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흰다 May 08. 2020

스타트업 마케터, 영국 워홀을 결심하다

왜 경력을 다 버리고 워홀을 가게 되었는지

"급 요청드립니다."


 나는 그날도 오후 11시에 사무실에 남아 내가 가장 많이 쓰는 문장으로 이메일을 쓰고 있었다. 스타트업 마케팅 팀에서 일한 지 꼬박 2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경력이 쌓여가면서 간헐적으로 느끼는 뿌듯함은 역류성 식도염으로 망가진 몸, 밥 먹듯이 하는 야근의 고됨에 비할 것이 못되었다. 육체와 함께 미처 퇴근해버리지 못한 '경영진이 급하게 시켜서 나도 하는 건데 왜 내가 급 요청으로 욕을 먹어야 하는가', '프로모션 콘셉트는 또 뭘로 잡아야 하나' 등과 같은 생각들과 함께 퇴근을 하다 마침내 집에 도착해서 내 작은 원룸의 현관문을 열었다. 야근을 핑계로 돌보지 못해서 발 디딜 틈도 없이 난장판이 된 집을 보며 이렇게 살기는 싫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날 나는 영국으로 워킹 홀리데이를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워홀을 결심하자마자 우주가 '한국에 남을 생각은 정녕 없는 거니'라고 마지막 제안을 건네는 것처럼 재미있는 일들이 연달아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항상 하고 싶었던 브랜드 마케팅으로 팀 발령이 나서 TV광고를 준비하게 되었고, 항상 일해보고 싶었던 SM엔터테인먼트 마케팅 팀 서류를 합격했다. 항상 바라 왔던 기회들이었고, 영국 워홀에 가게 되면 처하게 될 내 위치와 비교가 되기 시작했다. 한국에 남게 된다면 마케터로서 계속 경력을 쌓고 승승장구까지는 아니겠지만 여태까지 쌓아왔던 것들이 물거품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반면에 영국에 간다면 영어도 완벽하게 못하는 내가 기껏 해봤자 카페에서 일하게 되겠지, 그리고 만약 그렇게 2년을 보내고 돌아오면 한국 나이로 서른이 되게 된다. 사회에서 나를 낙오자로 보지 않을까, 재취업을 할 수는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러웠을 때 친구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줬다. 약간의 스포일러를 덧붙이자면, 이 이야기에는 '영국인 요정'이 등장한다.


 우리 동네가 너도 알다시피 그렇게 핫한 동네는 아니잖아. 골목에 빌라만 많고 완전 주거 지역이거든. 그런데 얼마 전에 말도 안 되는 힙한 바가 생긴 거야. 그래서 나도 모르게 홀린 듯이 혼자 들어가서 술을 마시게 됐어. 알고 보니 사장님은 불후의 명곡에도 나온 뮤지컬 배우였어. 취미로 바를 하신다고 하더라고. 나는 분위기도 좋아서 사장님이랑 얘기를 하면서 술을 홀짝이고 있는데, 갑자기 한국에서 뮤지컬 연출자로 일하고 있는 영국인이 들어왔어. 그렇게 우리는 통성명만 겨우 한 상태로 삶의 방향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어.
 너도 영국으로 가고, 아는 사람은 YG에 PR 담당자로 갑자기 이직하질 않나 다들 자기의 방향으로 열심히 달려가고 있잖아. 그 와중에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진짜 내가 원하는 일인지 모르겠고, 이 쳇바퀴를 탈출하려고 내린 결정이 옳은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그 사람한테 푸념 섞인 고민을 늘어놓았어. 그러니까 그 사람이 딱 그러더라.
"예진 씨, 삶의 목표를 너무 높게 잡지 마세요. 이루지 못할 목표를 이루지 못했을 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추진력을 다 잃고 주저앉게 돼요. 너무 높은 목표는 이루지 못하는 게 사실 당연한 건데 말이죠. 너무 삶을 아등바등 살지 말고, 편안히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는 것도 필요해요. 제가 보기에는 예진 씨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고, 앞으로 잘 될 거예요. 걱정 말아요."
 나 이 말 듣고, 집에서 자기 전에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엄청 울었잖아 하하하. 완전 다 맞는 말이더라고. 웃긴 건 뭔 줄 알아? 헤어질 때 전화번호를 교환하지 않아서 그 사람을 다음에 찾으려고 해 봤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영국인이 유창한 한국말로 낯선 곳에서 홀연히 교훈을 주고 사라지다니. 아마 진짜 요정이 아니었을까?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워홀을 가서 카페에서 일하는 것을 실패라고 무심코 정의하고 있고, 마음속으로는 은근히 사무직 일자리를 잡고 싶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영어권 국가에서 사무직 일자리를 얻는다는 것은 당연히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인데, 천천히 행복해지기 위해서 간 곳에서 힘든 목표만을 향해 달려가면서 피폐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사는 것과 다를 것이 없을 테니까. 그래서 아래와 같이 여러 목표를 설정해두고, 한 단계씩 올라갈 때마다 나 자신에게 무한 칭찬을 해주기로 했다. 그렇다면 카페에서 일을 하게 될지라도 실패한 워홀이 되는 게 아니라 가장 낮은 단계의 목표를 달성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실제로 워홀 가기 전에 세웠던 목표들. 아래로 갈수록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이다.

- 패션 브랜드 shop assistant
- 러쉬, 포트넘 앤 메이슨 같은 내가 좋아하는 소비재 브랜드 shop assistant
- 런던 던전, 마담투쏘 같은 Attraction Staff
- 한국인 여행사 가이드
- 한인 대기업 회사 사무직
- 영국 & 글로벌 회사 인턴
- 영국 스타트업 인턴
- Tate 혹은 기타 갤러리 인턴
- 영국 & 글로벌 회사 사무직

   

이 목표와 함께 일기에 '직업의 귀천이 어딨냐, 나는 고급인력이기 때문에 내가 그 일을 하게 된 순간부터 그 직업 자체가 고급 직업이 된다'라는 말을 적으며 앞으로 닥칠 시련과 역경에 대한 마음 준비를 했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스럽게도 험난한 여정들이 나의 앞을 기다리고 있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