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곳에서는 새로운 경험과 생각을 한다.

by 히세

그는 내가 독일로 이주하면서 처음 만난 독일인 친구였다. 대화가 매우 잘 통했고, 따라서 나는 그 친구와 좋은 사이가 될 거라고 기대했다. 그 친구는 자신의 아파트에 방 하나를 내게 렌트해 주었고, 마침 숙소 구하기에 쩔쩔 매고 있던 나는 기쁘게 그 친구의 아파트로 이사했다. 물론 장기로 머물 아파트를 찾기 전까지 주소등록을 하기 위한 일시적인 거주였다. 독일 장기체류자는 법적으로 2주 이내에 주소등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기쁘게 그의 아파트로 이사했지만, 내가 너무 순진했음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의 아파트는 이민자들이 많다는 이유로 뮌헨 시내 근교에서 제일 싼 지역이었는데, 그는 가장 작은 10평짜리 방 하나를 내주면서 전체 아파트 렌털 및 물, 전기 등의 전체 비용의 절반을 요구했다. 사실 처음 그가 아파트를 위해 자신이 지불하는 돈의 절반을 요구했을 때 나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친구라고 생각했으니 가격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같이 살아보니 그가 생각하는 친구와 내가 생각하는 친구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게임을 좋아해서 새벽까지 게임을 자주 했는데, 게임을 할 때면 항상 신나서 소리를 질렀다. 나는 소음에 민감하지 않은 편이어서 그 자체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가 내가 사용하는 로봇진공청소기 소음을 걱정할 만큼 다른 사람의 소음에는 민감하다는 점이었다. 그는 나의 요리(소시지 굽기) 냄새에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자신의 요리 냄새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소시지를 굽기 위해 그의 올리브오일을 1/50 가량 사용했는데, 그걸 빌미로 나에게 새로운 올리브 오일을 사라고 요구했다. 내가 그와 함께 자주 마시는 차를 위해 레몬 1개와 생강 1/4를 사용하자 내게 새로운 걸 사라고 요구했다. 이런 일이 있고 나니 자신이 사용하는 개인공간의 크기와 내가 사용하는 개인공간의 크기는 2.5배 이상 차이나지만 나에게 동일한 렌트비를 요구했던 그의 행동 역시 다르게 해석됐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제안한 렌트비가 완전히 타당한 가격이고, 그 자신은 불쌍한 이민자에게 방을 내준 아주 너그러운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3개월 동안 머무른 후에 아파트에서 나가려고 하자 불같이 화를 내며 나의 인스타 계정을 차단했다. 그렇다. 그는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나의 십 대 시절 멘털,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30년 전 내가 어떻게 그 불행한 피해의식에서 빠져나왔는지 되새겼다. 당시 나는 아주 억울한 아이였는데, 그런 억울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래 고민한 끝에 아주 간단한 진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아무 이유 없이 나에게만 특별히 나쁘게 대할 확률이 매우 낮다는 점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나 자신의 문제를 찾아내는 것에 몰두했다. 나의 악함과 나약함을 알게 됐고, 깊은 컴플랙스에 빠졌다. 이 컴플랙스는 꽤 심각해서 나는 한 줄짜리 모의 수학능력 검사 질문조차 한 번에 이해할 수 없었고, 이 컴플랙스를 극복하는데 대략 20년이 걸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게 과연 효율적인 방법이었는가 싶기도 하다. 진실을 마주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20년을 컴플랙스에 시달리는 게 나을까, 아니면 그저 남 탓과 정신승리로 나의 자존감을 지켜내는 게 나을까.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처럼 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내가 잘 아는 성공 케이스는 나 하나뿐이지 않은가. 다른 사람들은 그 나름의 해결책이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나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매우 좁은 인간관계속에서 살아왔다. 내가 개인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은 거의 대학친구들이었고, 새로운 친구는 오직 회사동료들 뿐이었다. 회사는 채용이라는 필터로 곱게 걸러진 사람들만 남는 조직이다. 그러다 해외 이직과 함께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 노출됐고, 오랫동안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비록 새로운 경험을 통해 좋은 친구를 찾지는 못했지만,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그 친구로부터 내가 증오했던 나의 모습을 되새기는 대신 너그럽고 선한 의지로 그 친구에게 대화를 시도했다면 어땠을까. 그 친구도 험난한 세상에서 컴플랙스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켜내려고 노력하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왜 나는 그토록 그의 모습을 미워했던 걸까. 아직도 수십 년 전 컴플랙스에 대한 상처가 남아서일까. 왜 나는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을 가엽게 보듯이 그의 나약함을 가엽게 보지 못한 걸까. 그의 생물학적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민건 아닐까.


새로운 경험과 생각에 대한 기대가 떠오른다. 어쩌면 그 친구 덕분에 내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뇌의 특정 부분을 사용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유쾌하지만은 않을지라도 새로운 경험이 나를 더 나은 길로, 어쩌면 아주 좋은 길로 이끌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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