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
엄마집에서 볼일을 보고 나 혼자 사는 원룸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려고 물을 틀었더니 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에 입술이 따끔거렸다. 엄마집에 있는 동안 거울도 한번 제대로 보지 않았더니 입술이 부르터서 피가 배겨나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이제서야 그게 눈에 들어왔다.
뭔지 모르게 바리바리 싸온 짐 정리를 하는데 언니가 챙겨준 죽과 누룽지가 거의 한박스였다. 말로는 '내가 잘 안 먹어서 주는거야' 라고 했지만 입맛 없어 하는 내가 그나마 먹는 것이 죽이어서 일부러 챙겨준 건 아닐까 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안그래도 작은 원룸에 여기저기 틈을 찾아 누룽지와 죽을 쟁여 넣었다.
엄마집에서 챙겨온 식물의 씨앗과 상토를 꺼냈다. 설 연휴에 갔을 때 엄마 건강이 괜찮아지면 새로 심어보라고 내가 주고 왔던 것들이었다. '이거는 있으면 쓰지'라고 했던 엄마의 한마디가 나에게는 어떤 희망같은 것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한달만에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얼마전 선물받은 미니해바라기를 심어볼까. 이것저것 꺼내어 보았지만 지금 당장 뭔가 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계속 입에 무언가를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몇시간 전까지 음식이라고는 제대로 먹지도 못하던 사람이 맞는지 이상할 정도로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채워지지 않았다. 기온이 영상 14도라고 하는데 나는 계속 춥고 몸이 떨렸다. 보일러를 한껏 올려 실내 온도가 23도가 되었는데도 계속 추웠다. 전기장판에 열을 올리고 두꺼운 겨울이불을 덮었다. 그리고 한시간을 꼬박 잤다. 엄마집에 가면 원래 잘 잤었는데, 생각하고보니 지난 5일간 엄마집에서 제대로 잔 적이 없었다. 아마 장례식장에서부터 나의 불면은 계속 되었던 것 같다. 밥 대신 평소 먹지 않던 술을 마셔서인지 염증이 심해졌고 건드리면 쓰라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