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9. 10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벨기에 출신 연출가 이보 반 호프(Ivo van Hove)는 세계 연극계의 주목을 한몸에 받고 있는 스타다. 2001년부터 암스테르담 국제극장(ITA, Internationaal Theater Amsterdam)의 예술감독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는 2017년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 <파운틴헤드>나 NT Live 공연들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그의 화려한 약력은 ITA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하다: https://tga.nl/en/employees/ivo-van-hove
나는 <파운틴헤드>도 못 봤고, 2018년에 국립극장 시즌 레퍼토리로 <강박관념>과 <헤다 가블러>를 연달아 상영해 줬을 때도 놓쳤다. 2019년 <로마 비극>도 보고 싶었는데 6시간 가량 되는 러닝타임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망설이다가 결국 못 봤다. (뒤늦게 땅을 치고 후회했다….) 석사과정 시작하면서부터는 책 읽기도 바쁘다는 핑계로 문화생활을 등한시하며 게으르게 살았다. 그래서 이번 <타르튀프>는 내가 처음으로 접한 이보 반 호프의 공연이다. 스타 연출가의 명성에 이끌렸다기보단 그냥 <타르튀프>를 한다길래 추석에 시간을 내서 보러 갔다. <타르튀프>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고전주의 극작가이자 희극의 대가 몰리에르의 수작이다. 또 올해는 몰리에르 탄생 400주년이 되는 해다. 몰리에르의 바이오그래피와 위상을 자세히 알아보고 싶다면 아래 링크들을 참조하라.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Moliere-French-dramatist
https://webzine.ntok.go.kr/Article/Tradition/Details?articleId=197869
<타르튀프>를 포함해 <인간 혐오자>, <수전노>, <돈 후안>등 그의 대표작들은 인간성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보여주며 가식과 위선, 허위의식으로 가득 찬 사회를 풍자 및 고발한다. 각자 성격 한 가닥씩 하는 개성적인 인물들이 극의 희극적 요소를 극대화시킨다는 점에서 언급한 작품들은 ‘성격 희극’이라 분류되기도 한다. 또라이들이 나와서 또라이 짓을 하고 관객은 그 꼴을 보며 낄낄대는 연극이란 말이다. 몰리에르는 관객에게 웃음을 주면서도 동시에 사회 부조리를 생각하도록,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도록 유도한다.
국내 관객들에게도 익숙한 NT Live는 영국 런던에 있는 로열 내셔널 시어터(Royal National Theatre)에서 시행 중인 공연 실황 상영 프로그램이다. NT Live에 관한 더 많은 설명은: https://www.nationaltheatre.org.uk/about-the-national-theatre/press/nt-live-faqs
우리 국립극장은 2021-2022 레퍼토리 시즌부터 NTOK Live+(엔톡 라이브 플러스)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세계 유수 극장들의 공연 실황 상영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자세히 알고 싶다면 보도자료를 참조하라: https://m.ntok.go.kr/Community/PressRelease/Details?ArticleId=196282
이번에 내가 본 <타르튀프>는 코미디 프랑세즈(Comédie-Française)에서 이루어진 공연이다. (코미디 프랑세즈는 설립 이래 역사가 300년이 넘는 프랑스의 유일한 국립극장으로 파리의 팔레 루아얄 바로 근처에 있다. 루이 14세가 창립했고, 몰리에르의 집이라는 애칭도 있다) 영화사 레 씨네마 고몽 파테(Les Cinémas Gaumont Pathé)그룹의 자회사이자 공연 제작/배급사인 파테 라이브(Pathé Live)가 제공하며, 장충동에 있는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상영했다.
4년 가까이 리모델링 공사를 마치고 작년 재개관한 해오름극장. 정말 오랜만에 방문했다. 더프리뷰 기사(http://www.thepreview.co.kr/news/articleView.html?idxno=4625)를 보니 이래저래 많이 달라진 모양이다. 객석 수는 줄이고 경사도는 높였다니 관객 입장에서는 환영할 일이다. 리모델링 후 좌석이 어떨지 몰라 자리 선택에 많은 고민이 있었다. 나는 원체 영화든 공연이든 최대한 앞자리에서 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인데(아이맥스도 무조건 앞자리에서 본다) 2016년인가 리모델링 전 해오름극장에서 NT Live <코리올라누스>를 봤을 때 스크린 올려다보느라 목이 너무 아팠다. 그래서 이번엔 적당히 9열을 예매했다. 스크린이 전체적으로 눈에 잘 들어와 좋았는데 개인적으로는 한 6~7열 정도가 더 좋았을 것 같다.
<타르튀프>를 보고 나와서 ITA LIVE <입센의 집>도 보고 싶어져 예매창에 들어갔지만 매진이었다. 나중에 다시 상영해 주면 좋겠다.
리뷰에 사용된 모든 스틸컷의 출처:
https://www.comedie-francaise.fr/en/events/le-tartuffe-ou-lhypocrite#
공연 시작 전 비평가들이 작품에 관한 해설도 제공하고 연출 및 배우들의 인터뷰도 담은 짤막한 소개 영상이 나왔다. 인상적인 대목이 많았는데 보고 온 지 3주가 지나 거의 다 잊어버렸다. 이래서 감상을 바로바로 메모해 놔야 한다. 기억나는 부분만 짚어 보자면: <타르튀프>는 초연 이후 곧바로 상연을 금지당했다. 루이 14세는 몰리에르도 좋아했고 이 작품도 좋아했지만 왕권신수설을 신봉한 전제군주가(잘 알려져 있다시피 ‘태양왕’ 루이 14세는 절대왕정의 상징이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종교를 비판·조롱하며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작품을 대놓고 옹호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신을 모시는 교회의 권위는 곧 신에게서 권력을 부여받은 왕의 권위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결국 루이 14세는 몰리에르로부터 등을 돌리고, <타르튀프>는 몇 년 후에야 겨우 다시 상연이 허가된다. 몰리에르는 처음에 <타르튀프>를 3막으로 구성했지만 재상연할 때는 5막으로 개작했다. 이보 반 호프는 원안이었던 3막 구성을 채택하여 이번 공연을 연출하기로 한다. 원안이 더 현대적이고 세련된데다 결말을 통해 관객에게 상상할 여지도 더 많이 남긴다는 것이다. 국립극장에서 보도자료로 제공한 이번 공연 소개는 다음과 같다.
<타르튀프>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프랑스 국립극단 코메디 프랑세즈가 제작하고 세계적인 연출가 이보 반 호프의 연출해 큰 주목을 받은 화제작이다. 몰리에르 탄생 400주년을 기념해 2022년 1월 프랑스 리슐리외 극장에서 처음 선보였다. 이보 반 호프는 1664년 초연 후 교회와 성직자들의 거센 공격으로 상연이 금지됐던 『타르튀프』의 원작에 주목해 역사가 조르주 포레스티에가 복원한 자료로 대본을 재구성했다. 1669년 5막으로 수정된『타르튀프』가 아닌, 3막 구성의 원작을 다룬 점이 흥미롭다. 작품은 독실한 척하는 위선자 타르튀프가 신앙에 깊이 빠져있는 부르주아 오르공을 현혹해 가정을 파탄 내는 이야기로 당시 종교인들의 부패와 타락을 신랄하게 비판한 작품이다. 등장인물의 미래를 상상해 새로운 결말을 추가한 이보 반 호프는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메시지도 던진다.
(https://m.ntok.go.kr/Community/PressRelease/Details?articleId=198824)
17세기 파리. 한 집안의 가장 오르공은 어느 날 길거리에 쓰러진 부랑자 타르튀프를 발견하고 그를 자기 집에 거둬들인다. 극이 시작되자마자 오르공의 가족들은 타르튀프의 지저분한 옷을 벗기고 그를 구석구석 씻겨 준다. 대사는 전혀 없다. (문자 그대로) 완전히 벌거벗겨진 타르튀프는 순종적으로 가족들에게 몸을 맡긴다. 그리고 자신에게 손길을 보내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조용히 돌아본다. 처음에 그는 다소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곧 어떤 ‘이해’가 뒤따르고, 마침내 멀쑥한 옷을 갖춰 입었을 때쯤에는 표정을 읽을 수 없다. 타르튀프가 무대에서 벗어나자 자막이 떠오르면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 Qui était cet homme? >>
“이 남자는 누구였을까?”
<타르튀프>의 원제는 <Le Tartuffe ou Hypocrite> 즉 ‘타르튀프 또는 위선자’이며 오늘날 프랑스에서 타르튀프라는 이름은 위선자를 지칭하는 보통명사로 쓰인다고 한다. 초반부에 무대 위에서 낱낱이 드러난 배우의 나체는 본래의 타르튀프, 때묻고 연약하며 필멸하는 한낱 인간으로서의 타르튀프를 표상한다. 반대로 목욕이 끝난 뒤 입는 고급스럽고 금욕적인 정장은 배우의 몸을 가리는 동시에 타르튀프가 지닌 인간으로서의 속성들도 숨긴다. 옷은 위선의 껍질이며, 착복과 동시에 타르튀프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그는 독실하고 현명한 성인聖人이자 순수의 결정체로 포장된다. 하녀 도린을 포함한 집안 식구들은 모두 타르튀프가 가식적인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만 오르공과 그의 어머니 페르넬 부인은 타르튀프에게 완전히 빠져들어서 그를 맹목적으로 숭배한다.
타르튀프 때문에 집안 분위기는 살벌하다. 집안의 큰어른 페르넬 부인은 시작부터 가족 구성원들을 매섭게 꾸짖으며 경거망동하지 말고 타르튀프를 본받으라고 충고한다. 오르공의 아들 다미스는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타르튀프가 결혼을 반대해서 아버지의 허락을 받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한다. 오르공의 처남이자 이성적인 지식인 클레앙트는 허와 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오르공을 답답해하며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기나긴 일장연설을 늘어놓는다.
클레앙트 : (…) 아니, 매제는 위선적인 것과 독실한 걸
정말 구별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 두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 같은 표현을 쓰고
가면에나 얼굴에나 똑같이 경의를 표하는군요.
가식과 진솔함을 똑같이 취급하고
진실과 허상을 혼동하며
유령을 사람처럼 대하고
가짜 돈을 진짜 돈과 같다고 하는 건가요?
사람들은 대부분 참 알 수가 없어요!
상식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사람들은 참 드물지요.
사람들한테는 이성의 세계가 너무 좁은 거예요.
사람들 대부분이 지켜야 할 선을 넘어 버린다니까요.
그래서 종종 정말 고귀한 것들도 망쳐 버리곤 하지요.
『몰리에르 3부작』中 「위선자 타르튀프」, 김익진 역, 아카넷, p.32
하지만 오르공은 아무리 클레앙트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열변해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타르튀프를 옹호한다. 오르공이 지금까지 쌓아 온 인망이나 지식·가족애·건실한 신앙 등(‘정말 고귀한 것들’)은 타르튀프라는 매력적인 우상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타르튀프는 오르공에게 항상 그가 원하는/기대하는 모습만 보여주면서 신뢰를 얻고 유대를 다진다. 타르튀프와 오르공 사이에는 ‘둘만의 세계’가 형성되어 있다. 실제로는 오르공이 집주인이고 타르튀프는 오르공에게 은혜를 입어 얹혀 사는 객식구에 불과하지만, 그들만의 세계에서 타르튀프는 범접할 수 없는 성인이며 오르공은 타르튀프의 충실한 종교적 신하다. 이 전복된 주종관계는 도착적인 환상(페티쉬)으로 기능해 둘 모두의 현실도피적 욕망을 만족시킨다. 가진 것 없는 부랑자였던 타르튀프는 사기 행각을 벌이는 동안 귀빈처럼 대접받으며, 집안 대소사를 결정 및 책임지는 주체(가장)였던 오르공은 어깨 위의 무거운 짐을 타르튀프에게 넘겨준다. 타르튀프로부터 ‘계시’를 받고 그의 의견만 수동적으로 따르는 일종의 신관이 됨으로써 스스로의 가내 지위를 결정권자에서 대리자로 격하시킨다.
오르공은 신관이 적성에 잘 맞는지 타르튀프가 계속 자신의 우상 역할을 해 주길 바란다. 숭배의 대상이 되어 주길 바란다. 자신을 대신해서 결정을 내려 주길 바란다. 타르튀프에게 기만당하기를 바란다. 타르튀프에게 집착하면서 타르튀프가 자신을 떠나지 않기를 바란다. 클레앙트가 아무리 합리적이고 맞는 말을 해도 중상모략으로 치부한다. 맹목에 사로잡힌 오르공에게는 타르튀프만이 자신을 이끌어 줄 빛과 소금이며 타르튀프의 말만이 진실이고 의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르튀프에게 자아를 의탁한 오르공은 더 이상 스스로 생각하지도 판단하지도 않는다. 그저 앵무새처럼 타르튀프를 찬양하고 타르튀프의 결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뿐이다. 자신과 주변인들의 사정 따위는 고려하지 않으며 그저 타르튀프에게 도움이 될 방법만을 강구한다. 전 재산을 타르튀프에게 넘기려 하고 혈육인 아들까지 집안에서 내치려 한다. 오르공의 일그러진 신앙, 타르튀프에 대한 도착적 집착은 인륜을 저버리고 자신과 가족을 파멸로 몰아넣는다. 코믹하게 연출되긴 했지만 정말 광기 그 자체다.
이번 공연에서 나는 타르튀프보다 오르공에게 더 눈길이 갔다. 배우가 코비드19 밀접접촉자라 마스크를 쓰고 연기했는데도 섬세한 연기력이 마스크를 뚫고 나왔다. 코앞에서 소리치는 클레앙트를 바라볼 때는 눈에 영혼이 없다가 타르튀프를 보니까 갑자기 눈동자에 광채가 돌고 목소리에는 생기가 흐르고 타르튀프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일희일비하는 모습이 엄청나게 소름끼쳤다. 광신도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타르튀프와 오르공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를 지탱한다. 위선과 기만은 광신을 등에 업고 성장하며, 맹목과 확증편향은 언제나 그릇된 우상을 만들어 낸다.
오르공은 아내 엘미르의 묘책을 통해 타르튀프가 자신의 아내를 탐하는 모습을 직접 목도하게 된다. 진정한 광신도라면 이런 꼴을 보고도 타르튀프님은 다 생각이 있으셔서 그런 거라고 두둔했겠지만 다행히 오르공은 분별력을 되찾는다. 한편 이야기를 전해 듣기만 한 오르공의 어머니 페르넬 부인은 끝까지 진실을 부인한다. 진실을 마주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부정할 용기, 상처받을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페르넬 부인뿐만 아니라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는 대신 외면하기를 선택한다. 생각하고 판단하는 대신 순종하기를 선택한다. 갇혀 있던 알을 깨고 나가는 대신 알 속에서 행복하게 질식해 죽기로 선택한다. 사이비 종교 다큐멘터리를 보면 교주의 사기 행각이 발각되었을 때 종교를 탈출하는 사람이 있고 본 것을 못 본 체하며/들은 것을 못 들은 체하며 남는 사람이 있다. 후자와 같은, 페르넬 부인과 같은 사람들이 집안(세계)에 존재하는 한 타르튀프(사기꾼)는 결코 완벽히 축출되지 않는다. 끈질기게 살아남아 끝까지 위선의 탈을 쓰고 타인을 기만한다. 물론 어떤 경우에든 사람을 등처먹고 이용하는 부류가 가장 나쁘지만, 몰리에르는 <타르튀프>를 통해 광신 또한 만만치 않은 사회악임을 역설한다.
가장이 이성과 상식을 회복한 오르공의 집에서 더 이상 광신도 페르넬 부인은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타르튀프의 몰락과 함께 그녀의 장례가 이루어진다. 극중 내내 집안의 바닥(토대)을 장식하던 흰 종이는 페르넬 부인의 실루엣대로 잘려 나간다. 극 초반부터 압제자처럼 굴던 집안의 큰어른(기득권)이 퇴장했을 때, 썩은 토대가 잘려 나갔을 때, 비로소 집안의 숨통이 트이고 변화의 움직임이 찾아온다.
상연금지 처분을 받은 후 개작된 <타르튀프>는 매우 도식적인 결말을 취한다. 이번 공연에서 오르공은 다행히(?) 재산을 타르튀프에게 넘기고 아들을 쫓아내기 직전에, 즉 ‘선을 넘기 전에’ 진실을 알아차린다. 개작된 버전의 결말부인 5막 시점에서 오르공의 재산은 이미 법적으로 타르튀프에게 넘어간다. 타르튀프는 자신이 집의 정당한 주인이라고 주장하며 오르공 일가를 내쫓으려 하고, 집달관 루아얄이 타르튀프의 명을 받아 재산을 가로채러 온다. 설상가상으로 타르튀프는 오르공을 국왕에게 고발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오르공이 수세에 몰린 바로 그 순간, 왕실에서 보낸 집행관이 나타난다. 집행관은 국왕이 너무나 이성적이고 분별력 있는 사람이라 거짓을 경멸하므로 타르튀프의 간악함을 꿰뚫어봤다고 말한다. 또한 국왕은 늘 오르공과 같은 신의 있는 사람들의 충정에 보상하고 선행을 널리 퍼뜨리려 노력하는 성군이라고도 한다. 집행관은 타르튀프를 체포하러 왔고, 오르공과 가족들은 국왕을 찬양하며, 타르튀프가 감옥으로 잡혀가면서 이야기가 끝난다. 작위적인 권선징악 전개야 그렇다 치고 이억만 리 떨어진 불란서 희곡에서 익숙한 사미인곡의 냄새가 나길래 너무 웃겼다….
상연금지 이후 인생의 쓴맛을 제법 봤는지 몰리에르는 5막에서 클레앙트의 입을 빌어 종교에 대한 면책권도 부여한다. 클레앙트는 자신이 속은 것을 알고 낙담·분개하는 오르공을 달래며 “비록 사기꾼도 있지만 세상에는 그 같은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신자도 있다”고 말한다. 작가가 자존심을 한풀 꺾은 이 5막을 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이보 반 호프가 말한 대로 원안 3막 버전이 몰리에르의 의도를 훨씬 잘 담아낸 것 같다.
이보 반 호프가 추가한 이번 공연의 결말은 풍자에 풍자를 한 겹 더한 블랙코미디라고 생각했다. 이보 반 호프는 타르튀프가 스스로 선언한 것처럼 끝내 되돌아왔다는 중요한 사실만 직접적으로 제시하며, 나머지는 관객이 상상할 몫으로 남겨 둔다. 타르튀프는 ‘결국 승리한’ 사람처럼 보인다. 오르공은 부랑자가 되었고 엘미르는 타르튀프의 아이를 가진 듯하다. 이런 프로이트적 해석을 그닥 좋아하지 않지만 다미스가 입고 나온 여성복은 거세당한 남성성을 연상시켰다. 엘미르는 붉은색 슬립드레스, 다미스는 푸른색 드레스 차림이라 강렬한 대비가 느껴진다. 엘미르와 다미스 사이에 부모자식간의 연이 끊겼고 다미스가 결국 집안의 후계자 위치에서 박탈당했다는 사실을 의복으로 표현하지 않았나 싶다. 재미있었던 것은 확성기를 든 클레앙트였다. 클레앙트는 바른 말만 하는 지식인인데, 타르튀프가 되돌아온 집안(위선과 가식에 잠식당한 세계)에서 그의 올바른 목소리는 더 이상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클레앙트는 확성기의 힘을 빌려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야 관심 한 톨이라도 끌어모을 수 있는 혁명자/시위자처럼 묘사되어 있다.
어쩌면 결말에 나타난 가족은 오르공 일가가 아니라 또다른 어떤 가족일지도 모른다. 관객들은 어리석은 오르공을 실컷 비웃었지만 사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지 않으면, 끊임없이 사유하고 판단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오르공처럼 될 수 있다. 스스로 생각하기 버겁고 현실이 힘들다는 이유로 허상의 세계관에 빠져들어 모든 가치 판단을 초월자에게 떠맡기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더 치밀하고 더 악독한 타르튀프들이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기생할 가족을 찾아내 집안을 장악할 것이다. 씁쓸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대체로 소리 높여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외면받고 무고한 사람은 몰락하며 위선자만이 모든 욕망을 충족시킨 채 잘 살아간다.
공연 끝나고 해오름극장 나와서 셔틀버스 타러 가는 길. 추석 당일 날씨가 너무 좋았고 하늘도 환상적으로 예뻤다. 오랜만에 방문해서 좋았는데 또 언제 갈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