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편견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by 히세

너무 기대가 많았던 것일까,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난 후 내 느낌은 너무 당연한 전개와 결말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이는 내가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고 느끼는 놀라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나는 내가 놓친 부분이 무엇일지 생각했다.


주인공인 그레고르의 행동은 시종일관 선했다. 그는 지독한 업무 스트레스를 감내하면서 온 가족의 생계를 기꺼이 책임졌다. 해충으로 변한 뒤에도 항상 가족들을 배려한다. 그가 가족들에게 한 가장 공격적인 행동은 기껏해야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지키기 위해 액자 위에 달라붙어 있다가 그 모습을 어머니에게 들킨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변화된 모습이 해충이기 때문에 그의 평범한 행동조차 가족들에게 혐오를 불러일으킨다. 만약 그레고르의 변화된 모습이 그저 팔다리를 잃은 장애인이었다면 그토록 선한 그레고르가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었을까? 그가 장애인이 되었다면 가족에게 미치는 물질적인 피해는 오히려 더 컸을 것이다. 그냥 방안에 가둬두는 대신 병원비까지 지출해야 했을 테니까. 따라서 그레고르의 변신은 -많은 독자가 평하듯이- 단순히 쓸모없어짐이 아니다. 해충은 해롭다는 편견, 이런 당연하고 보편적인 믿음 때문에 단순히 그레고르의 신체를 드러내는 일조차 가족들에게는 피해가 된다. 그레고르의 존재가 밝혀지자, 하숙인들은 이를 이용하려 한다. 하숙인들이 그레고르의 존재를 알고 피해 보상을 청구하겠다고 했을 때 그레고르의 가족들이 반박하지 못한 이유는 가족들과 하숙인들 모두 해충은 해롭다는 믿음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해충(그레고르)이 죽자, 그레고르의 아버지는 당당하게 하숙인들을 쫓아낸다.


이렇게 소설에 대한 해석이 정리되자, 카프카가 실제로 사회적 편견에 시달렸는지 궁금해졌다. 예상대로 카프카는 유대인에 대한 편견 속에 살았고, 이로 인한 정체성 혼란과 불편함이 그의 일기와 편지 속에 남아있었다. 소설에서 그레고르에 대한 혐오가 해충으로 변신하는 즉시 시작되었고, 소설 말미에 묘사하듯이, 가족들이 꽤 좋은 직업과 경제적 전망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가족들이 입은 실질적 손해는 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레고르에 대한 혐오가 지속된다는 점에서 나는 카프카의 변신을 쓸모없음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나는 쓸모있음을 긍정한다. 현재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 즉 끊임없이 더 나아가고자 하는 욕구가 인류의 기아를 극복하고(현재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과식으로 인한 사망자가 영양실조로 인한 사망자보다 많다) 범죄와 전쟁을 줄였다(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유럽의 역사는 전쟁 그 자체였다). 쓸모있음은 소위 이런 ‘진보’에 기여하는 것이다. 물론, 사랑은 쓸모를 넘어선다. 나 역시 사랑을 쓸모보다 더 궁극적인 가치로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쓸모가 부정적인 개념이 될 필요는 없다. 편견도 일면 유용하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의사결정을 해야 하고 편견, 즉 일정한 형태의 믿음은 의사결정의 효율을 높인다. 개인의 삶은 유한하고 인간의 인지능력은 매우 제한적이므로, 진실만을 근거로 의사결정 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믿음 없이 인간은 살 수 없고 편견은 믿음의 한 종류이다. 둘은 근거가 부실하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럼,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다수의 이익에 어긋나고 어느 한쪽에 심각한 손해를 끼치면 편견이고 그렇지 않으면 믿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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