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나 Jul 11. 2024

"말"의 무거움

첫 번째 항암 치료 과정을 모두 끝낸 후 몇 년이 지났을 무렵.

난 그렇게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처음 암 진단을 받은 후부터 다시 평온한 일상을 찾았던 그 무렵까지 내가 경험했던 감정의 요동,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 극복해 냈으며 일상으로 어떻게 돌아올 수 있었는지 등등. 나의 경험담이 지금 막 암 진단을 받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그야말로 치기 어린 생각으로 똘똘 뭉쳐있었다.

이런 마음으로 유방암 환자 커뮤니티에 호기롭게 가입했는데, 몇 개의 글을 보고 난 후 내가 얼마나 건방진 생각을 했던 것인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물론 내 개인적으로 보면 서른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유방암을 진단받고 치료 과정을 버텨낸 것이 큰일일 수 있겠으나, 객관적으로 보면 유방암 1기 정도는 전체 환자들이 모여 있는 그곳에서는 힘들다고 말하기가 무안할 수 있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많은 글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내가 이만큼 힘들었는데 지금 이렇게 극복해서 잘 지내고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해보려면 적어도 3기 이상은 되어야 가능하겠구나. 나 정도 수준의 병기로는 그런 말들을 해봤자 무게감도 없을뿐더러 자칫 잘못하면 좀 우스워 보일 수도 있겠구나.

그래서 가입했던 커뮤니티를 조용히 탈퇴했었다. 내 이야기는 굳이 이곳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란 생각과 함께.




2022년 하반기.

첫 번째 암 진단을 받았던 그 시절 림프 전이 하나 없이 1기 진단을 받았던 나는 느닷없는 원발암의 뼈전이로 인하여 유방암 4기 환자가 되었다. 이제 내 세상은 다 끝났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 어느 한 구석에서는 '이제는 내 이야기를 해도 전혀 멋쩍지 않을 수 있겠다'라는 실소 터지는 생각이 함께 들었다. 1기로 시작했지만 10년도 훨씬 더 지난 후에 뼈전이로 인한 4기 확정. 치료의 목표는 완치가 아닌 연명. 고로 죽을 때까지 치료를 받아야 하는 처지. 뭐 하나 드라마틱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소재는 완벽했고, 이제는 당당히(?) 글 쓸 일만 남았다는 생각으로 다시 유방암 환자 커뮤니티에 가입을 했다. 병원을 다녀올 때마다 글을 썼었고, 같은 아픔을 겪는 이들로부터 위로와 응원도 많이 받았다. '이 정도 기수인 사람도 이렇게 잘 살고 있다'는 것을 글로써 보여주면 지금 마음이 힘든 사람들도 위로를 얻고 힘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맹랑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누군가가 쓴 글을 읽으며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 드는 것을 감지하게 됐다. 이러저러한 증상이 있어 전이가 된 것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아니어서 너무 다행이라는 내용의 글이었다. 커뮤니티 내에서는 그야말로 평범하면서도 많은 류의 글이었는데 대체 난 왜 이 글을 읽으며 기분이 다운되는 것일까. 내가 아직 투병 생활에 대해서 마음을 제대로 잡지 못한 탓에 마음속에서 무언가 엉킨 것일까. 전이가 되지 않은 것은 정말 다행이긴 한데, 이 글을 나 같은 전이 환자들도 본다고 생각한다면 이렇게까지 격하게 표현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정리가 되지는 않지만 마음속에 일어나는 복잡한 감정들을 하나하나 가라앉히던 중 머리를 치고 지나가는 생각 하나.


내가 쓴 글 중에는 그런 내용이 없나?




사람은 누구나 본인이 겪고 있는 일들이 가장 드라마틱하다고 생각하며 산다. 특히 나처럼 이런 상황이면 더더욱.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돌아보지 못하는 함정에 빠지고 만다. '어차피 지금 내 상황이 이만큼 힘드니 조금 무례한 감이 있어도 어지간하면 이해해주지 않겠어?'와 같은 다소 뻔뻔한 생각에 기대어 말이지.

생각을 다시 잘해보면, 유방암 4기인 나는 물론 중한 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맞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가엾게 여기진 않는다. 가족이 아닌 이상 무조건적인 동정심을 기대할 수는 없다. (심지어 가족이라고 해도 내가 죽는 날까지 내 삶을 비관하며 찡찡거리고 있다면 받아주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같은 4기라고 해도 현재 치료약이 잘 듣지 않아 힘든 사람들은 나 같은 사람들이 "치료약이 잘 듣고 있어서 다행이에요"라는 말을 해맑게 하는 것을 들으면 머리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 저 깊은 곳 어느 한 구석에서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여러 복잡한 감정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질 수도 있다. 마치 내가 "전이가 아니었어요"라는 글을 읽었을 때처럼 말이다.


커뮤니티에 썼던 글들을 돌아보니, 역시나 누군가의 마음을 어지럽힐만한 글들이 꽤 있었다. 만약 글을 썼던 곳이 유방암 환자들이 모여 있는 커뮤니티가 아니었다면 아무 상관없었겠지만 다양한 증상을 가진 환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올리는 글이라면 좀 더 주의를 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그제야 선명히 들었다. 역시... 겪어보기 전에는 알지 못하는구만 여전히.


그래서 요즘은 말을 하기 전에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타고나기를 생각 많게 태어난 사람이라 생각은 이미 차고 넘치게 많이 하는 사람인데 이제는 거기에 더 얹어서 생각할 것들이 많아진 셈이다. 의식적으로 행하지 않으면 여전히 와라라라~ 말을 뱉어놓고는 뒤늦게 '아.. 그 말은 하지 말 걸..' 하며 후회하기를 반복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알고 있으면서 후회하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정말 괜찮은 말들을 지금보다 좀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옛 현인들이 왜 '말이 무겁다'라고 했는지를 절감하는 요즘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품격과 품위를 지킨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