화를 감상하던 학생들은 영문을 몰라서 웅성거린다. <썸머 필름을 타고!>를 감상하던 관객도 몰입이 확 깨진다. 말 그대로 갑분싸다. 갑자기 이건 내가 생각했던 결말이 아니라면서 중언부언하는 맨발의 멘트를 듣고 있으니 약간 짜증까지 난다. 아 뭐야, 잘 나가다가 왜 이래? 기껏 사람들 고생시켜서(본인도 고생해서) 영화 다 만들어 놓고, 상영까지 해 놓고 이러기 있어? 이건 프로답지 않지. 이건 아니지. 김이 팍 샌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 <썸머 필름을 타고!>가 완벽한 청춘 영화로 거듭나는 것이다.
<무사의 청춘>은 훗날 거장이 되는 맨발 감독의 데뷔작이다. 맨발 감독은 아직 성인이 아닐 때, 고교 마지막 여름방학에 이 영화를 만들었다. 즉 <무사의 청춘>은 맨발이 진짜 사회에 나와서 냉정한 평단의 평가를 받기 전 마지막으로 실수가 용납되는 시기에 만들어낸 작품이라는 말이다. 맨발은 감독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실수할 이 기회를, 이 특권을, 이 면책권을 놓치지 않는다. 그 실수의 이름이 청춘이니까.
다시 사무라이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왜 사무라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두 무사는 사생결단의 승부를 봐야 할까? 이건 한편으로는 명예의 문제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존불가능성의 문제다. 승부는 명예를 건 대결이다. 이긴 자는 명예를 얻고 진 자는 수치심을 얻는다. 패배의 수치심은 살아가는 내내 패자를 괴롭힐 것이다. 그럴 바에야 승부가 끝나고 깔끔하게 죽는 편이 낫다. 꼭 누구 하나는 죽어야 하는 싸움이라고 하면 극단적으로 들리지만, 이런 관점에서는 또 나름 인도적인 것이다. 무사는 분명 불명예를 죽음보다 끔찍하게 여기는 특수한 집단일 테니까.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한다? 말은 좋지만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주인공은 상대방이 내 가족을 죽이고 내 마을을 몰락시켰다는 마음 속의 앙금을 정말 완벽하게 털어낼 수 있을까? 숙적과 화해하면 죄 없이 죽은 가족을 볼 낯이 없지 않을까? 클리셰가 클리셰인 데는 이유가 있다. 괜히 앞서 영화를 만든 선배들이 장르의 문법을 정형화시킨 게 아니다. 그것은 개연적으로 있어야 마땅한, 관객을 납득시키기 위한 강력한 장치다. 사무라이 영화를 사랑하는 맨발이 정말 사무라이 영화의 문법을 무시할 수 있을까? 과거의 감독들로부터 이어받은 정신을 부정할 수 있을까? 당연히 불가능하다.
그래서 결국 <무사의 청춘>도 사생결단의 진검승부로 끝나야 한다. 주인공과 숙적의 공존은 불가능하다. 누구 하나는 사라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과거와 미래의 공존도 불가능하다. 맨발과 린타로는 러닝타임 내내 서로를 돕고 이해하면서 친밀해졌지만, 심지어 서로를 좋아하게 되기까지 했지만, 그들은 한 시공간에 존재해선 안 되는 사람들이다. <썸머 필름을 타고!>에서도 누구 하나는 사라져야 한다. 사라질 인물은 누구일까? 아마 린타로일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본 시간대는 과거 즉 맨발이 사는 시간대였다. 이건 맨발이 친구들과 영화를 만드는 이야기였다. 여기 불쑥 침입한 것은 린타로다. 이방인인 린타로는 이제 이 이야기에서 퇴장해야 한다. 정말 그럴까? 아니. 마지막 승부가 끝나고 사라져야 할 사람은 맨발이다.
과거를 상속받은 미래
스마트폰을 쓰고 넷플릭스를 보는 맨발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관객들과 동시대인이다. 그러나 미래인인 린타로의 관점에서는, 맨발의 그리고 관객의 ‘현재’ 또한 한 편의 시대물이다. 린타로의 특권은 과거를 관망하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가 옳고 누가 잘못했는지,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렸는지. 거대한 시간의 흐름 최전선에서 파도에 휩쓸리듯 정신없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 나의 행동/생각/결정이 차후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알지 못한다. 그저 추측할 뿐이다.
하지만 린타로는 그 행동/생각/결정의 결과를 이미 알고 있다. 달리기를 하면 늘 앞서 나간 사람이 승리한다. 시험을 보면 더 많이 공부한 사람 즉 더 많이 아는 사람이 더 좋은 성적을 받게 된다. 맨발과 린타로가 진검승부를 벌인다면 더 앞선 시간대를 살고 더 많은 지식을 알고 있는 린타로가 승리할 수밖에 없다. 미래는 과거를 항상 압도한다. 항상. 과거에 대한 향수를 다루는 이야기들에 왜 씁쓸한 결말이 많은지, 과거의 영광을 되돌리려는 인물들이 왜 대개 부정적으로 묘사되는지 그 답이 여기 있다. 슬프게도 과거는 미래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과거가 아무리 아름답고 찬란했다 해도, 아무리 위대하고 영광스러웠다 해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린타로는 맨발의 영화(과거)를 너무나 사랑해서 과거로 타임 리프까지 한 특이한 미래인이다. 모든 사건이 끝나고 이제 미래로 복귀해야 하는데, 조건이 있다. 린타로는 미래의 인물이기 때문에 린타로가 출연한 맨발의 데뷔작은 단 한 번의 상영을 끝으로 영영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숨겨진 한 가지 조건이 더 있다. 린타로는 맨발과 진검승부를 해서 승리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린타로는 자신이 너무나 집착하는 과거(맨발의 데뷔작)를 이미 상실된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또한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는 과거(맨발)를 단칼에 베어 버려야 한다. 그래야 원래 있어야 할 장소(미래)로 돌아갈 수 있다. 미래는 과거를 사라지게 함으로써 성립한다.
그런데 물리적인 실체가 사라진 뒤에도 잔존하는 것이 있다. 미래와 이어지려 했던 과거의 모든 의지, 시도, 염원이다. 이것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애매하고 두리뭉실한 것들이다. 그러나 미래의 누군가가 그 의지를 깨달은 순간, 자신들과 이어지고자 했던 과거 사람들의 시도를 알게 되는 순간, 강렬한 염원을 담은 메시지를 상속받는 순간, 또다른 기적이 일어난다. 미래인들이 과거의 가치를 반추하고 중시하고 재생성함으로써 그 가치는 영속성을 얻는다.
먼 훗날 린타로가 사는 미래의 풍경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정말로 실현될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30초 이상의 영화를 소비하지 않고, 너무 바빠서 남의 이야기에 극단적으로 귀 기울이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미래에 만약 린타로 같은 사람이 하나라도 존재한다면, 타임 리프를 할 정도로 남의 이야기를 좋아해서 공감해 주는 사람이 하나라도 존재한다면, 또다시 변화가 생길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소통을 통해 서로를 지탱해 주니까. 끊임없이 서로 이어지기를 갈망하고 또 시도하니까.
사무라이 영화는 굉장히 ‘일본스러운’ 장르다. 서부극이 굉장히 ‘미국스러운’ 장르이듯이. 그래서 사무라이 영화를 통해 아날로그 가치를 역설하고 과거와 미래의 ‘이어짐’을 논하는 <썸머 필름을 타고!>의 구성도, 일본 문화와 정서에 익숙한 관객일수록 더 와닿고 더 납득 가지 않았을까 싶다. 청춘 영화로서는 관객이 기대하는 거의 모든 요소가 포함되어 있고, 생각보다 묵직한 성찰이 담긴 영화라 더 좋았다.
미래에는 영화가 사라진다는 말을 듣고 맨발은 ‘그럼 내가 열심히 만들어 봤자 다 소용없는 거 아니야?’ 이런 생각에 빠져 우울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계속 만들기로 한다. 미래의 누군가는, 적어도 린타로 하나만큼은 자신의 의지를 이어받아 주리라는 믿음을 얻었기 때문에. 그 실낱 같은 하나의 희망을 붙잡고 계속해서 전진한다. 한편 린타로는 맨발을 즉 과거를 좋아한다는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과거가 걸어 오는 승부로부터 이기기 위해 진심으로 대적한다. 그는 과거에 머물기를 희망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이 미래에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아는 사람이니까. 내게는 정말 사랑하고 응원할 수밖에 없는 인물들이었고, 킥보드의 말처럼 최고의 라스트 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