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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희미 Nov 19. 2022

연극 세인트 조앤(2022) 리뷰

2022. 10. 16. 명동예술극장



지난번에 <앨리스 인 베드>를 관람한 뒤, 명동예술극장에 올라올 차기작이 김광보 연출작 <세인트 조앤>이라길래 바로 예매했다. 내가 따로 설명 안 해도 이미 연극계에서 이름난 중견인 김광보 연출은 재작년부터 국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직을 맡고 있으며, 이번 <세인트 조앤>은 3년만의 연출 복귀작이다. 공연은 지난 달에 봤는데 도저히 여유가 안 나 이제야 겨우 리뷰를 쓴다. 9월 20일에 이 공연에 대한 기자간담회가 열렸고 아래 링크의 기사들을 통해 제작진의 질의응답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경향신문 기사 https://m.khan.co.kr/culture/performance/article/202209201437011#c2b
연합뉴스 기사 https://www.yna.co.kr/view/AKR20220920112100005
조선일보 기사 https://www.chosun.com/culture-life/culture_general/2022/09/15/TXZVI5RD4NC7THDT6QB6PUFKCM/
한국일보 기사 https://m.hankookilbo.com/News/Read/A2022092617210004414


<세인트 조앤>은 조지 버나드 쇼의 희곡 『성 조앤』을 각색한 으로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의 영웅이었던 잔 다르크의 생애를 다룬다. 익히 알려져 있듯 잔 다르크는 마녀로 몰려 화형당했다. 쇼는 『성 조앤』에서 그녀가 당대에 얼마나 문제적 인간이었는지, 왜 죽어야 했는지, 사후에 그녀에 대한 재평가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예리하게 관철한다. 특유의 신랄한 필치가 군데군데 돋보이지만 김광보 연출 말대로 쇼는 “이 작품에서는 재기 발랄한 풍자보다 직설법을 사용한다.”(조선일보 기사 인용)


김광보 연출은 “이 작품이 가진 동시대성, 즉 인간의 신념이 어떻게 좌절되는지를 그린 것에 매력을 느꼈기에 무대에 올리기로 했다(연합뉴스 기사 인용)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풀면 “개인의 신념이 사회 구조나 타인에 의해 배제되고 짓밟히며 가치가 전도되는 상황”그때나 지금이나 지속적으로 인간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경향신문 기사 인용)이라는 것이다. 약 한 세기 전(1923년)에 발표된 『성 조앤』은 오래된 텍스트임에도 불구하고 놀랍도록 진보적인 통찰을 담고 있으며 작품 내 문제의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내가 쇼의 작품들을 재미있게 읽기도 했고 『성 조앤』이 흥미로운 희곡인 것도 분명하지만(이 작품은 그가 노벨상을 받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공연을 보러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가장 큰 동기는 김광보 연출이었다. 사실 그가 연출한 공연을 썩 많이 보지는 못했다. 2012년 <M.버터플라이>,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와 2014년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 2015년 <M. 버터플라이>, <살짝 넘어갔다가 얻어맞았다> 이 정도가 전부인 것 같다. 하지만 봤던 공연들이 대단히 인상적이었고 오랜만에 연출가로 복귀한다기에 망설임 없이 <세인트 조앤>을 예매했다. 이번 공연 프로그램북에 실린 연출가와의 인터뷰에서 인상적이었던 구절들을 아래 인용한다. 김광보 연출이 어떤 방식으로 연극을 구축하는지, 연출가로서의 성향이 어떤지 잘 알 수 있다.



Q. 연출님께서는 작품을 할 때 연출적으로 어떤 지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나요?

A. 저와 비슷한 세대의 연출들은 기본적인 것에 아주 충실한 연출가들이라고 생각해요. 텍스트 분석, 인물들 간의 관계성, 서브 텍스트 같은 원론적인 것들에 여전히 집중하고 있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한때는 서브 텍스트 분석의 귀재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어요. 하하.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대본 안에 인물 행동의 인과관계가 다 있으니까요. [...] 저는 리얼리즘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제 세대의 대부분이 그랬죠.

프로그램북 연출가 인터뷰 p.3


Q. 젊은 세대 연출가들의 작업을 보시면서 체감하시는 연출 방법론의 변화가 있을까요?

A. [...] 저는 일루전이 필요한 사람이에요. 우리 세대에게 이건 연출가에게 주어진 당연한 의무 같은 거였습니다. 일루전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연극을 왜 하냐는 소리를 들었어요. 지금은 세상이 바뀌었죠. [...] 앞으로도 주제와 이슈가 부각되면서도 연극을 통해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이 될 수 있을지를 계속해서 고민해보려고 합니다.

프로그램북 연출가 인터뷰 p.4



이처럼 텍스트 분석에 충실하고, 리얼리즘을 의식하고, 배우와 인물 간의 관계를 중시하며, 연극의 본질을 일루전(환상) 구축이라 보는 연출가의 정석적인(바꿔 말하면 다소 고전적인) 성향은 극을 보는 관객에게 편안함과 안정감을 준다. 창작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늘 더 새롭고 더 실험적이고 더 전복적인 그 무언가를 내보이기 위해 노력하지만, 기본에 충실하는 편이 나을 때도 있다. 겉멋 없이 내실을 정직하게 잘 다지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며 어떤 업계에서든 일을 정석으로 잘하는 사람은 귀한 인재다. 아래 기사에는 국립극단 예술감독으로서 김광보 연출의 행보와 연극에 대한 태도가 잘 나타나 있으니 관심이 있으면 참고하라.


https://www.ajunews.com/view/20210118182630754


정석을 추구하는 김광보는 연출가로서의 조지 버나드 쇼와도 닮은 구석이 있다. 쇼는 『성 조앤』의 기나긴 서문 중 ‘작품의 개선을 위한 선의의 제안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내 극작품에 대한 관대하고 열렬한 칭송을 하면서 어떻게 작품이 개선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심에서 우러난 지시를 해 준 몇몇 분들께 감사를 드려야 하겠다. 그들은 에필로그와 더불어 교회, 봉건 구조, 종교 재판, 이단에 대한 이론 등등 같은 인상적이지 않고 지루한 것들을 잘라 내야 한다면서 경험 많은 연출가라면 누구나 그런 장면들을 삭제해 연극 시간을 두드러지게 줄이게 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나는 이분들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경험 많은 삭제의 대가라면 극작품의 내장을 비워서 줄이게 된 한 시간 반의 시간 때문에 즉시 현란한 장면들을 만들고, 로아르 강에 진짜 물을 넣고 그것을 가로지르는 진짜 다리를 설치하고, 그곳을 차지하기 위해 분명히 가짜인 싸움을 연출하고, 진짜 말을 타고 있는 조앤이 이끄는 승리한 프랑스 사람들을 배치하기 위해 두 시간을 낭비하게 될 것이다. [...] 조앤은 무대 위에서 불에 탔을 것이다. 한 여성이 불에 타기만 하면 적어도 왜 그 여성이 그렇게 되었는지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사람들은 불에 타는 장면을 보기 위해서 돈을 지불한다는 원칙 때문이다.  

『성 조앤』, 조지 버나드 쇼, 임성균 역, 지만지드라마 큰글씨책, pp.111-112


또한 쇼는 ‘비평가들께, 그분들이 무시당했다고 여기지 않길 바라며’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극장에 입장하기 위해 돈을 지불한 사람들이 고전적인 희극이나 비극을 그 자체로 좋아하고, 작품이 좋을 때는 그것을 너무도 좋아하여 연극이 끝나면 싫지만 어쩔 수 없이 극장을 나와서 자신들을 집으로 데려다줄 아주 늦은 기차나 버스를 타러 가는 사람들을 위해 고전적인 방식으로 글을 쓴다.

ibid, pp.115-116


김광보 연출의 <세인트 조앤>은 희곡의 본래 의도된 러닝타임(약 3시간 30분)보다 한 시간 가량 축소된 각색 버전이지만 원전에 없는 스펙터클한 장면을 새로 삽입한다든가 상대적으로 “인상적이지 않고 지루한 부분을 대폭 삭제하는 등의 파격적인 변화는 없었다. 쇼가 말한 극작품의 내장은 무대 위에서 생생히 살아 있었고, 보는 입장에서는 희곡에 상당히 충실하다고 느꼈다. 물론 아무리 추려냈다 해도 숏폼처럼 짧은 호흡의 콘텐츠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 인터미션 포함 180분은 다소 부담이 가는 러닝타임일 수 있다. 특히 1막에 다이내믹한 요소가 거의 없어서 2막까지 버티지 못하는 관객도 제법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이 극의 진가는 2막과 에필로그에 집중되어 있다.


한편 이번 공연에서 잔 다르크 즉 조앤은 백은혜 배우가, 샤를 7세는 이승주 배우가 맡았다. 백은혜 배우를 이 공연에서 처음 봤는데 2막의 강렬하면서도 섬세한 연기가 무척 인상적이었고 이승주 배우는 오랜만에 무대에서 만나 반가웠다. 볼 때마다 비중에 관계없이 존재감이 확실해서 눈에 띄는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역사적 실존 인물을 연기하게 된 두 배우는 사료에 의존하는 대신 버나드 쇼가 풀어낸 조앤과 샤를 7세에 집중하고 있다. 백은혜는 “영웅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 잔 다르크가 가진 힘과 믿음에 주안점을 두고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5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서는 이승주는 “역사적 사실에 너무 접근하면 오히려 갇히는 부분이 생겨 버나드 쇼가 그린 샤를 7세를 선명하게 객석에 전하려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한국일보 기사 인용)


역사적 맥락을 담고 있는 시대극이지만 희곡 자체는 극작가의 상상에 의해 재구성된 픽션인 만큼, 관객인 나도 쇼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와 ‘어떤 인간을 그리고 싶었는지’에 좀더 집중해서 감상했다.


리뷰에 사용된 모든 공연 이미지 출처: https://www.ntck.or.kr/ko/performance/info/257084






역사적 배경


극의 시대 배경이 되는 백년전쟁(Hundred Years’ War, 1337-1453)은 이름 그대로 14세기와 15세기, 백 년에 걸쳐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긴 전쟁이다. 실제 전쟁 기간은 백 년 이상이었다고 한다. 전쟁의 원인은 양국 간 토지 분쟁 및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왕가의 갈등이었다. 영국의 군주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의 새 왕이 된 필립 6세의 왕위계승 정당성에 이의를 제기하며 자신이 혈통상 프랑스의 왕이 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잔 다르크 즉 조앤이 등장한 시기는 전쟁에서 영국군이 우세하던 때였다. 영국인들이 국뽕에 자주 써먹는 그 유명한 왕 헨리 5세가 활약하던 무렵이다. 1415년 아쟁쿠르 전투(Battle of Agincourt)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뒤, 1420년 영국의 헨리 5세와 프랑스의 샤를 6세는 트루아 조약(Treaty of Troyes)을 체결한다. 조약에 따라 헨리 5세는 샤를 6세의 딸이자 프랑스 왕녀인 카트린(Catherine of Valois)과 결혼하게 된다. 이 결혼을 통해 헨리 5세는 샤를 6세의 아들이자 도팽(왕세자)이었던 어린 샤를의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박탈하고, 자신이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가 되려 했다. 즉 트루아 조약은 영국의 왕인 헨리 5세와 그 후손들이 프랑스의 정당한 왕위계승권자임을 공표하는 수단이었다. 하지만 트루아 조약 체결 당시 샤를 6세가 정신병(왕가의 근친상간으로 인한 유전병으로 추정)을 앓고 있는 상태였기에, 조약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헨리 5세 또한 프랑스 왕위계승권자로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 많았다. 그들은 샤를 6세의 아들인 도팽 샤를이 복권하여 프랑스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프랑스인 입장에서는 언어도 문화도 다른 적국의 왕이 침략해 와서 자신들의 왕이 된다고 하니 당연히 싫었을 것이다.)


헨리 5세와 샤를 6세는 트루아 조약 체결 2년 후인 1422년에 나란히 사망한다. 그래서 아직 갓난아기였던 헨리 5세의 아들 헨리 6세가 영국과 프랑스라는 유럽 두 열강국의 새로운 군주가 된다. 왕이 너무 어렸기에 그의 숙부였던 제 1대 베드포드 공작 존(John of Lancaster, 1st Duke of Bedford KG)이 섭정이 되어 프랑스를 통치한다. 영국에서는 제 1대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Humphrey of Lancaster, 1st Duke of Gloucester)가 왕을 대신해 섭정 군주(Lord Protector)를 맡았고 섭정위원회(Regency Council)가 구성되었다. 윈체스터 추기경 헨리 뷰포트(Cardinal Henry Beaufort, Bishop of Winchester)가 섭정위원회의 핵심 인물이었는데 나중에 글로스터 공작과 대치해 정계에서 은퇴한다. 자세한 내용은: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Henry-Beaufort


왕위계승권을 박탈당한 도팽 샤를은 자신을 지지하는 신하들과 함께 시농 성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1429년, 17살짜리 시골 소녀 조앤이 그를 만나러 찾아온다. 조앤은 프랑스를 구하고 도팽을 복권시키라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도팽 샤를은 그녀를 시험하기 위해 알현하는 자리에 일부러 가짜 왕을 내보낸 뒤 자신은 신하인 체하고 있었는데, 조앤이 그를 단번에 알아보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결국 군대를 지원받은 조앤은 같은 해 5월 오를레앙에 주둔하던 영국군을 물리쳤고 도팽 샤를은 7월에 랑스에서 대관식을 올려 공식적으로 샤를 7세가 된다.



샤를 7세의 초상.  이미지 출처: https://www.rct.uk/collection/616427/charles-vii



샤를 7세가 왕위에 오르고 프랑스군이 우세하자 조앤은 기세를 몰아 파리까지 탈환하고자 했지만 즉위라는 목표를 달성한 샤를 7세는 미적지근한 태도를 취하며 화친을 모색한다. 별다른 이변 없이 시간이 흐르다가, 1430년 봄 콩피에뉴가 부르고뉴군에게 포위되어 공격받는다는 소식이 전달되어 온다. 조앤은 곧장 콩피에뉴 성으로 향해 전투를 벌였다가 적군에 사로잡힌다. 부르고뉴군은 포로가 된 조앤을 영국군에 넘겼고 조앤은 마녀로 몰려 종교재판을 받았으며, 이듬해 루앙에서 화형당한다. 샤를 7세는 조앤의 포로 송환을 위해 몸값을 지불하지 않았고 딱히 적극적으로 조앤을 구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조앤의 사후 그녀가 성인聖人으로 추대되었을 때 가장 큰 수혜를 입은 사람이 바로 샤를 7세였다. 유가족들의 요청으로 조앤의 처벌에 대한 재수사가 이루어졌고 1456년 항소심 재판에서 기존 재판의 모든 혐의가 부정되어 조앤의 명예가 복권되는데, 이 과정에 샤를 7세의 정치적인 의도가 다분히 개입되어 있었다.


샤를 7세를 왕위에 올려 놓은 가장 큰 공헌자가 조앤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었다. 조앤이 정말로 마녀고 이단자라면 그런 불손한 존재의 도움에 의해 왕이 된 샤를 7세 또한 올바른 군주가 맞는지 왕위계승의 정당성을 의심받게 된다. 따라서 조앤의 명예 복권은 샤를 7세가 왕위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조지 버나드 쇼가 바라본 잔 다르크


『성 조앤』서문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들을 아래 인용한다.


보주(Vosges) 출신의 시골 소녀 아크의 조앤(Joan of Arc)은 1412년경에 태어났고, 1431년에 이단과 주술과 마법의 죄로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1456년에는 무죄 판결로 명예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으며, 1904년에는 덕망이 있는 자로, 1908년에는 복자로 선언되었고, 마침내 1920년에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그녀는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투사 성인이며 중세 시대의 특이한 인물들 중에서도 가장 기묘한 존재다. [...] 그녀는 또한 국가주의의 초대 주창자이며 전쟁에서 당시에 유행하던 몸값으로 도박을 하던 기사도와는 구별되는 나폴레옹식 현실주의를 실천한 최초의 프랑스인이기도 했다. 그녀는 합리적인 여성 복장의 선구자였으며, [...] 군인과 선원으로 복무하기 위해 남장을 했던 그 밖에 이름 모를 수많은 여성 영웅들처럼 특정한 여성의 역할을 수용하기를 거부하면서 남성처럼 옷을 입고, 남성처럼 투쟁했고, 남성처럼 살았던 존재였다.

『성 조앤』, 조지 버나드 쇼, 임성균 역, 지만지드라마 큰글씨책, pp.3-4


그녀의 현실적 상황이 순전히 벼락출세였기 때문에 그녀에 대한 견해는 단 두 가지밖에 없었다. 하나는 그녀가 기적적인 존재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녀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ibid, p.5


만일 그녀가 남들이 틀렸을 때 자신의 올바름으로 그들을 모욕한 결과가 무엇인지 알 만큼 나이가 들었더라면, 그리고 아부하면서 그들을 다루는 방법을 알았더라면, 그녀는 엘리자베스 여왕만큼이나 오래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기교를 지니기에는 너무 어리고 순박했으며 경험이 없었다. 자신이 바보라고 여기던 사람들에 의해서 자기 의도가 좌절되었을 때, 그녀는 그들에 대한 자신의 견해나 그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성급한 분노를 감추지 않았으며, 그들을 바로잡고 그들을 불행에서 구해 준 것에 대해서 그들이 응당 자신에게 감사하리라고 생각할 만큼 순진했다. 탁월한 기지를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상대적으로 어리석은 인물들이 자신들의 멍청함이 드러나는 데 대해서 갖는 분노를 이해하지 못한다.

ibid, p.6


조앤은 교회와 종교 재판으로부터 오늘날 그 어떤 공식적인 세속 재판소에서 그녀와 같은 형태와 상황으로 재판을 받는 죄수보다도 훨씬 더 공정한 재판을 받았으며, 그녀에 대한 판결은 엄격하게 법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신파극의 여주인공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똑같이 아름다운 남자주인공에 기대어 사랑에 애태우는 육체적으로 아름다운 여성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도로 신파극의 여주인공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천재이며 성인이었던 것이다. [...] 만일 어떤 역사가가 반여성주의자여서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에서 여성들이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면, 그는 조앤에게서 아무것도 찾지 못할 것이다. [...] 그녀에 대한 이상적인 전기 작가라면 [...] 성적인 불평등과 그로 인한 로망스를 던져 버리고 여성을 특정한 매력과 특정한 무능함을 갖춘 동물이 아니라 인류의 한 형태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ibid, pp.12-14


편지를 쓸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편지를 구술하여 받아쓰게 할 수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하면서 자신의 편지들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바로 앞에서 양치기 소녀라고 불렸을 때 그녀는 대단히 과격하게 분개했으며, 잘 갖춰진 집안의 여주인이 하는 집안일을 누가 더 잘하는지 어떤 여성이라도 자신과 경쟁해 보자고 공언했다. 그녀는 프랑스의 정치군사적 상황을 오늘날 대부분의 대학 졸업 여성들이 신문을 읽고 자기 나라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이해했다. [...] 끔찍한 가난을 겪었다는 암시나 증거는 어디에도 없으며, [...] 간단히 말해서 그녀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소시민적 자본가 계급의 딸들 대부분보다 훨씬 더 지적인 젊은 여성이었던 것이다.

ibid, pp.18-19


그녀의 재판이 가진 비극적인 부분은 가장 단순하게 십계명을 어겼다는 것 외의 혐의로 재판을 받는 죄수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조앤도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자신을 고발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 그녀의 기도는 세 성인과의 멋진 대화였다. 종교가 단지 업무에 지나지 않는, 형식적으로 순종적인 사람들에게 그녀의 경건함은 인간을 초월한 것으로 비쳤다. 하지만 교회가 그녀에게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사치를 제공하지 않은 채 그녀에게 하나님의 뜻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받아들이고 그녀 자신의 해석은 버리라고 종용하자, 그녀는 단호히 거절했고 가톨릭교회에 대한 그녀의 견해는 조앤 자신이 교황과 다름없는 역할을 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ibid, pp.62-63


쇼는 조앤이 “단 한순간도 수많은 로망스 작가들과 극작가들이 그럴듯하게 묘사했던, 소위 로맨틱한 젊은 숙녀가 아니었다”(p.43)는 입장을 올곧게 견지하며, 특히 프리디리히 실러가 쓴 유명한 희곡 『오를레앙의 처녀』(Die Jungfrau von Orleans)를 비판하면서 “실러의 조앤은 단 한 군데도 실제 조앤과 만나는 지점이 없으며 사실상 이 땅을 걸은 적이 있는 그 어떤 유한한 여성과도 일치하는 점이 없다”(p.48-49)고 말한다. 또한 조앤이 “타고난 보스”(p.44)라고 하면서도 “단지 어린 처녀였던 그녀는 남성들의 허영심이나 사회적 세력의 무게나 비율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p.45)는 객관적 관점을 보여주고,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단 사실은 그녀가 중세의 거대한 교회의 위계질서나 사회 조직 같은 거창한 인위적 구조를 상대할 때 장애 요인으로 작용했다”(p.45)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낭만화된 비극 서사의 도식적인 여성 인물이 아니라 뛰어난 지적 능력과 합리성을 가진 천재로서, 탁월한 리더로서, 위대한 업적을 이뤄낸 한 인간으로서 조앤을 바라보려 했던 쇼의 진보적인 관점은 오늘날의 독자인 나에게도 상당히 놀랍게 다가온다. 특히 아래 인용문에서 엿보이는 여성관과 통찰력은 20세기 남성치고 대단히 이례적이지 않나 싶었다. (쇼는 여성 참정권 운동의 강력한 지지자였고 『워렌 부인의 직업』, 『피그말리온』,『캔디다』등 그의 많은 희곡들은 여전히 다양한 페미니즘 담론을 생성하고 있다.)


드레스를 입고 코르셋을 착용한 채 통상적인 시민으로 생활하면서 자신은 물론 자기 남편들을 포함한 다른 이들의 문제를 잘 다루면서도 취향이나 지향점이 완벽하게 남성적인 여성들은 얼마든지 있다.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더 낮은 법적 지위를 가졌고 오늘날처럼 여성 치안판사, 여성 시장, 여성 국회의원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빅토리아 시대에도 언제나 그런 여성들은 존재했다. [...] 여성을 군대에서 제외시키는 관행은 여성이 남성에게는 없는 천성적인 부적합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많은 여성들이 없을 경우 사회가 후손을 생산할 수 없다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 남성들은 대체로 여성들보다는 없어도 되는 존재들이며 그렇기 때문에 희생되고 있는 것뿐이다.

ibid, pp.39-40


한편 조앤이 들었다고 주장한 ‘성인들의 목소리’에 대해서도 쇼는 망상이나 환청이라는 병리적 관점이 아니라 개인의 주체성 표출이라는 근대적 관점으로 접근한다. 이 서문은 정말 읽어 볼 가치가 있다. 왜 이 작품이 쇼의 노벨상 수상에 상당한 공헌을 했는지를 이해하게 해 줄 것이며, 공연을 본 관객이라면 작가의 언어로 직접 극에 대한 해설을 제공받을 수 있다.




과거를 통해 사유하는 현재, <세인트 조앤>의 동시대성


우리는 사회가 편협함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편협함을 악용하는 두드러진 경우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경우들은 중세 시대뿐 아니라 우리 시대의 특징이기도 하다.

ibid, p.85


조앤이 자신의 시대 정부에 위해를 가했던 것보다 우리의 정부에 천배나 덜 위해를 가했던 수천 명의 여성이 지난 10년 동안 살해되었고, 굶어 죽었으며, 자기 집이나 건물에서 불타 죽었고, 처형과 공포가 가할 수 있는 모든 해를 입었다. [...] 우리 시대였다면 그녀는 재판도 받지 못했을 것이고 모든 법을 유예하는 지역방위법(Defence of the Realm Act) 외에는 아무런 법도 적용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재판할 판사는 기껏해야 귀찮아하는 소령이고 최악의 상황에는 털로 장식된 진홍색 법복을 입은 갓 승진한 변호사일 것이다. 그런 변호사에게 코숑처럼 잘 훈련받은 기독교인이 가졌던 양심의 가책은 터무니없고 비신사적으로 보일 것이 분명하다.

ibid, pp.88-90


쇼는『성 조앤』을 두고 “이 작품에는 악당이 없다. 범죄는 질병처럼 재미없다”(p.106)고 말한다. 이 말대로 오를레앙 탈환, 샤를 7세 즉위, 조앤 화형까지 일련의 굵직한 사건들은 희곡 내에서 대부분 건조하게 제시되고 있다. 긴 공연 전체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2막 조앤의 재판 장면으로, 조앤은 스스로를 처절하게 변호하 삶과 신념을 저울질한다. 조앤은 자신이 신의 계시를 받았고 해야만 하는 일을 했다고 믿었다. 그런 조앤을 재판하는 심문관들은 악의로 똘똘 뭉쳐서 조앤을 파멸시키고자 하는 악당이 아니라 사명의식을 가진 신의 사도들이었다. 그들이 조앤을 교회의 권위에 굴복하게 하려 했던 이유는 그녀의 생명을 보호하고 영혼을 구제해야 한다는 막중한 종교적 책임감 때문이었다.


사제 : 여자들이 하는 일을 네가 그리 잘한다면 왜 집에 남아서 그 일을 하지 않는 거지?
조앤 : 그 일을 할 다른 여자는 얼마든지 있지만 내 일을 할 사람은 나 말고는 없으니까요.

ibid, p.297


조앤 : 제게 들리는 목소리는 교회에 불복종하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말씀에 먼저 복종해야 합니다.
코숑 : 그렇다면 교회가 아니라 자네가 그걸 판단한다는 건가?
조앤 : 나 자신이 하지, 아니면 내가 어떤 판단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ibid, pp.300-301


조앤은 조앤 나름대로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려 했고 교회는 교회 나름대로 자신들의 옳음을 증명하려 했다. 양측의 입장이 서로 평행선을 그으며 불협화음을 이루는 단순한 갈등이지만, 권위에 불복종하고 개인의 의지를 다른 모든 가치보다 우위로 두는 조앤의 위험한 사상은 사회의 위계 질서를 혼란에 빠뜨리는 치명적인 죄였다. 따라서 조앤은 기득권의 논리에 따라 사회로부터 어떻게든 축출될 수밖에 없었다. 투옥 또는 화형, 그 이외의 선택지는 없었다.


조앤은 물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힘겨루기에 불리한 위치였고 양립할 수 없는 두 세력의 갈등은 항상 상대적 약자가 패배하며 끝난다. 시대 불문, 국가 불문, 인간 사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광경이다. 이런 패배는 보통 신념의 굴복이라는 세속적 타락을 동반하는데 조앤도 예외가 되지는 않았다. 조앤은 자신의 ‘주체적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종교적 신념을 포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삶의 주체성이 보장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자 주저 없이 죽음을 선택한다.


조앤을 죽인 살인의 비극성은 그러한 살인이 살인자들에 의해 저질러지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그것은 사법 살인이요, 경건한 살인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이 비극에 희극적 요소를 가져오는 것이다.

ibid, p.108


인간은 미래 예지가 불가능하기에 과거를 반추하며 앞으로 다가올 일을 추측할 수밖에 없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과거 사람들은 미래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삶과 사상과 신념을 어떻게 평가할지 전혀 모른 채 자신들이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다고 믿었고,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정당한 선택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산업혁명 시기 영국에서 아동 노동 착취라는 개념이 아직 없었을 때, 돈을 주고 아동을 극악한 환경에서 노동시키는 행위는 사회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노동자인 아동들은 생계를 유지할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위험한 환경에서 일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동 노동자를 고용한 고용주도 딱히 극악무도한 악당이 아니었다. 그냥 그 시대의 상식에 맞게 합리적인 고용(인건비 절감)을 한 자본가였을 뿐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아동 노동 착취라는 범죄는 일어났다. 흔히 악인이라 간주되는 사람들만이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즉 악의 평범성은 선악이 뚜렷하게 나뉜 환상 속 세계관의 ‘전형적’ 비극보다 더 비극적일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모두는 이분법적 환상의 세계가 아니라 선악의 경계가 불분명한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 살아간다.





물론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조앤의 복권 재판 과정에서, 재판관은 코숑 등 당시 종교재판에 참여했던 당사자 개개인을 문제 삼았다. 교회는 그들을 파문하여 꼬리 자르기를 하면 그만이었고 조앤을 복권시킴으로써 안전하게 당대 사회에서 권위를 유지했다.


처세술에 능하고 위선적이거나 몸을 사릴 줄 아는 사람들, 위기의 순간 몸을 구부릴 줄 아는 가지들은 항상 살아남는다. 성인은 순교함으로써 즉 위선과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사라짐으로써 비로소 성인이 된다. 살아남은 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지위는 기껏해야 군주나 독재자 정도에 불과하다. 쇼는 에필로그에서 ‘살아남아 현실에 안주한 왕’ 샤를 7세를 더없이 세속적인 군주로 묘사하며 ‘죽고 사라져 꿈 속에서 환상으로만 등장하는 성인’ 조앤과 대비시킨다.


샤를 : 친구여, 사람들이 더 이상 내가 마녀이자 이단자에 의해 왕좌에 올랐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고 법석 떨지 않을 것이오. 결국 좋게 끝났다면 조앤도 법석을 떨지는 않을 거요. 그녀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 아니었소. 난 그녀를 알았거든. 그녀에 대한 복권은 다 이루어진 거요? 나는 그 문제에 허튼수작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주 명확히 했소.

[...]

라베누 : 그녀에 대한 판결은 깨지고, 취소되고, 괴멸되고, 아무런 가치나 효력이 없는, 없던 일로 치워졌습니다.
샤를 : 좋아. 이제는 아무도 내 즉위에 도전하지 않겠지, 아닌가?

ibid, p.335


코숑 : 사람들은 날 기억하면서 더 나빠질 거야. 사람들은 내 안에서 악이 선을 이기고, 거짓이 진실을 이기고, 잔혹함이 자비를 이기고, 지옥이 천국을 이기는 걸 보게 될 테니까. 자네를 생각하면 그들에게 용기가 일어날 테지, 그러다 날 생각하면 그게 사그라지겠지만. 그러나 하느님께서 아시지만 나는 정당했어. 나는 자비로웠어. 나는 내게 비친 빛에 충실했어. 나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샤를 : [...] 맞아, 언제나 당신들 선한 자들이 커다란 악행을 저지르지. 날 보라고! 난 선한 샤를도 아니고, 현명한 샤를도 아니고, 용맹한 샤를도 아니야. 조앤의 숭배자들은 내가 그녀를 불길에서 끌어내 주지 못했기 때문에 심지어 나를 겁쟁이 샤를이라고도 부를 거야. 그렇지만 나는 당신들 누구보다도 해를 덜 끼쳤어. [...] 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위아래 질서가 있는 게 올바른 거라고 말하거든. [...] 그러니 이제 내가 묻노니 이런 소소한 방식으로 프랑스의 어떤 왕이 나보다 잘했으며, 나보다 나은 인간이었나?

ibid, pp.343-344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오래된 속담이 여전히 통용되듯 역사는 되풀이되고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샤를 7세의 꿈 속에서 모든 등장인물들은 조앤을 칭송하며 그녀가 성인이 될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조앤이 다음과 같이 질문했을 때 긍정하는 인물은 아무도 없다.


조앤 : 모두가 다 나를 칭송하다니 비통함이 내게 닥치도다! [...] 이제 내게 말해 보세요. 내가 죽음에서 일어나서 살아 있는 여성으로 당신들에게 갈까요?

ibid, p.362


등장인물들은 조앤의 부활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며 허둥지둥하다 모두 도망쳐 버린다. 이것이 샤를 7세의 꿈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샤를 7세는 꿈에 빠져들기 전 자신을 찾아온 사제 라베누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샤를 : [...] 만일 자네가 그녀를 다시 살려 낸다면 그녀에 대한 현재의 모든 흠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6개월 이내에 그녀를 다시 화형에 처할 거야. 그리고 자네는 역시 똑같이 십자가를 들고 있겠지. 그러니 (성호를 긋는다.) 그녀를 편히 쉬게 내버려 두자고. 자네와 나는 그녀 일에 상관 말고 우리 자신의 일이나 신경쓰는 게 좋아.

ibid, p.336


쇼는 조앤을 단순한 낭만주의 신파극 속 여성 인물로 간주하지 않았던 것처럼 코숑이나 조앤을 억압한 세력 역시 도식적 악인으로 취급하지 않았고, 샤를 7세 또한 그저 비겁하고 위선적이기만 한 왕으로 그려내지 않았다. 샤를 7세가 대사로 직접 내뱉듯 그는 극 속에서 조앤을 가장 잘 아는 인물이며, 어쩌면 가장 영민하고, 가장 솔직한 인물이다. 이런 복잡성은 인물을 단순히 극 속의 배역으로만 한정짓지 않고 진짜 살아 있는 인간처럼 보이게 한다.


조앤 : 아, 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 세상은 언제나 되어야 당신의 성인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될까요?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요? 오, 주님,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지요?

ibid, p.365

                    

김광보 연출의 <세인트 조앤>에서 조앤은 마지막에 조금 더 직설적으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라고 묻는다. 대상이 지정되지 않은 이 질문은 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 무대 밖의 열린 공간을 향한 것이다. 즉 관객석에 앉은 관객들에게,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에 건네는 질문이다. 과연 지금 우리는 조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까?



백은혜 배우의 조앤은 전체적으로 상당히 지적인 느낌의 조앤이었다. 믿음과 계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어린 시골 출신 여자아이의 순진함과 치기에서 비롯된 확신보다는 으레 광신도들이 내비치곤 하는 맹목의 그림자가 얼핏 엿보였는데 이 부분이 좋았다. 쇼가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조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던 당대 지식인들은 조앤의 신정주의적 면모를 불쾌해했을 가능성이 크다. 조앤은 자신의 모든 행동을 신의 직접적인 계시로 정당화하며 논쟁을 일축했다. 이처럼 오만한 태도 때문에 조앤은 옳은 일을 하면서도 자신을 아니꼽게 보던 사람들에게 끝내 호감을 사지 못하고 ‘봐 주기 힘든, 견디기 힘든’ 존재가 된다. 쇼는 조앤을 관객이 무조건적으로 몰입하고 응원하게 만드는 주인공이 아니라,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진 현실적인 인물로 제시했다. 이 의도를 백은혜 배우가 섬세하게 반영했다고 생각한다.


이승주 배우는 참… 어떻게 이렇게 본인한테 찰떡 같은 역을 잘 찾았는지…. 샤를 7세 배역에 너무 잘 어울려서 별로 할 말이 없다. 조연 인물들 중에서는 코숑 역을 맡은 박상종 배우, 스토검버 역을 맡은 윤성원 배우, 워릭 백작 역을 맡은 이동준 배우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커튼콜 사진. 좋은 공연 재밌게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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