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정기검사를 위해 병원에 갔다.
병원을 가면서 긴장을 아예 안 한다면 그건 정말 새빨간 거짓말이겠지만, 앞으로 나의 남은 삶에서 병원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동반자인데 매번 긴장하고 예민해지면 내가 가장 힘들어지므로 요즘은 꽤나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을 가고 있다. (게다가 지금은 나의 검사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거대한 이슈가 있다 보니 더더욱. 이 이야기는 향후 다시 하기로.)
병원을 자주 다니다 보니 이제 병원이 돌아가는 시스템 중 내가 자주 이용하는 것들은 거의 기계적으로 챡챡챡- 진행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나. 특히나 어제처럼 정기적으로 받고 있는 검사의 경우 설명을 해주는 그들의 멘트를 내가 외울 지경이 되었다.
동선과 시간의 낭비 없이 순서를 밟고 있는 내가 어쩐지 조금 자랑스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헛웃음이 픽 터지기도 한다. 이 와중에도 효율을 따지며 흥겨워하고 있다니.
이쯤에서 내가 2개월마다 하고 있는 검사와 그 과정을 잠깐 언급해 보자면, 정기 검사는 CT 촬영 검사와 뼈스캔 검사를 하는데 이 검사들이 스케줄을 어떻게 짜느냐에 따라 병원 대기 시간이 무한으로 늘어날 수도, 후다닥 하고 빠르게 끝날 수도 있다.
먼저, 뼈스캔 검사는 방사성 약물을 주사로 맞은 후 2~3시간 뒤에 촬영을 하기 때문에 반드시 대기 시간이 발생한다. 그리고 CT 촬영 검사는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라면 조영제 투여를 위해서 혈관 라인을 잡고 나면 바로 검사를 할 수 있지만, 나는 몇 해 전 느닷없이 조영제 알레르기가 생기는 바람에 CT 촬영(정확히는 조영제 투여) 1시간 전에 반드시 알레르기 예방 주사를 맞아야 한다.
병원에 넘치는 환자만큼이나 검사 스케줄이 늘 빡빡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대로 검사 시간을 잡을 수는 없어서 예약을 잡을 당시에는 거의 매번 극악의 일정표를 받게 되는데, 예약을 어떻게 잡아두더라도 진료실 담당 간호사 선생님이 귀신같이 기막힌 타이밍으로 예약 시간을 늘 조정해 주신다.(진심 대박 최고!)
어제 나의 검사 예약은
1. 14:25 - 뼈스캔 검사
2. 15:20 - CT 촬영 검사
로 잡혀 있었는데, 위에서 언급한 검사 과정에 따라 나는
1. 13:40 - CT 촬영 접수
2. 14:20 - CT 촬영 관련 조영제 투여 라인 잡기 완료
3. 14:25 - 뼈스캔 검사 관련 약물 주사
4. 15:20 - CT 촬영 검사 (15~20분 소요)
5. 17:00 - 뼈스캔 검사 (8~10분 소요)
로 다니면 중간에 쓸데없이 남는 시간 거의 없이 차르륵- 하며 검사를 끝낼 수 있었다.
다시 봐도 진짜 시간표 예술이다. 항상 기막히게 일정 조정해 주시는 간호사 선생님 진심 정말 최고시다.
이쯤에서 또 하나 나의 이야기를 하자면, 현재 나의 팔은 혈관 찾기가 꽤 쉽지 않은 상태다.
요즘은 케모포트처럼 항암 주사를 좀 더 쉽게 맞을 수 있게 하는 것들이 있어서 최대한 혈관을 덜 괴롭히는 편인데, 내가 처음 항암을 했던 10년도 더 지난 그 시절에는 그런 게 없었다. 사실 이런 이슈가 아니었어도 태생이 혈관 찾기가 쉽지 않은 팔이었는데 항암을 하는 동안 혈관들이 있는 대로 고생을 한 덕분에 지금 나의 팔에서 찾을 수 있는 혈관들은 딱딱해져 있거나 꼭꼭 숨어 있어서 간호사 선생님과 나 모두를 괴롭히고 있다.
그리고... 이왕이면 최대한 주사를 적게 맞고 싶은 것이 지금의 내 마음이다. 조영제 투여를 위한 라인을 잡아놓은 상태에서 뼈스캔 검사를 하러 가면 그 라인으로 주사를 맞을 수 있기 때문에 주사 바늘에 찔리는 과정 하나를 생략할 수 있는데, 이것만 해도 나는 너무 행복하다. (아마 날 찔러야 하는 간호사 선생님 입장에서도 내가 라인을 달고 나타나면 몹시 행복하실 것이다.)
시간에 맞춰 CT 촬영 접수를 하러 갔는데, 접수하는 직원이 대뜸 "다음 검사하시러 가는 시간까지 CT 라인 못 잡으실 것 같으니 핵의학과 가셔서 뼈스캔 주사부터 먼저 맞고 오셔라"라고 말했다.
순간 머리가 살짝 멍했다. 내가 시간을 간당간당하게 온 것도 아니고 대기자가 많은 것도 아닌데 왜 안된다는 걸까. 이렇게 되니 13:40분에 접수하려고 했던 나를 14:00까지 기다리라고 했던 그 직원에게 원망의 마음이 살짝 일었다. 분명히 CT 촬영 1시간 전에 전처치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몇 번을 말했었는데!!
병원에서는 될 수 있으면 분쟁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가급적 그들이 시키는 대로(?) 행하는 편인 나이지만, 이 직원이 말하는 대로 움직이면 모든 일정이 다 엉킬 것 같은 생각과 더불어 주사를 두 번 맞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강력하게 일어서 이야기를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두 번째 이유가 좀 더 컸다.)
위에서 언급했던 나의 상황과 사정들을 찬찬히 잘 설명하며 CT 접수를 해달라 요청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직원은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지 않고 있었다. 급기야는 핵의학과가 바로 옆에 있다는 말까지 나에게 하며 말이지.
내가 이 병원을 다닌 역사가 어쩌면 지금 내 앞 접수대에 앉아 있는 이 직원보다 더 길 수도 있는데, 심지어 내가 자주 다니는 동선은 최단 거리까지 꿰고 다니는 난데 설마 핵의학과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내가 본인에게 똥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한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어 마음이 답답해졌다. 이럴 시간에 얼른 접수해 주는 것이 서로를 위해 더 좋은 일일 것 같은데.
아무리 설명을 해도 듣지 않고 "CT 전처치 시간이 오래 걸리면 뼈스캔 주사를 제시간에 못 맞을 수 있어서 그런다"는 주장을 하는 직원에게 "그럼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제가 CT 촬영하는 시간도 예약 시간보다 늦어진다는 말씀이신가요?"라고 물으니 그건 아니란다.
그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됐다.
이 직원은 접수 당시 내가 이야기했던 "CT 촬영 1시간 전에 반드시 해야 하는 전처치가 있다"라는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들었어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을 수도 있고.
만약 이 직원이 전처치 시간이 늦어짐에 따라 CT 촬영 시간도 늦어질 수 있다고 했으면 검사 관련 시간들이 전체적으로 뒤로 좀 밀리는가 보다 생각하며 한 번 더 찔리는 게 몹시 싫어도 뼈스캔 주사를 맞으러 갔었겠지만, 실제 검사 시간은 예약 시간에 맞춰 할 수 있다고 하면 이 직원이 이야기하는 것에 시간 오류가 발생하는 건데 이 직원은 그 이야기를 하면서도 뭐가 잘못된 것인지를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자기 앞에서 제 주장을 꺾지 않는 이 자를 보내려면 이 자가 이야기하는 대로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는지 상한 기분을 역력히 드러내며 접수를 해줬다.
아마 그 직원 입장에서 나는 소위 진상 환자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실제로 내가 접수를 기다리고, 또 검사를 기다리는 동안 접수대에서는 크고 작은 실랑이가 쉴 새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같은 말을 계속하게 만드는 분, 검사일자를 착각하고 오신 분 등등 내가 봐도 접수대에 계신 직원들 일하기 참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사람 상대하는 일이 가장 힘든 일이긴 하니.
하지만 어제 내가 이야기하던 톤과 애티튜드는 진상을 부리기 위한 그것은 결코 아니었다. 어쩌면 사정에 훨씬 가까웠을 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줄 여유가 없었던 직원의 응대 방식이 참 아쉬웠다.
그렇지만 어제 그 상황에서 나는 목소리를 높이지도, 표정을 구기지도 않았다. 더 정확하게는 그러지 않으려고 매우 노력했다. 최대한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내 사정을 이야기했다. 부디 나의 어려움을 헤아려주기를 바라면서.
분명 몇 년 전의 나였다면 어제 내가 했던 것과는 다르게 행동했을 것이다. 말발로 누구에게 지는 스타일은 아닌 데다가 각 잡고 본격적으로 얼굴에 험한 표정 띄우면 함부로 말 붙이기 어려울 정도의 기본 스탯을 장착한 사람인지라 어제 제대로 입씨름을 했다면 분명 어제 그 직원 혼을 쏙 빼놨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난 완벽한 진상 환자로 그들의 기억 속에 오래오래 남았겠지.)
예전과 같은 못난 성격을 표출하지 않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데 "내가 내뱉는 말에 나의 품격과 품위가 묻어 나온다"는 말을 염두에 두고 사는 것이 가장 크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나의 존중을 받을만한 수준의 사람들은 당연히 아니겠지만, 사람을 가려서 누군가에게는 매너를 갖춘 모습을, 또 누군가에게는 쌈닭 같은 모습을 보인다면 나는 과연 괜찮은 사람이 맞는 것일까에 대한 근원적인 고찰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방법이 매번 '싸움'으로 귀결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도.
어제의 상황을 보더라도 약간의 어려움이 있긴 했지만 굳이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도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었다. 또한, 성질을 부리고 나면 그 뒤에 찾아오는 부끄러움이 늘 있었는데 어제는 스스로를 돌아봤을 때 어제의 상황 속에서 당당했고 부끄러움이 없었으니 난 어제 나의 품격과 품위를 잃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을 하고 행동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자연스레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순기능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화내는 것은 습관"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몸소 느끼는 요즘이다.
어릴 때부터 넌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늘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을 했었다. 세상이 내 발 밑에 있는 것처럼 살던 시절에는 누군가와의 싸움에서 치열하게 옳고 그름을 다퉈서 이겨야지만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다소 지는 듯하더라도 다툼 없이 평화롭게 상황을 조율하고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멋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때때로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을 도저히 누르지 못할 것 같을 때는 차라리 입을 꽉 다물고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 것이 대거리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현명하며 나의 품격과 품위를 지키기에 아주 좋은 방법임을 이제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굉장히 높은 확률로, 내가 나의 품격과 품위를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는 모든 생각과 행위는 내가 자연스럽게 이길 수 있는 방향으로 나를 데려다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