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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희미 Sep 18. 2022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2021) 리뷰


어떤 영화는 문자 그대로 경험된다. 관객인 나는 기본적으로 목격 또는 관음의 주체인데 그 사실을 잊어버리게 하는 영화들이 있다. 스크린 너머 허구의 세계가 순식간에 내가 사는 세계로 편입되어 마치 남의 삶을 내가 살아 본 듯한 착각에 빠져드는 영화, 요아킴 트리에의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가 바로 그런 영화였다. 율리에 역을 맡은 레나테 레인스베는 이 영화로 작년 74회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또한 이 영화는 올해 94회 아카데미 각본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요아킴 트리에가 노르웨이의 아름다운 수도 오슬로를 배경으로 구성한 오슬로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며 동시대인의 삶과 사랑과 불안을 예민하게 또 영리하게 포착한다. 아래 리뷰부터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다.



리뷰에 사용된 모든 스틸컷의 출처 :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52038



최악의 인간


이 영화의 원제는 <The Worst Person in the World>로 직역하면 대략 ‘세상 최악의 인간’쯤 된다. 막연히 궁금해진다. 최악의 인간이란 어떤 인간일까? 대체 무엇이 사람에게 최악이라는 무시무시한 수식어를 붙이도록 만드는 걸까? 이 영화에서 최악의 인간은 누구를 지칭하는 걸까? 등장인물들 모두 결함을 지니고 있어서 관점에 따라 누구나 최악이 될 수 있다. 율리에와 에이빈드는 서로를 처음 만난 파티에서 ‘선을 넘지 않은 외도 행각’을 벌이며 시시덕거린다. 직접적인 성적 접촉은 없지만 누가 봐도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데, 둘 다 연인이 따로 있다. 이들의 작태에 강한 거부감을 느낀 관객이라면 (뻔뻔스럽게도 본인들은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율리에와 에이빈드를 최악의 인간들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한편 라디오 방송에 나가서 자신의 창작물에 내재된 미소지니를 옹호하고 패널을 ‘창녀’로 비유한 악셀에게 정이 떨어진 관객이라면 악셀이야말로 최악의 인간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에이빈드의 전 여자친구 수니바에게도 문제가 있다. 그녀의 이기심과 위선을 최악이라 생각한 관객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율리에에게 지속적으로 상처를 주는 율리에의 아버지는 또 어떤가?


하지만 율리에에게도, 악셀과 에이빈드와 수니바에게도, 심지어 율리에의 아버지에게도 좋은 점이 있다. 율리에는 항상 주체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며 범상치 않은 행동력과 추진력을 지녔다. 악셀은 다정하고 사교적이며 지성미를 갖췄다. 에이빈드는 놀라운 포용력과 배려심을 보여주며 예의바른 사람이다. 수니바는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데 열정적이고 윤리 의식과 책임감을 중시한다. 율리에의 아버지는 비록 첫 번째로 꾸린 가정(율리에의 가정)에서 실패했지만 두 번째 가정에서는 아내와 자식에게 헌신하는 이상적인 아버지처럼 보인다. 율리에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아버지일 수도 있지만, 두 번째 가정의 딸에게는 최고의 아버지일지도 모른다. 결국 최악의 기준은 상대적이라는 말이다.


이 영화의 국내 번역 제목은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인데 아무래도 원제가 영화를 좀더 잘 포괄하는 것 같다. 사랑을 하든 말든 모두가 타인에게 최악이 될 수 있다. 누군가를 세상 최악의 인간이라 판단하기 전에 ‘정말 이 사람을 최악이라고까지 불러야 하는가?’ 반추해 보게 한다는 점에서, 원제는 굉장히 의도적으로 설정된 프레임이다. 최악이라는 단어는 나쁨을 드러내는 최상급(worst) 표현인데 이런 표현을 사람한테 갖다 붙이려면 즉 프레이밍하려면 그에 걸맞는 타당한 이유가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극단적이고 무례한 예시지만, 어떤 사람은 타인의 외모가 자신의 미적 기준에 충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최악이라 평가하기도 한다. 즉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사람을 그냥 생긴 게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최악 취급한다. 이처럼 누군가를 최악이라 정의하는 판단 기준은 사람에 따라 상당히 다양하고 심지어는 기상천외할 수도 있다.


나는 영화에 등장한 어떤 인물도 최악으로까지 보이지는 않았다. 모든 인물들이 지극히 현실적이라서, 개인적으로 별로라 생각되는 인물에게조차도 일말의 공감이 느껴졌다. 누구나 타인에게 최악이 될 수 있다면 이 영화 속의 특정한 인물 하나만을 콕 집어 최악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닐까. 사실 아무도 최악까지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널리고 널린 적당히 나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관점을 조금만 비틀면 그들 모두는 한편으론 또 적당히 좋은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100% 선한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100% 악한 사람도 없다. 누구나 조금씩은 다 모순적이고 이해타산적이다. 이런 인간의 입체성과 모호성은 특정 인물이 이 영화의 제목을 대변하지 못하도록 한다. 프레이밍을 성립불가능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따로 두고 1장부터 12장까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 형태적 완결성은 그 안에 담고 있는 이야기 즉 율리에의 삶을 포괄하려는 시도지만 (또는 가둬 두려는 욕망의 발로지만) 관객은 러닝타임 내내 율리에의 삶 일부를 훔쳐볼 뿐이다. 율리에의 삶은 영화 이후로도 지속된다. 즉 이 영화는 상당히 완결성 있는 형식(프레임)을 갖췄는데도 역설적으로 율리에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삶만을 보여주어(강조하여) 인간의 삶이 결코 고착되거나 범주화되지 않는, 갇히지 않는 역동적 성질을 지니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내던져진 삶, 내던지는 삶


하이데거는 인간이 이 세상에 무방비하게 내던져진 즉 피투(被投, Geworfener)된 존재라고 보았다. 인간은 태어날 시공간을 자의로 선택할 수 없고, 삶의 환경도 선택할 수 없다. 그저 어느 순간 갑작스레 태어나서 주어진 조건에 적응하며 죽기 전까지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앞으로 나의 삶은 어떻게 될까? 무한한 가능성이 존재한다. 결정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이 무한한 가능성은 인간에게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불안에 시달리면서도 인간은 눈앞에 펼쳐진 수많은 가능성들을 향해 뛰어든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내던져졌던 삶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재차 내던진다(기투企投, Entwurf).


이 영화는 로맨스 영화기도 하지만 율리에라는 한 인간의 삶이 어떤 궤적을 그리는지, 율리에가 어떻게 기투하며 미래로 나아가는지 보여주는 성장물이기도 하다. 율리에는 의학을 전공했다가 심리학으로 전향하고, 그마저도 금방 그만둔 뒤 사진을 배우러 간다. “내가 진짜 바라는 게 뭔지 이제 알았어.” 항상 이렇게 말하면서. 언뜻 제멋대로에 줏대 없어 보일 수 있으나, 사실 율리에는 굉장히 스스로에게 충실한 삶을 살고 있다. 인생이라는 공을 여기로도 던져 보고 저기로도 던져 보면서 세간의 시선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채 자신만의 삶을 꾸려 가려 한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길을 걷고자 한다.


그러나 율리에가 당장 받아들이지 않는 가능성들도 있다. 한 남자에게 종속될 가능성. 아내가 될 가능성. 엄마가 될 가능성. 이 가능성들은 율리에의 삶을 율리에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끌어 갈지도 모르기에 무작정 받아들이기 힘들다. 율리에와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연인인 악셀은 하루빨리 가정을 이루고 아이도 갖고 싶어한다. 반면 이제 겨우 서른을 바라보는 율리에는 벌써부터 그런 안정적인 삶에 매달리고 싶지 않다. 결혼한다거나 아이를 갖는 일은 지금 당장 율리에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악셀은 이런 율리에의 심정을 듣고 질문한다. 그렇다면 네가 지금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뭘 하고 싶냐고.


율리에는 이 질문에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그냥 모르겠다고 한다. 또한 악셀과 이런 대화를 나누는 일 자체를 불편해한다. 사실 율리에에게는 악셀의 질문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율리에는 이미 ‘지금 진짜 원하는 것’을 하고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악셀)과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악셀은 관계의 관습적인 ‘다음 단계’를 이행하길 원하고, 율리에에게 또다른 선택을 종용한다. 항상 모든 것을 주체적으로 결정하며 살아온 율리에는 악셀의 삶과 악셀의 욕망에 휘둘리고 싶지 않다.


그러나 악셀과 결혼하지 않았는데도, 아이를 낳지 않았는데도, 율리에는 결국 악셀에게 휘둘리고 만다. 악셀은 성공한 커리어를 지녔고 부유한데다 다정하기까지 한 이상적 연인이지만 율리에는 그와 함께 있으면서 ‘조연’이 된다. 서점에서 임시직으로 일하는 악셀의 어린 연인. 언제나 당연한 듯 악셀의 옆에 함께하는 존재. 율리에는 악셀을 사랑하고 악셀의 옆에 머물기로 선택했지만, 그 선택 때문에 악셀이라는 성공한 주인공의 트로피 내지는 부속물로 기능한다. 모든 주체적 선택이 항상 행복과 즐거움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악셀의 곁에서 자신이 원하는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율리에는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가능성. 초대받지도 않은 파티에 뻔뻔스럽게 섞여들어서 에이빈드를 만난 뒤, 율리에는 그 새로운 가능성에 자신의 삶을 내던지기로 한다.  다시 극도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에 뛰어들기로 한다. 악셀을 떠나기로 선택함으로써.



정체와 변화


율리에가 악셀에게 이별을 고하기 전, 거리의 사람들이 모두 움직임을 멈추고 율리에가 그 멈춘 세상을 홀로 달려 나가 에이빈드를 만나는 환상적인 시퀀스가 나온다. 율리에는 에이빈드와 키스한 뒤 자신의 욕망을 확신한다. 율리에는 에이빈드를 원하고, 에이빈드와 함께하는 새로운 삶을 원한다. 지금까지 올곧은 직선 코스를 달려왔다면 이제 커브를 돌아 옆쪽 샛길로 들어가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악셀은 율리에에게 후회할 거라고 경고한다. 코스를 이탈하려는 율리에를 저지하려 붙잡는다. 이런 사랑은 흔하지 않다고, 다신 없을 거라고. 우리는 정말 이상적인 연인이었다고. 율리에는 악셀의 말을 수긍한다. 악셀이 싫어진 것은 아니다. 악셀이 객관적으로 나쁜 연인이었던 것도 아니다. 그는 지적이고 능력 있고 좋은 사람이다. 그러나 아직 악셀을 (어떤 형태로든)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후회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율리에는 변화를 선택한다.


악셀은 예술가답게 고집이 세고 변화보다 익숙함을 좇는 사람이다. 암에 걸린 후 악셀은 율리에와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이 어린 시절에는 세상의 모습이 어땠는지 이야기한다. 악셀은 아직까지도 그 상실된 시대의 사고방식에 얽매여 있다. (심지어 악셀은 만화를 그릴 때도 종이와 펜을 사용한다!) 만화책 속 미소지니를 아무도 지적하지 않고 그것이 그저 재미를 북돋기 위한 요소, 장르문법적 요소로만 다뤄지던 무렵의 케케묵은 성인지 감수성에 공감한다. 오늘날 젊은 여성 패널들이 그러한 감수성을 이해하지 못하자 답답해한다. 악셀이 너무나 심취하고 좋아해서 업으로까지 삼았던 만화는 그 무렵엔 ‘원래 그런’ 것이었다. 여성을 멸시하거나 비하하는 표현을 해도 그냥 다 허용되는 것이었다. 만화 속 표현들은 진지하게(혹은 ‘예민하게’) 받아들일 문제나 정치적인 토론거리가 아니었다. 그런 사소한 일로 꼬투리를 잡고 작가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며 창작물의 작품성까지 매도하다니 불쾌하기 짝이 없다. 예술은 예술이지 현실이 아니니까. 현실의 잣대, 특히 현실의 윤리적 잣대를 예술에 들이미는 행위는 검열이라는 것이다. 언뜻 그럴듯하게 들리기도 한다. 악셀의 예술관은 맞다 틀리다 평가할 수 없는 사견의 영역이다. 누군가는 수긍할 것이고 누군가는 반발할 것이다. 내 견해를 굳이 한 마디 덧붙이자면 예술가의 머릿속 관념으로 남지 않고 세상에 표현된 모든 예술은 (특히 상업예술은) 언제나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고 시대에 따른 기술적/미학적/사상적 한계를 내포했으며 정치적이었다. 언제나. (‘예술에 정치적으로 접근하지 마십시오’라는 문장은 그 자체로 얼마나 정치적인가?)


악셀의 만화는 할리우드에 판권이 팔려 영화화되는데, 그 과정에서 악셀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요소들을 싹 지워 버린다. 악셀은 할리우드와 영화 관계자들이 자신의 작품을 망쳐 놓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할리우드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장사꾼 집단 중 하나고, 그들은 언제나 ‘지금 이 시대에 무엇이 잘 먹혀드는지’ 고민한다. 어떤 스펙터클, 어떤 내러티브가 동시대 관객들에게 어필하고 지갑을 열게 하는지 그들이 악셀보다 훨씬 잘 알고 있다. 작품성보다 상업성을 극대화하여 각색된 악셀의 만화는 악셀 자신과 결코 상응할 수 없는 새로운 세대의 관객들을 포섭할 것이다. 같은 책도 시대가 지날수록 계속 새로운 번역본으로 재출간되고 고전 명작 영화들도 자꾸만 리메이크되고 극작가들은 몇백 년 전의 희곡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해 끊임없이 무대에 올린다. 왜 그럴까? 콘텐츠의 생명력을 지속시키는 힘은 변화와 쇄신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좋든 싫든 시간은 흐른다. 세상은 변한다. 인간이 그 흐름과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고통받는다. 그리고 죽는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율리에지만 악셀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요아킴 트리에는 아주 공을 들여서 악셀에게 마이크를 쥐어 주고 악셀이 어떤 인물인지 세세히 묘사한다. 카메라가 악셀을 바라보는 온정적 시선과 악셀의 기나긴 자기변호는 ‘스러져 가는 시대’의 대표자인 악셀에게 감독이 느끼는 애정을 짐작케 하지만, 어쨌든 악셀은 외로워하다가 결국엔 죽는다. 죽기 때문에 구질구질했던 추억도 미화되며 관객인 내가 악셀에게 느끼는 연민도 한층 강화된다.


물은 고이면 썩는다. 호수가 악취를 내뿜다 말라 버리면 사람들은 한때 아름다웠던 호수의 모습을 떠올리며 씁쓸함에 잠긴다. 정체의 결말은 소멸이다.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던 무언가가 소멸하면, 누군가가 죽으면, 그 대상과 친밀했던 사람일수록 공허감과 상실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악셀을 잃은 율리에에게도 그 공허감과 상실감이 밀려든다. 그러나 상실은 이내 과거의 유산이 되고 곧 내일을 알리는 태양이 뜬다. 누군가가 사라져도 남은 자의 삶은 계속된다. 율리에는 날이 밝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거두고 웃는다. 악셀은 분명 율리에의 삶에 큰 부분을 차지한 존재였지만, 율리에는 악셀처럼 지나간 추억에 매몰되지 않고 내일을 살아간다. 율리에가 여명을 바라보며 웃을 때 영화를 보는 나도 씁쓸하게 따라 웃었다. 그 복잡하고도 궁극적으로는 후련한 감정이 소름돋게 체감되어서.



종말과 지속


에이빈드와 율리에의 관계는 일탈로부터 시작한다. 율리에에게 에이빈드는 일탈이 가져다 주는 짜릿함의 현신이었다. 율리에는 악셀과 함께 있을 때보다 에이빈드와 함께 있을 때 좀더 자유로워 보이고, 급기야 마약(환각버섯)까지 복용한다. 그러나 약기운이 가시고 황홀한 착란에서 벗어나면 다시 지루하고 일관적인(그래서 다소 끔찍한) 현실이 되돌아온다. 일탈이 끝나면 일상이 반복된다.


악셀과 만나던 무렵 율리에는 도발적인 글(‘미투 시대의 오럴섹스’)을 써서 대중에게 공개하는데 에이빈드와 함께 있을 때는 새로 쓴 픽션을 아무도 찾지 못하게 숨긴다. 우연히 율리에의 폐기된 원고를 발견한 에이빈드는 율리에의 글솜씨가 탁월하다고 평가하고 글 속에 작가의 자아가 강하게 드러나 있다고 생각한다. 그 글은 율리에 자신을 대변한다고. 이처럼 좋은 평을 받았는데도, 율리에는 역정을 내면서 에이빈드를 비난한다. 또 척 보면 픽션인데 그걸 모르냐고 에이빈드가 문학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냐고 비아냥거린다. 바리스타인 에이빈드의 직업을 깎아내리며 자신은 살면서 그보다 더 나은 업적을 달성하고 싶다고 한다. 율리에는 대체 왜 이런 못된 말을 내뱉어서 연인을 크게 상처입혔을까?


글쓰기에 재능이 있는 율리에는 어쩌면 작가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미 그 가능성은 악셀을 만나던 시절 시도해 봤다. 새로 쓴 글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버렸다. 에이빈드와 만나는 율리에는 더 이상 작가를 꿈꾸거나 글쓰기를 적극적으로 욕망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에이빈드가 이미 지나온 과거의 흔적을 찾아내 들쑤시면서 ‘이게 바로 너야’라는 식으로 말하니까 당연히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율리에는 스스로를 어떤 프레임 안에 한정시키지 않으려 한다. 계속해서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고 싶어하고, 규칙과 관습을 위반하고 싶어한다. “나는 이런 것에 관심이 있어, 이런 분야에 흥미가 있어, 이런 것을 하고 싶어, 이런 사람이 되고 싶어”라고 말하지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하지 않는다. 율리에 스스로도 자신을 명확히 정의하지 않는데 에이빈드가 대체 뭐라고 율리에를 멋대로 판단 내린단 말인가? 율리에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너 뭐 돼?’ 하며 어이가 털린 상황이었던 것이다.


결국 율리에와 에이빈드의 관계도 흔들리고 종말에 가까워진다. 율리에와 에이빈드는 아이를 갖지 않기로 합의한 커플이었는데, 피임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율리에는 실수로 임신하고 만다. 율리에는 이 사실을 곧바로 에이빈드에게 알리지 못하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혼자 고민한다. 그러다 악셀의 암 투병 소식을 듣고 악셀을 찾아가서 비밀을 털어놓는다. 율리에가 악셀과 사귀던 시절, 악셀이 원하던 안정성(결혼과 아이 갖기)은 율리에를 방황하게 하고 에이빈드와 아찔한 유사 외도를 벌이도록 만들었다. 같은 과정이 다시 반복된다. 실수로 한 임신 때문에 어쩌면 율리에가 감당해야 할지도 모르는 안정성(아이를 낳고 어머니가 되기)은 율리에의 정신을 뒤흔들고 옛 연인을 찾아가게 만든다. 율리에는 악셀과 대화하면서 “이런 얘기를 할 사람이 요즘은 없다”고 털어놓는다. 과거에 에이빈드가 악셀은 주지 못했던 자유로움을 주었다면, 이제 악셀은 에이빈드가 주지 못하는 통찰과 지적 소통을 제공한다.


만약 악셀과 에이빈드의 장점만을 합친 제 3의 남자가 있다면 어땠을까. 아이를 원하지도 강요하지도 않고 자의식이 너무 강하지 않아 배려심 깊고 지적인 대화까지 가능한 그런 남자가 있다면, 율리에가 그런 사람과 만약 연애를 한다면, 그 관계는 성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율리에의 기준에서 완벽한 짝을 찾기란 얼마나 어려울까. 한편으론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남자에게 또다른 결함이 발견될 수도 있다.


율리에는 뒤늦게 에이빈드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고 사과한다. 자신도 에이빈드도 아이를 원하지 않은 것을 안다고, 자신 때문에 상황이 꼬였다고. 에이빈드는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면서도 율리에를 달랜다. 에이빈드는 수니바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던 것처럼 아마 아이를 낳는 문제에 있어서도 율리에의 의견을 존중해 주려 했을 것이다. 율리에가 낳겠다고 하면 그렇게 하라고 말했을 것이고, 지우고 싶다고 해도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하지만 율리에는 에이빈드에게 자신의 결정을 말해 주기 전에 유산한다.


유산은 사실 우연이 아니라 율리에의 선택이다. 율리에의 몸은 아이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율리에는 의사로서 해부학을 공부할 때 ‘나는 이런 신체적인 것보다는 정신에 관심이 있어’라며 정신과로 전향하는데 사실 신체와 정신은 엄밀하게 구분된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된 것이다. 아이를 낳거나 낳지 않거나, 율리에의 몸은 두 가지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자체적으로 소거해 버린다. 이 소거는 율리에의 가장 내밀한 무의식을 반영한다. 악셀을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율리에는 여전히 안정성을 추구하고 싶지 않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에 결혼해서 아이를 가지고 가정을 꾸렸던 조상들과는 다른 길을 걷고 싶다.


이후 율리에는 에이빈드를 떠나고 또다시 자신의 욕망을 충실히 따르며 삶을 개척한다. 악셀을 처음 만났을 무렵 율리에는 전문적으로 사진을 배우는 과정에 있었다. 이제 그때의 배움을 되살려 진짜 사진작가로 거듭난다. 악셀을 만나기 전, ‘조연’이 되기 전의 자아를 찾아내 그때 가던 길을 이어 걷는다. 이것은 글을 쓰는 것처럼 과거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중단되었던 여정을 지속하는 것이다.


사진작가로 일하던 도중 율리에는 우연히 창 밖을 내다보다 거리를 지나가는 에이빈드를 발견한다. 그는 다른 여성과 결혼한 것처럼 보이며, 유모차를 이끌고 있다. 율리에는 그 모습을 보고 기막히다는 듯 웃는다. 율리에가 성장한 것처럼 에이빈드도 성장한다. 수니바와 사귀던 시절 에이빈드는 수니바에게 이끌려 다니면서 그녀의 라이프스타일을 전적으로 따르려 했고, 율리에와 사귈 때는 율리에가 바라는 대로 아이를 갖지 않기로 했다. (사실 이것도 수니바의 영향이 크다. 수니바는 환경 문제에 민감했고, 아이를 낳는 건 지구에 좋지 않은 행위니까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에이빈드도 그 생각을 주입받았다) 그러나 에이빈드가 진짜 원하는 건 뭐였을까? 에이빈드는 연인을 만나면서 그들에게 맞춰 주고 배려해 줬을 뿐 자신의 욕망을 진지하게 성찰할 여유가 없었다. 결말부에서 율리에가 창 너머로 봤던 에이빈드, 자식을 낳고 아버지가 된 에이빈드는 비로소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고 긍정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붙잡은 것처럼 보인다. 그도 율리에처럼 동시대를 살아가는 세대니까. 악셀이 고이고 썩어 가다 말라 버린 호수였다면 에이빈드는 흐르는 강이다. 그래서 에이빈드와의 이별은 악셀과의 이별만큼 아프거나 애틋하거나 구질구질하지 않다. 어쨌든 그는 살아 있고, 살아갈 테니까.






뉴욕타임즈 비평가 A.O. 스콧은 율리에가 “어느 정도 중년 남성의 관념 속 젊은 여성으로 남아 있다”(but to some extent, Julie remains a middle-aged man’s idea of a younger woman)고 지적한다. 이 구절이 주요한 주제는 아니지만 영화에 대한 총체적 시선을 제공하는 리뷰이므로 읽어 보고 싶다면 아래 링크를 참조하라. 인상적이었던 마지막 문단을 인용해 두겠다:


https://www.nytimes.com/2022/02/03/movies/the-worst-person-in-the-world-review.html


Who does the movie think she is? That’s a different question than the one I started with, but it’s an interesting one in its own right, and one Trier is honest enough to leave open. If “The Worst Person in the World” is about Julie’s indecision, it’s also about Trier’s ambivalence. Some of the suspense in the film comes from wondering what he will do with her, and whether, as much as he loves her, he can figure out how to set her free.


나는 지금 내가 쓰는 이 리뷰를 너무 오래 붙들고 있어서 이제 그만 놓아주고 싶지만, 영화를 정말 감명 깊게 봤기에 여전히 할 말이 남아 있다. 오슬로라는 도시 그 자체가 주는 역동성, 영화가 담고 있는 수많은 동시대의 쟁점들과 그 쟁점들 속에서 나와 타인이 어떻게 관계 맺는지에 대한 단상, 로맨틱한 관계를 주고받으며 연인들 간에 생겨나는 미묘한 감정의 흔적들…… 말하고 싶은 것이 끝도 없이 많은 영화다. 그러나 나는 ‘성장’이라는 키워드에 초점을 맞추고 이 리뷰를 썼다. 연대기와도 같은 영화의 완결적 구성 속에서 주인공 율리에가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이룩한 내면적 성숙이 내게 가장 와닿고 공감되는 요소였다. 보통 불안정에서 안정으로의 이행을 성장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성장은 율리에의 행보처럼 안정에서 불안정으로의 이행에 더 가깝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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