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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호 Jun 03. 2024

막사와 오징어볶음

지난 주말엔 하루종일 날씨가 흐렸다. 그래서인지 괜히 몸이 찌뿌둥하고 마음까지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오전에 간단히 청소를 하고 하루종일 거실 소파에서 뒹굴거렸다. 주말에는 집안일할 것도 많은데 오랜만에 빈둥거려 보았다. 그래도 머릿속은 복잡했다. '이불빨래도 해야 하는데, 주방 싱크대도 정리해야 하는데, 아니, 걷기라도 해야 하는데...' 


이런저런 할 일 거리를 생각하지만 여전히 몸은 소파에 붙어 지냈다. 넷플렉스도 들락날락하고 티브이 채널도 돌려보고 휴대폰도 만지작거리다 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저녁 무렵 큰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서로 한 주간 있었던 일들과 주말 지낸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아이는 샤워를 하고 나와서 치킨에 맥주 한 캔 하고 잘 거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 말에 문득 생각났다. '그래, 나에게도 막걸리가 있었지!' 


우연히 참여한 막걸리 만들기 수업에서 건져 올린 나의 막걸리가 김치냉장고에 한 병이 남아있었다. 모두 4병을 만들었는데 한 병은 막걸리 거르는 날 기념으로 마시고 두 병은 지인에게 선물하고 마지막 한 병이 김냉에서 숨쉬고 있었다.


막걸리 안주로 뭘 만들까 고민하며 냉장고를 열으니 뜻밖의 오징어를 발견했다. 전날 마트에서 생오징어 두 마리를 만원에 사다 놓은 것이 있었다. '막걸리 안주로 오징어볶음을 만들어야지.' 생각만으로도 식욕이 돋고 의욕이 살아나고 삶의 애정도 다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오징어를 꺼내 손질하고 오징어볶음에 들어갈 야채도 준비한다. 오징어의 야채친구로 오늘은 양배추와 양파 그리고 애호박이 당첨됐다. 팬을 불에 올리고 올리브유를 두르고 오징어를 먼저 볶는다. 다진 마늘도 함께 넣어서 말이다. 양념으로는 간장과 고춧가루, 꿀과 올리고당을 넣고 다 함께 휘리릭 볶기 시작한다. 벌써 맛있는 냄새가 진동한다. 어느 정도 오징어가 익으면 야채를 모두 털어 넣는다. '치직!' 프라이팬의 경쾌한 소리에 더 신이 난다. 대파도 넣고 들기름도 두르고 통깨도 뿌려준다. 인덕션 불을 켜고 15분 만에 막걸리 안주가 완성되었다.


근사한 투명 와인잔에 막걸리와 사이다를 반반 넣어 막사를 만들고 오징어볶음 안주를 곁들였다. 술을 자주 즐기지는 않지만 내 삶에서 술은 작은 위안이 되기도 한다. "크!" 한잔에 살맛나는 인생이 되기도 한다. 오늘이라는 힘든 일상의 무게를 잘 이겨내 준 나에게 막사는 작은 숨구멍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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