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
한 며칠 엄마집에 있었더니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몸도 찌뿌둥해서 언니와 동네 목욕탕에 가기로 했다. 집에서 씻는 건 개운하지 않다며 주말마다 가던, 엄마가 먼저 가자고 하는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였다. 1996년 개업 당시부터 거의 매주 당연한 듯이 일상에 포함되었던 그곳도, 2022년 엄마가 목욕탕에 들어가 버틸 기운이 없다며 아예 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까지 소소하고도 잔잔한 엄마와의 기억이 가장 많은 곳이었다.
엄마를 보면 늘 반갑게 맞이해 주시던 목욕탕 주인분이 엄마 안부를 물었다. 내성적인 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나가려고 했던 것 같지만 나는 그래도 20년을 넘게 엄마와 알고 지내던 분께 소식을 알리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하자마자 계속 아프시더니 그렇게 되었냐며 아주 약간의 슬픔을 내비쳤다. 코로나로 돌아가셨다는 얘기까지는 하지 않았다. 최대한 감정을 빼고 그렇게 되었다는 말만 전했다.
갈아입을 속옷을 챙기며 그런 생각을 했다. 아, 이제 엄마집에 속옷을 벗어놓고 가면 안 되겠구나. 그것보다도 이제 엄마집에 이유 없이 들르는 일은 없겠구나 싶었다. 언니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공감했다. 억지로 아빠 꼴을 보는 것에도 이제는 한계가 왔고, 남동생이 엄마집에 남아있는다고 한들 우리는 엄마가 중간에 있는 것이 아니고서는 그렇게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다. 목욕탕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 엄마에 관한 글을 쓰고 싶어. 나도 이제 점점 기억이 흐려져서 엄마가 지워지는 게 싫다."
"그래, 괜찮네."
"필요할 땐 언니가 도와줘. 내가 기억하는 게 틀릴지도 모르잖아."
"그 기억도 다 네 거니까 그냥 네가 기억하는 대로 써도 괜찮지 않겠나."
내가 말을 하면서도 언니가 적극적으로 동참해 줄 거란 생각은 안 했지만 의외로 또 헛소리한다고 핀잔을 주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언니와 나는 그렇게 엄마집에서 만나고 다시 각자의 집으로 헤어지는 일을 몇 번 반복했다.
엄마집에서 돌아와 이틀을 그냥 누워만 있었다. 언니가 챙겨준 마른 누룽지를 그대로 씹다가 입안이 너무 아파서 조금 귀찮지만 물에 끓이기로 했다. 기왕 일어선 김에 냉장고 안에 죽어가는 채소도 다듬기로 했다. 엄마 빈소에서 챙겨가라고 해서 이고 지고 왔던 식칼을 꺼내어 파프리카를 손질했다. 삐끗. 손가락에 작은 상처가 났다. 사실 장례식 직후에 집에 돌아와서 짐 정리를 하다가도 한번 베었었다. 평소 같았으면 '짜증 나' 한마디가 전부였을 텐데 그때는 그대로 서서 하염없이 울었다.
엄마가 입버릇처럼 '느그 다 시집가고 나면 결국 같이 사는 사람은 아빠다'라고 했지만 그 애비라는 작자는 엄마가 죽은 것도 한참 뒤에나 알았다. 관심도 없었다. 결국 엄마는 원하던 그 미래를 보기도 전에 죽었고 그 마지막을 돌본 것은 함께 살지 않는 딸 들이었다. 그런 생각들이 뒤엉켜 모두 눈물이 되었다.
오전에는 보일러를 올려놔도 몸에 붙은 추위가 가시질 않더니 이번에는 보일러를 너무 올렸는지 원룸 전체가 후끈거렸다. 지난 며칠 잠을 못 자서 몸살이라도 생긴 것처럼 춥다가 갑자기 열이 나서 코로나 증상이 아닌가 왔다 갔다 했지만 결국 한 시간을 전기장판 속에서 자고 일어났더니 남은 것은 알맞은 실내 온도와 배고픔뿐이었다. 배가 고프면 먹는다는 단순한 명제를 바탕으로 무슨 맛인지 모를 음식을 입에 밀어 넣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내가 꾸준히 다니던 크로스핏 체육관에 안 간지도 한참이 지났다. 엄마 장례식에 조의금을 보냈던 체육관 대표가 보고 싶으니 어서 나오라고 연락을 주었지만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최근에 먹은 거라고는 누룽지 죽에 몇 번 씹으면 사라지는 과자 정도가 전부였고 이 상태로 운동을 간다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멀쩡할 때도 식사를 거르면 운동을 가지 않았었는데 지금 가서 또 누구 장례 치를 일 있나 싶었다. 가끔 식욕이 돌아와서 밥을 챙겨 먹다가도 다시 입맛이 떨어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반복되었다.
혼자 조용히 누워있는 날이 많아지고 적막한 원룸에 소리를 만들기 위해서 의미 없이 TV를 켰다. 엄마가 집에서 하루 종일 TV를 켜놓고 생활했듯이 나도 엄마를 닮아 TV를 하루 종일 켜놓는 습관이 있었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연극 홍보 영상을 보는데, 엄마가 한 번쯤은 가보고 싶다고 했던 장윤정 콘서트에 못 가본 게 미안했다. 가족들이 다 같이 제주도에 갈 때도 나만 연차를 못 써서 빠진 적이 있었고 엄마 상태가 좀 나아지면 엄마와 마음이 잘 맞아 한 번 더 만나고 싶다고 했던 작가님이 계시는 군산에 가자고 했었는데 그 말을 하고 한 달도 안 되어서 엄마는 갔다. 모든 것이 후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