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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희미 Dec 02. 2022

유니버설발레단 오네긴(2022) 리뷰

10.30 / 11.5 / 11.6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오네긴>은 영국 로열발레단과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안무가였던 존 크랑코(John Cranko)가 러시아의 대문호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Alexander Sergeyevich Pushkin, 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Пушкин)의 운문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토대로 창작한 드라마 발레 작품이다. 현 국립발레단 단장 겸 예술감독인 강수진 발레리나가 2015년 은퇴작으로 정한 작품이기도 하고(강수진 발레리나는 오랜 기간 슈투트가르트발레단 단원이었다), 유니버설발레단(UBC)에서는 2017년 황혜민·엄재용 수석 무용수 부부가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현역 은퇴했다.


포스터 문구처럼 ‘엇갈린 운명과 잔인한 사랑이 그려낸 드라마 발레의 정수’로서 1879년 모스크바 말리 극장에서 초연되었으며 국내에서는 2009년 유니버설발레단이 LG아트센터에서 최초로 공연했다. 당시 유니버설발레단은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공연권 허가를 받았는데, 아시아 초연은 2008년 중국국립발레단(중앙발레무용단中央芭蕾舞团, National Ballet of China)의 베이징 공연이었다. 나는 2011년 LG아트센터 공연을 본 이후로 유니버설발레단에서 <오네긴>을 무대에 올리면 매번 적어도 한 회차씩은 관람하고 있다.



*작품 소개 기사

http://www.thepreview.co.kr/news/articleView.html?idxno=6711


*안무가 존 크랑코 소개 기사

http://dancepostkorea.com/nr/?r=dpk&c=6/15&uid=555



발레 공연 보는 걸 좋아하기는 하는데 솔직히 나도 발레를 잘 아는 건 아니다. 취미 겸 운동 삼아 발레를 몇 년 정도 배우고 있어서 가끔 공연을 관람하다 내가 배웠던 동작을 알아보면 신기하다고 생각하는 정도지, 무용수들의 테크닉이 어떤지 객관적으로 평가할 만한 안목은 없다. UBC 공연은 <심청>, <춘향> 같은 창작 작품들과 <호두까기 인형>, <백조의 호수>같은 유명한 고전 발레 작품들을 주로 봤고 갈라 공연도 몇몇 보긴 했는데 역시 가장 애정이 가는 작품은 입문작이었던 <오네긴>이다. 서사와 맞물리는 자유롭고 직관적인 안무가 등장인물들의 감정에 쉽게 이입할 수 있도록 해 주고, 또 하필 망한 사랑 얘기라 내 취향을 저격했다. 공연에 사용되는 차이코프스키 음악도 주옥 같은 명곡들만 쏙쏙 골라 편곡해서 귀가 즐겁다. 발레를 처음 보는 사람에게 꼭 추천해 주고 싶은 작품이라 공연 예매할 때마다 이건 반드시 봐야 된다고 설득하며 친구들도 여럿 데려갔다. 혹시 푸시킨이 쓴 원작 소설을 읽었다면 더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을 것이다.



알렉산드르 푸시킨(1827), 바실리 트로피닌 작. 이미지 출처: http://www.saint-petersburg.com/famous-people/alexander-pushkin



*푸시킨 바이오그래피:

(1) https://pushkinland.ru/2018/english/push1.php

(2)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Aleksandr-Sergeyevich-Pushkin


Pushkin’s use of the Russian language is astonishing in its simplicity and profundity and formed the basis of the style of novelists Ivan Turgenev, Ivan Goncharov, and Leo Tolstoy. His novel in verse, Yevgeny Onegin, was the first Russian work to take contemporary society as its subject and pointed the way to the Russian realistic novel of the mid-19th century.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인용)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는 시구로 국내에서도 유명한 푸시킨은 러시아 현대문학의 아버지로 간주되며 러시아가 가장 사랑하는 국민 시인이라 불린다. 푸시킨의 외증조부 아브람 페드로비치 하니발은 에티오피아 태생 흑인이었다. 표트르 1세가 그를 러시아로 데려와 지원하고 대부 겸 후견인이 되어 주어서 훗날 러시아 제국군 군인이 되었는데, 푸시킨은 이런 조상의 피를 이어받은 스스로의 혈통에 큰 자긍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대표작 중 영웅담을 다룬 환상 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는 러시아 고전음악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미하일 이바노비치 글린카가 오페라로 만들어서 오늘날까지도 널리 사랑받고 있다. 푸시킨의 초기작들은 낭만주의 색채가 짙지만 이후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기반을 닦았다고 평가받으며 상기 인용문에 언급되어 있듯 이반 투르게네프, 이반 곤차로프, 레오 톨스토이 등 후대의 자국 문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푸시킨은 1837년에 아내 나탈리아 곤차로바의 명예를 위해 망명한 프랑스 출신의 군 장교 조르주 단테스와 결투를 벌였고 이때 입은 총상으로 38세의 짧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푸시킨의 소설에 묘사된 오네긴과 타티아나


원작에 따르면 오네긴은 똑똑한 지식인 청년으로 당시 러시아 상류층의 교양이었던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줄 알았고, 과시욕이 좀 있긴 했으나 상트페테르부르크 사교계에서 제법 인기가 많은 인싸였다. 무도회란 무도회는 다 찾아다니고 극장에도 뺀질나게 드나들었다. 패션에 예민했고 여자 후리는 데도 능숙했던데다 인간관계 정치질 또한 상당히 잘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세상만사 다 싫증이 나고 질려서 우울증을 겪는데 때마침 이 무렵 숙부가 타계하는 바람에 시골 영지를 물려받게 된다. 시골로 내려온 후에는 사회성을 포기했는지 사람들한테 새 영주 싸가지 없다고 대차게 까인다. (이웃들이 오네긴에게 인사하러 찾아오는데 대화하기 싫다고 몰래 말 타고 저택을 빠져나가 도망 다녀서 평판이 나빠졌다. 진짜 예의 없긴 하다ㅠㅠㅋㅋ) 한편 호메로스는 싫어했고 애덤 스미스를 열심히 읽었다는 부분이 웃겼는데ㅋㅋㅋ 문학청년 렌스키와 너무나 대조되는 현실주의자다.


푸시킨은 오네긴이 타고난 매력의 소유자인데다 연애의 달인(?)이라고 묘사한다. 구체적으로는 “하나 그가 진정으로 천재성을 발휘했던,/그 어떤 학문보다 더 확실히 알았고,/그에게는 어린 시절부터의/소일거리요 고통이자 위안이요,/애수 젖은 게으름을 하루 종일 사로잡던/한 영역이 있었으니, […] 그것은 곧 연애의 기술이었다.”(『예브게니 오네긴』, 알렉산드르 푸시킨 저, 김진영 역, 을유문화사, p.16)라 언급하고 있다.


또한 그는 선수였다. 숙맥인 척하다가는
농담으로 순진함에 충격 주고,
각본 짜인 절망으로 상대방을 겁주다가
듣기 좋은 아첨으로 상대방을 달래 주고,
감동의 한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하고,
순진한 나이의 편견들을
재치와 열정으로 단숨에 압도하고,
저절로 흘러나올 다정함을 고대하고,
상대방의 고백을 애원하며 요구하고,
가슴의 첫 음성을 살며시 엿듣다가
사랑의 뒤를 쫓고, 그러다가 단숨에
은밀한 만남에 성공하고……
그 후에는 단둘이 된 틈을 타서
정적 속에 수업을 가르치고!

『예브게니 오네긴』, 알렉산드르 푸시킨 저, 김진영 역, 을유문화사, pp.17-18


삭제된 초고 구절에는(ibid, p.287 주석 참조) 오네긴이 순진한 청년인 체하면서 여자들을 어떻게 홀리고 꼬드기는지 좀더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카사노바가 따로 없다. 푸시킨도 쓰다가 이건 좀 과하다 싶어서 삭제하고 상기 인용구만 남긴 모양이다. 아무튼 로맨스 남주답게 잘났고 자기 잘난 거 알아서 오만하고 콧대 높은데 인기까지 많은 그런 남자다.



타티아나는 반대로 수수하고 얌전한 내향인이다. 소설에서는 “다듬어지지 않고, 우울하고, 과묵하고,/숲 속의 사슴처럼 소심하고,/가족들 틈에서도/남의 집 아이 같고,/아빠나 엄마에게/응석도 못 부리고,/자신은 어린애이면서 애들 틈에 섞여/놀며 깡충대기 싫어하고,/하루 종일 그저 혼자 말없이/창가에 앉아 있곤 했다.”(ibid, p.68)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사색과 몽상을 즐기는 타티아나는 “일찍부터 소설을 좋아했고,/소설이 모든 것을 대신했다./리처드슨과 루소의 허구 속에/그녀는 빠져들었다.”(ibid, pp.70-71)


타티아나가 읽은 리처드슨과 루소의 소설은 아마 『파멜라』와 『신 엘로이즈』일 것이다. 『파멜라』는 예전에 다른 포스트에서도 언급한 적 있는데 영문학에서 소설이라는 근대적 문학 장르를 확립시킨 최초의 작품이자 최초의 서간체 소설로 간주된다. 하녀가 자신이 모시는 귀족 도련님과 결혼한다는, 당대(18세기)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귀천상혼 해피엔딩 로맨스를 담고 있다. 약 20년쯤 뒤에 발간된 루소의 『신 엘로이즈』도 당대 영국에서 대단히 인기 있었던 서간체 로맨스 소설이다. 역시나 평민과 귀족의 로맨스를 다루는데 여기서는 여자 쪽이 귀족이다. 결말은 보는 사람에 따라 해피엔딩인지 새드엔딩인지 평이 좀 갈릴 수 있겠지만, 사랑이 얼마나 불가항력인지 그리고 얼마나 숭상받아 마땅한 것인지 알려주는 일종의 사랑찬가를 담고 있다.


프랑스어가 당시 상류층 귀족들의 교양이었다거나 타티아나가 영국 소설의 팬이라거나 하는 작품 내 묘사들을 보면, 혁명 이전 시대(제정 러시아 시대)에 서유럽 문화가 러시아 상류 사회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왕가끼리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제정 러시아 최후의 차르 니콜라이 2세와 동시대 영국의 군주였던 조지 5세는 둘 다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들으로서 외사촌 사이였다.) 


로맨스 소설을 통해 사랑에 환상을 품고 있던 타티아나는 어느 날 렌스키와 함께 집에 찾아온 오네긴을 보고 첫눈에 반해서 끙끙 앓다가 결국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고 인정하고 만다. 재미있게도 오네긴 역시 처음 라리나 가족(타티아나의 풀네임이 타티아나 라리나이며, 올가는 타티아나의 동생이다)을 방문하고 자기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올가에게 홀딱 빠진 렌스키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나라면 언니를 택했을걸,/만약 내가 자네처럼 시인이었다면 말이지./올가의 얼굴엔 생명이 없어.”(ibid, p.84) 하… 참… ㅋㅋㅋ 푸시킨은 타티아나의 첫 등장 장면에서 타티아나가 올가에 비해 미인이 아니고 침울한 인상이라고 묘사했는데, 오네긴 눈에는 처음부터 타티아나가 올가보다 더 생기있어 보였고 자기 결혼 상대로는 올가보다 타티아나가 낫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물론 올가랑 사랑에 빠진 렌스키 앞에서 저딴 싹퉁바가지 없는 소리를 하니까 렌스키가 삐진다. ㅋㅋㅋ 고백 받아줄 것도 아니면서 호감은 드러내는 전형적인 나쁜 남자 대사다.


타티아나는 오네긴에게 프랑스어로 편지를 써서(푸시킨은 여성의 러브레터가 러시아어로 쓰이는 경우가 없어 프랑스어로 작성되었다고 말하고 있다.(ibid, p.99) 예나 지금이나 프랑스어의 아름다움과 탁월함을 찬미하는 사람들이 많고 프랑스어가 그런 소위 고급지고 우아하고 세련되고 아름다운 언어라고 인지된 역사적 경위도 있지만 이 포스트에서는 생략하겠다) 전달하는데 그 내용 일부를 아래 인용한다.



타티아나가 오네긴에게 쓴 편지


     왜 우리를 찾아오신 건가요?
잊힌 마을의 촌구석에서
난 영영 당신을 몰랐을 테고,
쓰디쓴 고통도 몰랐을 텐데.
세월 따라 가라앉고
(누가 아나요?),
마음 맞는 사람 만나
정숙한 아내,
온화한 어머니가 되었을 텐데.

[…]
신들의 결정이든……
하늘의 뜻이었든, 난 그대의 사람인걸.
그대와의 진정한 만남을 위해
내 삶은 지금까지 저당 잡혀 있었을 뿐.
그대는 신이 내게 보내 준 사람,
무덤까지 날 지켜 줄 사람……

ibid, p.104


[…]
내 운명을 그대에게 맡기니,
그대 앞에 눈물 흘리고
그대의 보호만을 간절히 애원할 뿐……
[…]
그대를 기다리고 있어. 단 한 번 눈길로
가슴의 희망을 되살리든지
아님, 아아, 응분의 꾸짖음으로
이 힘겨운 꿈에서 깨워 주기를!

ibid, p.106



오네긴은 이 편지를 읽고 타티아나와 대화하면서 “만약 내 삶을 가정의 단란함에/구속하고 싶었던들,/ […] 만약 내가 단 한순간만이라도/가족의 정경에 이끌렸던들,/정녕 당신 아닌/그 어떤 신부도 찾지 않았을 테지.(ibid, p.120)라고 희망고문을 한다. 그래 놓고 자기는 그런 가정적 행복을 찾으려고 태어난 남자가 아니니 결혼해 봤자 너만 불행해질 거라고 돌려서 거절한다. 화룡정점으로 “자기 절제를 배워야 하오./모두가 나처럼 당신을 이해하진 못할 테니까./순진함은 불행으로 이어진다오.(ibid, p.122) 이렇게 설교질까지 한다. 아…ㅋㅋㅋ 진짜 한 대 치고 싶다….


나중에 모스크바에서 공작 부인이 된 타티아나와 재회한 후 오네긴이 타티아나에게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다. 역시 전문은 아니고 일부 인용한다.



오네긴이 타티아나에게 쓴 편지


     그 언젠가 우연히 당신을 만나
애정의 불꽃을 발견했던 나는
감히 그것을 믿을 수 없어
달콤한 관습의 길로 나아가지 못했소.
나 자신의 역겨운 자유를
잃고 싶지 않았던 거요.
[…]
가슴이 원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그때 난 내 가슴을 떼어 놓아 버렸다오.
모두에게 등 돌리고, 모든 것과 절연한 채,
난 생각했소. 자유와 평온이
행복을 대신하리라. 맙소사!
그것은 실수였고, 내게 내려진 형벌이란!

     아니요, 매 순간 당신을 보고,
어딜 가나 당신의 뒤를 따르고,
그 입술의 미소, 그 눈의 움직임을
사랑에 빠진 두 눈으로 붙잡고,
오래도록 당신에게 귀 기울이고, 가슴으로
당신의 모든 완벽함을 이해하고,
당신 앞에서 고통 속에 심장이 멎어
창백해지며 꺼져 가고…… 이것이 최상의 행복이오!

      그런데 그것을 잃었소. 당신을 찾아
발길 닿는 대로 헤맨다오.
[…]

ibid, pp.270-271



오네긴은 이 편지를 보내고 답을 받지 못하자 편지를 여러 차례 다시 보낸다. 하지만 여전히 답은 없고, 그러던 도중 우연히 한 사교 모임에서 타티아나와 다시 만난다. 타티아나는 오네긴을 매우 냉정하게 무시한다. “곤혹의 기색은, 연민은 어디 있나?/눈물 자국은?…… 없다, 없다!/그 얼굴엔 오직 하나, 분노의 흔적뿐(ibid, p.273) 이런 타티아나의 반응을 본 오네긴은 절망하지만 순순히 포기하지 못하고 공작저에 다짜고짜 찾아간다; 뜻밖에도 타티아나는 울고 있었는데, 이 대목에서 타티아나가 오네긴을 쏘아붙이며 건네는 말들이 한 마디 한 마디 너무 아리고 슬펐다. 고백을 거절당했을 때 오네긴이 했던 설교가 타티아나의 마음에 정말 큰 상처로 남은 게 보여 안타까웠다.


그때 난 지금보다 젊었었죠.
지금보다 더 나았던 것도 같아요.
그리고 당신을 사랑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던가요?
당신의 가슴에서 무엇을 얻었던가요?
어떤 대답을? 오직 냉랭함뿐이었지요.
아닌가요? 온순한 처녀의 사랑이 당신에겐 새로운 게 아니었지요?
지금도 ─하느님!─ 피가 얼어붙네요.
그 차가운 시선과
설교를 생각만 하면…… 하지만
당신을 탓하진 않아요. 그 끔찍한 순간
점잖게 처신하신 거니까,
제 앞에서 당신은 정당했으니까.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ibid, pp.279-280


번잡스러운 세간의 소문과는 동떨어진
황무지에서, 그때는 ─아닌가요?─
날 좋아하지 않으셨지요…… 그런데 왜 지금은
내 뒤를 쫓으시나요?
왜 나를 점찍으셨나요?
내가 지금은 상류층에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인가요?
내가 부유하고 지위 높아서,
내 남편이 전쟁의 상이용사여서,
그로 인해 궁정의 총애를 받고 있어서?
나의 치욕이
이제 모두에게 알려짐으로써
사교계의 달콤한 명성이
당신에게 쏟아질 수 있어서는 아닌가요?

ibid, pp.280-281


행복은 그토록 가능한 것이었는데,
그토록 가까이 있었는데!…… 그러나 운명은
이미 결정됐어요. 어쩌면 난
경솔하게 행동했는지 모르죠.
[…]
당신을 사랑해요(숨길 필요가 있을까요?)
하지만 난 다른 남자에게 속한 몸,
영원히 그에게 충실할 것이에요.

ibid, pp.282-283


결국 어긋난 인연은 회복되지 못하고 오네긴은 젊은 시절 오만의 대가를 치른다. 오네긴과 타티아나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난다. 과거는 흔히 낭만화되거나(‘지금보다 그때가 좋았지’) 가정화되어(‘만약 그때 이랬다면, 저랬다면 지금쯤 더 좋아졌을 거야/달라졌을 거야’) 페티시즘적으로 소비되곤 하는데 사람이 추해지지 않으려면 지나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음을 인정해야 하고 이미 놓친 것은 놓아줄 줄 알아야 한다. 변화를 받아들이고 새 길을 모색하며 나아가야 한다. 그런 점에서 타티아나는 오네긴보다 훨씬 강하고 선하고 굳건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 오네긴이 정말 매력적인 비극 주인공이긴 하지만, 인간적으로 본받거나 엮이고 싶은 타입은 절대 아니다. 타티아나는 오네긴에게 거절당하고 나서도 꿋꿋이 자기 인생 잘 살아갔지만 결말 이후 오네긴은 죽었거나 죽음에 비견될 만큼 비참하게 살아가지 않았을까 싶다…. 타티아나가 삶의 남은 시간 동안 상처를 천천히 회복하면서 이전에 생각지 못했던 또다른 행복들을 찾아냈길 바란다. 원래 날 상처 준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복수는 내가 보란 듯이 잘 사는 것이다.


한편 푸시킨의 문장과 운율은 번역을 거쳐 읽었는데도 정말 아름답다. 결말 근처에 있던  인상적으로 읽은 구절 하나를 마지막으로 인용하고 마무리하겠다.


그러나 우리에게 젊음은
헛되이 주어졌음을,
우리는 언제나 젊음을 배반하고
젊음은 우리를 기만했음을,
최상의 욕망들과 신선했던 꿈들이
비 내리는 가을날 낙엽처럼
하나하나 순서대로 썩어 갔음을
생각하면 슬프도다.
우리 앞엔 똑같은 식사의
기나긴 행렬만 남아 있고,
인생을 의례로 간주하여
견해도 열정도 공유하지 않으면서
격식 차린 군중 뒤를 따라가야 한다는 건
견디기가 어렵도다.

ibid, pp.282-283



아래부터는 2022 유니버설발레단 <오네긴> 공연 페어별 리뷰가 있다. 사진은 전부 커튼콜 때 직접 찍었다.








10/30   손유희&이현준 페어


나의 최애 페어. 두 무용수가 부부라 그런지 케미가 정말 좋다. 재작년에 이 페어 공연을 너무 감동적으로 봤기에 올해 다시 만나 좋았다. 손유희 발레리나의 타티아나는 이번에 본 캐스트 중 가장 내향적인 타티아나 같았다. 오네긴을 향한 감정에 휩쓸릴 때는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부서질 듯 아슬아슬한 위태로움이 엿보이는데, 마음을 다잡고 단호해지는 장면들에선 또 저 가냘픈 몸 어디서 저런 에너지가 나오나 싶었다. 서사에 따른 대비가 확실해서 좋았다. 겉으론 약한 듯하지만 사실 내면은 누구보다 단단한 외유내강의 전형 같은 느낌. 오히려 이 페어에서는 오네긴이 다소 유리멘탈이다…. 2막까지는 그린 듯이 고고한 차도남이다가 렌스키를 죽이고 무너진 뒤로 3막부터 진짜 처절한 구질구질함을 보여준다.


오네긴이 원래 오만한 인물이긴 하지만 이현준 발레리노의 오네긴은 정말 독보적으로 싸가지가 없다. (즉 무용수의 개성이 매우 강하다. 배역과 굉장히 잘 어우러져서 보는 재미가 있고 너무 좋음ㅋㅋ) 재작년에 친구 3명을 데리고 이 페어 공연을 봤는데 1막 끝난 뒤 인터미션 때 친구 한 명(간호사)이 나한테 와서는 세상 심각한 얼굴로 “남주 뭐야? 자기애성 성격장애……?” 이래서 너무 웃겼다 아...ㅠㅠ


올가-렌스키 커플 사랑스러웠고(다만 1막 June 나오는 파드되 때 약간 불안한 느낌이 있었다) 이승민 발레리노의 그레민 공작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공작이 어마어마하게 로맨틱하다; 이렇게까지 로맨틱한 인물이었나 다시 볼 만큼 다정해서 괜히 내가 다 설렜다. 재작년에 강민우 발레리노가 그레민 공작 맡았을 때는 근엄함이 좀더 부각되는 느낌이었는데 분위기가 전혀 달라서 신기했다. 공작-타티아나의 절제된 안정형 사랑과 오네긴-타티아나의 강렬한 운명적 사랑 중 어느 쪽을 더 선호하는지 굳이 하나를 고르라면 내 픽은 늘 오네긴이었는데(은근히 취향이 많이 갈리는지 아까 언급한 간호사 친구는 무조건 공작이라고 한다ㅋㅋ) 이 공연은 마음이 공작 쪽으로 좀 흔들렸다…. 기회가 있다면 다음 시즌에 이승민 발레리노의 그레민 공작 한 번 더 보고 싶다.


3막 회한의 파드되 직전에 타티아나가 혼란스럽고 불안해 남편을 붙잡는 심정도, 클라이맥스에서 오네긴을 떠나보내고 굳건히 혼자 버티는 절절한 심정도 매우 생생하게 느껴져 막이 내려갈 때쯤엔 눈물 한 방울 또르륵 흘렸다. 개인적으로는 이번에 본 공연들 중 감정적으로 가장 풍부했던 무대였다. 손유희 발레리나의 감정 연기가 정말 좋다.






11/5   홍향기&강민우 페어


이번에 데뷔한 페어. 친구와 함께 보러 갔다. 홍향기 발레리나를 올가로 몇 번 봤고 강민우 발레리노는 다른 공연에서 주연으로, 오네긴에서는 그레민 공작으로 봐서 이 페어가 어떤 느낌일지 너무 궁금했다. 막상 보니까 굉장히 신선하고 재밌었다! 오네긴을 여러 번 봤는데 처음 본 것 같았다. 일단 타티아나가 외향적인 느낌이라 신기했다. 3막에서는 정말 사교계를 주름잡는 여왕처럼 보였다. ㅋㅋㅋ 푸시킨이 소설에서 묘사한 타티아나는 수줍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순진한 시골 귀족 아가씨지만, 한편으로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자마자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단숨에 러브레터까지 써서 보내는 행동력과 대담함을 갖춘 인물이다. 동생 올가가 너무 햇살처럼 밝아 비교가 돼서 그렇지 타티아나도 나름 그 나이대의 발랄한 소녀고 자기 자신의 욕망에도 충실하다. 홍향기 발레리나의 타티아나는 그 발랄함과 순진함, 솔직함이 한껏 강조된 타티아나 같았다.


강민우 발레리노의 오네긴은 세상이 무료한 귀족 도련님 그 자체였다. 싸가지가 없다기보단 재수가 없었다….ㅋㅋ; 이현준 발레리노의 오네긴처럼 자아도취적인 차도남은 아닌데, 이미 자기가 세상만사에 통달했다고 생각해서 주변의 모든 것을 시혜적으로 바라보는 그 식견 좁은 젊은 엘리트 특유의 오만함이 잘 드러났다. 깨달음을 얻을 때쯤 몰락하는 전형적인 비극 주인공 타입. 1막 타티아나랑 산책할 때 턴 동작이 정말 부드럽고 우아해서 감탄했다. 거울 파드되는 디즈니 왕자인가 싶을 만큼 다정했고ㅋㅋㅋ 3막은 의외로 감정 연기가 폭발적이라 놀랐다. 회한의 파드되에서 타티아나는 상대적으로 다른 캐스트보다 훨씬 단호한데 오네긴이 상당히 애절해서 오네긴에게 좀더 감정이입이 됐다.


이 페어는 올가-렌스키 커플도 개성이 강해 신선했는데 서혜원 발레리나는 올가의 현신인가 싶을 만큼 너무너무 잘 어울렸고 이고르 콘타레프 발레리노의 렌스키는 테리우스 같은 로맨틱한 비주얼과 달리 성격이 엄청 화끈해서 기억에 크게 남았다. 올가를 쳐다볼 때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긴 하지만 어쩐지 시인이라기보다 전사에 가까운 기개가 있었다…. ㅋㅋ 렌스키 아리아 때도 처연함보다는 답답함, 야성적인 비통함 이런 느낌이 더 강했다. 나중에 말리러 온 올가랑 타티아나를 내칠 때도 이미 마음의 결심을 해서 망설임이 없어 보였다.






11/6   강미선&이현준 페어


막공, 2022 포스터 페어. 둘 다 그냥 믿고 보는 캐스라 예매대기 터지자마자 결제했다. 강미선&이동탁 페어를 좋아했는데 이번에 이동탁 발레리노를 못 본 게 많이 아쉽다. ㅠㅠ 강미선 발레리나는 앞의 두 캐스트를 보고 봐서 그런지 가장 정석적인 타티아나라는 느낌이었다. 소설에서 튀어나온 타티아나 같았다. 이 페어는 주연 인물 둘이 서로 밀고 당기는 파워 밸런스가 공연 내내 정말 절묘하게 유지된 덕분에 지독한 어른의 연애사ㅋㅋ 같은 느낌이 들었다. 초반부 어린 시절에도 타티아나가 맹목적으로 이끌려 가는 느낌이 많이 없었고, 이현준 발레리노의 오네긴은 3막 회한의 파드되에서 상대적으로 멘탈을 유지하며 애걸이 아니라 유혹을 했다. 오네긴이 10/31 공연과 달리 끝까지 솔직하지 않고 자존심을 유지하길래 마지막에 좀 놀랐다. 무대 공연의 특성상 발생하는 이런 디테일 차이들로 인해 관람 회차마다 감상과 느낌이 달라지는 점이 재밌다. 이 재미 덕분에 같은 공연 열 번 스무 번씩 보는 사람도 많은 거라고 생각한다. 나도 같은 공연 여러 번 보는 거 좋아하지만 사실 주말 이틀 연속 예술의전당 가는 건 좀 힘들었다ㅎㅎ….


회한의 파드되에서 오네긴이 처절해지면 처절해질수록 나도 감정이입이 되어 안타까워지긴 하는데, 과거의 실수(사실 실수라기엔 너무 큰 잘못;)를 만회하고 지나간 인연을 되찾아 보기 위해 빌러 왔으면서 여전히 오만한 태도가 엿보인다면ㅋㅋㅋ 아직 철이 덜 들었네 싶고 타티아나가 공작을 선택하는 마음이 너무나 이해가 되는 것이다. 회한의 파드되를 할 때 무용수들도 이 장면에 대한 각자만의 해석이 있지 않을까 싶다. 오네긴은 과거를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정말 사랑에 눈이 멀어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타티아나도 한때 자신을 좋아했으니 고백을 받아줄 가능성이 조금은 있을 거라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계산을 하고 있는 걸까? 타티아나는 어느 쪽이든 오네긴을 거절하겠지만 전자의 경우 말 그대로 가슴이 찢어질 것이고(진짜 타이밍이 어긋난 망한 사랑ㅠㅠ….), 후자라면 오네긴은 끝까지 타티아나의 마음을 떠보고 재보며 상처주는 쓰레기; 가 되므로 이런 남자와 엮여 고생하는 타티아나가 불쌍할 따름이다. (진짜 계산된 행동이라면 오네긴은 타티아나가 비록 지금은 공작의 아내가 됐지만, 자기가 과거에 큰 상처도 줬지만, 여전히 자길 더 사랑하고 있을 거라는 오만한 확신을 갖고 편지를 썼다는 말이다. 머리에 새치 나올 때까지 나이를 먹었는데 어떻게 여전히 그만큼 자의식 과잉일 수가 있는지…. 타티아나가 정말로 오네긴에게 미련이 남아 있다 한들 마인드가 너무 밥맛이다. ㅋㅋㅋ;)


올가-렌스키 커플은 10/30 공연과 같은 캐스트(엘리자베타 체프라소바&콘스탄틴 노보셀로프)였고 그레민 공작은 11/5 공연과 같은 캐스트(알렉산드르 세이트칼리예프)였다. 조연진도 전체적으로 정석적인 느낌의 조합이었던 공연.






12월이 되어서 날씨도 부쩍 추워졌고 곧 <호두까기 인형> 하는데, 늦가을에 본 <오네긴> 리뷰를 이제야 겨우 완성했다…. ㅠㅠ 발레를 처음 봐도 정말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멋진 작품이니 많은 분들이 기회가 되실 때 한 번쯤 관람하셨으면 좋겠다. UBC에서 광고료 안 받았습니다…. ㅋㅋㅋ 순수한 애정으로 좋은 작품 널리널리 알리고 싶어 추천한다. 다만 언제 공연이 다시 올라올진 모르겠다.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좌석 1층은 10열 이내로 가야 무용수들 표정이 보인다. 사실 무대가 안쪽으로 깊어서 앞열 앉아도 무용수가 안쪽으로 멀리 들어가면 표정이 세세하게 안 보이기도 한다. 2~3열쯤에서 오페라글라스 시는 분들도 가끔 봤다. 전에 2층, 3층 앞열에서 발레 공연 관람한 적 있는데 3층 앞열은 가성비 나쁘지 않았고 2층 앞열(3열 이내) vs 1층 뒷열(10열 이후) 중 고민이라면 난 좀더 앞열 예매대기 걸어 놓고 기다려 보거나 2층 갈 것 같다. 앞열 사이드라면 그냥 1층 가겠다. ㅋㅋㅋ 물론 당연한 얘기지만 어디든 사이드보단 중앙 쪽 좌석이 훨씬 두루두루 잘 보이고 몰입도 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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