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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희오 Oct 27. 2024

오늘 퇴근하고 죽을까

나의 조울증에 쥐약인 건 갈등관계다. 공평하게도, 관계갈등으로 삶 전체가 흔들리는 건 유병자만 겪는 일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세상 대다수 괴로움은 거기서 온다. 내 조울증의 경우 유전적 요인과 성적 트라우마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관계에서 받은 상처로 발현됐지만 병 자체로 인해 다시 관계가 어려워지는 이 굴레를 뭐라 할까. 한해 한해 투병생활을 거듭할수록 자살사고의 무게는 가벼워졌다. 그건 나뿐 아니라 나의 반복된 자살시도를 목격한 주변인들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며, 지극히 내 입장에서 확실히 죽음은 가벼워졌다. 죽음을 가볍게 받아들인다는 건 동시에 삶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직장에서의 일진이 좋지 않았던 날에는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오늘 저녁메뉴를 고민하는 사람처럼


'오늘 퇴근하고 죽을까?'


소박하지만 알찬 저녁메뉴와 그에 필요한 식재료를 한창 떠올리고, 막상 집에 들어오고 나서는 가장 빨리 도착하는 배달음식을 주문하는 식으로 오늘의 나는 죽지 않는다. 공장에서 하루 9시간 이상 몸을 쓰고 퇴근길 셔틀버스 문가 자리에 앉으면 기진맥진해지는 경우가 많아서 일하는 동안 들었던 생각은 온데간데 찾을 수 없다. 단지 죽음에 대해 이만치 가벼워진 나를 자각할 뿐이다.


근무 도중 자살사고가 들기 시작한 건 첫 대학 휴학기 때였다. 좋아하는 장소에서 일하면 재밌을 것 같아서 1시간이 훌쩍 넘는 출퇴근시간을 감당하며 경기도에서 서울로 나갔다. 그때 광화문 교보문고는 리모델링을 앞두고 기존 서가를 비우는 데 단기 인력을 투입했고, 나는 두세 달 짧은 기간만이라도 그곳에 속하고 싶었다. 그해 나는 이십대 초반의 대학 신입생 딱지를 막 떼어낸 휴학생이었는데 생애 첫 해외배낭여행을 위한 비용 마련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식사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딱 8시간을 국내에서 가장 큰 대형서점에서 지냈다. 그것만으로도 며칠은 벅찼던 것 같다. 하지만 곧 천장에 달린 수많은 상들리에가 내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리는 상상이 들기 시작했다. 직장에서 처음 겪은 자살사고는 '죽고 싶다'가 아니라 '죽을 것 같다'였다.


이후로 비슷한 생각이 들 때마다 무엇이 문제인지 모른 채 속수무책으로 휘둘렸다. 번번이 나를 죽일 것 같은 근무환경에서 도망쳤다. 살아야 했으니까. 하지만 항상 죽을 것 같았던 건 아니다. 업무에서 자신의 유능함을 발견하는 순간에는 기뻤고 동료들과 무탈히 지낼 때면 내가 아주 다 나은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크든 작든 고비는 언제나 찾아왔다. 지금 일하고 있는 공장에서도 우울과 무력감을 느낄 때가 있었고 오래 참은 그것들은 분노로 발산될 때도 있었다. 다행인 건 현장에서 나와 먼 산을 바라보며 내지르는 식으로 조절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사실 내가 일 자체로 받는 스트레스는 많지 않다. 몸을 써서 땀이 나면 더운가보다 웃어넘겼고 모르는 일은 곧잘 물어보고 시키는 그대로 하면 됐으니까. 냉방시설 하나 없는 창고에서 일을 도울 때도 일하고 있다는 감각이 뿌듯했다. 체내수분을 모두 배출하고 나면 더이상 땀이 나지 않는다는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됐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대인관계가 어렵다. 내가 오늘 퇴근하고 죽을까 생각하는 것은 그러므로 여전히 사람 때문이다. 타인 때문에 내 인생을 저버리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계산에 맞지 않는 일인지 알아도 자살사고 그 자체가 떠오르는 걸 억누를 필요는 없다. 떠오르는 자멸적 생각은 공을 토스하는 식으로 다른 방향으로 던져 보낸다. 거기에는 몇 가지 요령이 있는데 나는 주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나 영화에 대입한다. 가령 이런 것이다.


내가 지금 단순히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죽인 뒤 재소 중 교화를 위해 직업훈련을 받고 있는 거라면? 이런 식으로 스토리텔링을 하기 시작하면 유독 길게 느껴지는 오전 근무시간도 후딱 지나간다. 점심밥을 먹어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오후에 나는 일제시대에 강제징용당한 조선사람이 된다. 이런 생각을 했노라 떠들고 나면 나의 입사동기 Y는 사실 자신이 서민체험 중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렇게 한바탕 하루가 지난다. 하지만 단순반복된 작업에서 새어나오는 소음들이 음악의 그것과 닮아 있다는 사실은 나 혼자만의 비밀로 남겨두었다. 영화 <어둠 속의 댄서>에서 눈이 멀어가는 비요크가 바라본 공장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설명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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