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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서 Apr 28. 2022

당신을 지켜요

여행산문. 여행에세이

숙소의 호스트도 이번 달이 이상기후라고 했다. 도착한 지 2주일이 넘었는데 하루도 맑은 날이 없었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을 떠올리면 나는 당연히 햇살과 노란빛을 떠올리는데, 포루투는 그런 내 기대를 보기 좋게 무너뜨렸다. 푸르고 흐린 물방울 속에서 갇혀 지내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일단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가까운 곳 중에 지금 현재 제일 햇빛이 많고 따뜻한 데가 어디인가 찾아보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카나리아 제도의 테네리페가 나왔다. 그곳은 맑은 날이 연일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이미 선지급한 숙박 요금을 포기하더라도 거길 갔다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테네리페는 스페인령이다. 포루투에서 멀지 않은데도 마드리드로 갔다가 거기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가는 경유 항공권 밖에 없었다. 직항으로 몇 시간도 안 걸릴 거리를 편도 25시간 걸려 가야 한다니. 그래서 나는 카나리아 제도와 이웃한 섬, 마데이라를 선택했다. 일기 예보로는 테네리페 보다는 흐린 날이 며칠 더 있을 것 같았지만 대체로 맑고 비는 오지 않았다. 게다가 마데이라는 포르투갈 령이기 때문에 포루투에서 로칼 에어라인이 운항 중인 곳이었다. 서울에서 제주도 가는 마음으로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상 정보로는 마데이라에서 2주일만 있다가 다시 돌아오면 그때는 포르투도 날씨가 좀 맑아질 것으로 예보하고 있었다. 포루투는 전기 사정이 안 좋은지 그날 밤 라디에이터를 켰더니 집 전체가 정전이 되어버렸다. 호스트는 잠들었는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아무래도 날씨 때문에 이른 체크아웃을 해야겠다고 양해 바란다며 문자를 보내 놓고 추운 밤을 보냈다.


하루라도 빨리 마데이라로 가고 싶었다. 운 좋게 다음 날 출발하는 표를 구매한 덕에 나는 다음 날 아침 포르투 공항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일찍 나와서 공항의 분위기를 즐겼다. 포루투 공항은 작기 때문에 한적한 자리를 찾는 건 힘들었지만 북적이는 공항 커피숍 구석에서 커피 향을 맡으며 있는 것만으로도 비에 지친 마음이 조금씩 회복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건 커피 향 때문이 아니라 주머니 속에 있는 여권과 항공권 때문인지도 모른다. 탑승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오랜만에 이메일을 확인하고 긴 비가 오는 동안 메모했던 것들을 정리했다.

예상대로 마데이라행 비행기는 소형 항공기였다. 작은 것에는 큰 것에서 느끼는 것과는 또 다른 설렘이 있다. 다른 승객들도 나와 같은 마음인지 표정이 밝았다. 나는 그들이 비 내리는 포루투를 탈출하는 동지 같다고 생각했다. 비행기에서 내 옆에 앉은 사람은 턱수염이 멋진 포르투갈 남자였다. 그는 동양인이 혼자 마데이라에 가는 걸 처음 본 듯, 내게 마데이라에는 왜 가느냐고 물었다. "포루투에 온 지 이주일이 지났는데 매일 비가 왔어요. 더는 맑은 날을 기다리기 힘들어서 해가 있는 곳을 찾아가는 겁니다." 그는 충분히 이해하겠다는 듯 환하게 웃으면서 좋은 선택이라고 해주었다. 그는 자신은 서핑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가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 마데이라에서 국제 서핑 대회가 열리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서퍼인 그가 너무 멋있어 보였다. 우린 승무원이 준 주스를 들고 건배를 했다. 서퍼들은 어떻게 생활을 유지하는 걸까. 궁금했지만 우린 날씨와 섬 이야기만 했고, 검은 조약돌 같은 그의 눈동자를 보면 그냥 아무 말도 더하고 싶지도 않았다.


창밖으로 멀리 섬들이 보였다. 조금만 더 가면 아프리카 대륙이라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때 기체가 많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예전에도 이렇게 작은 항공기를 타면 심하게 요동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놀라지는 않았다. 단지 롤러코스터가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 때문에 심장이 뛰었다. 승무원들은 능숙하게 승객들을 미소로 진정시켜주었고 곧이어 기장의 기내방송이 들렸다. "현재 마데이라 공항에 바람이 많이 불어서 착륙이 불가합니다. 그러므로 본 항공기는 포루투 공항으로 회항하겠습니다." 나는 그 상황에서 기장의 목소리가 차분하다는 것에 놀랐는데 심지어 기내의 승객들도 누구 하나 큰소리로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사람이 없었다. 눈앞에 마데이라를 두고 돌아간다니. 나는 당황해서 옆자리의 서퍼를 바라보았다. 서퍼는 피식 웃으면서 어깨를 들썩거렸다. "당신 서핑 대회는 어쩌죠?" 그에게 묻자 그는 괜찮다며 내일 와도 참가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이런 회항은 흔한 일이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마데이라는 조종사들이 선정한 세계에서 제일 위험한 공항 10위 안에 들어있는 곳이었다. 마데이라는 작은 섬이다 보니 절벽을 깎고 활주로를 이어 붙여서 공항을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길이가 짧고 좁아서 자칫 잘못하면 옆에 충돌하는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공항은 바람이야말로 최대의 적인 것이다. 바람이 많이 부는 울릉도도 공항이 생기면 비슷한 회항 사태가 많지 않을까 생각했다. 우리를 태운 기장도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회항하는 걸 선택한 것이다. 포루투에 돌아온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의연하게 보이려 노력했다. 당황하고 궁금한 게 많았지만 옆자리 서퍼처럼 자연스럽게 가방을 들고 비행기를 빠져나왔다.     


난 이미 포르투 숙소를 체크아웃했기 때문에 포르투 시내의 호텔을 급히 잡아야 했다. 호텔에서 하루를 자고 다시 마데이라행에 도전하기로 했다. 다음 날, 포르투 공항에 도착하니 어제보다는 바람이 잦아든 것 같았다. 비행기에 탑승하러 가는데 이동하는 수하물 카트 위에 서핑보드가 실려있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를 태운 비행기는 마데이라 상공에서 잠깐 요동쳤지만 이내 안정적으로 활주로로 진입했다. 쿠쿵! 기체가 잠깐 튀었다가 활주로를 긁는 바퀴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승객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모두 즐겁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누군가는 휘파람을 불었다. 난 왠지 나도 동참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소심하게 박수를 쳤다. 창밖으로 햇살 가득한 마데이라의 언덕이 펼쳐져 있었다. 이렇게 위험한 착륙인데도 겁을 내지 않고 웃으며 손뼉 치는 그들을 보며, 이곳 사람들에게 포루투와 마데이라를 오고 가는 항공기는 그냥 버스 같은 것이구나,라고 생각했다. 난 어리숙한 여행자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건지 그들처럼 손뼉 치고 그들처럼 아무렇지 않게 공항을 빠져나왔다.


마데이라의 숙소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조용해서 좋았고, 눈길이 닿는 곳에 있는 정물들이 모두 자신들 만의 존재감이 있었다. 난 그런 정물을 좋아한다. 협탁, 화병, 액자 같은 고요하게 제자리에 있는 것들이 아름답다. 정물은 식물과는 달리 견고하다. 단단한 매력이 있다. 주위와 어울리면서도 그 자체만의 힘이 느껴진다. 나는 그런 정물을 바라보는 걸 즐긴다. 정물을 가만히 관찰하고 있으면 움직이지 않는 정물 사이에도 대기가 흐르고 이야기가 내린다. 또 하나의 넓은 세상으로 들어가는 걸 느끼는 것이다.

한참을 거실에 앉아 햇살과 그림자가 맺히는 정물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난 흡족한 마음을 안고 오후의 거리로 나왔다. 혹시라도 서핑 대회를 하는 모습이 보일까 싶어서 해변으로 걸었지만 서핑 대회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다른 동네에서 하는 것 같았다. 조금 걷다가 테라스가 좋아 보이는 카페를 찾았다. 오랜만에 보는 햇빛이 여기저기에서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나는 작은 에스프레소 잔을 손에 쥐고 부서지는 햇살을 보고 있었다. 커피잔의 온기가 내 손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난 그 잔이 마음에 들었다. 단단하고 매끄러운 그것이 햇빛에 데워진 돌 같았다. 언제부턴가 나는 그렇게 단단한 것에 매료된다.


견고하고 단단한 느낌이 좋은 건 보통의 삶이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단단한 건 주변에 섞이지 않는다. 견고하면 자신의 모습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인생이란 그런 사람이 아니면서 그런 사람인 척 사는 일인지, 우리는 상대방은 이런 말을 좋아할 거라며 자기 생각과는 다른 말을 건네고, 저들은 대중이니까 이런 글은 좋아하지 않을 거라며 쓰기 싫은 이야기를 쓴다. 실패에 길들여져서 세상과 타협하며, 일단은 살아야 하니까 자신의 가치관에 맞지 않는데도 남들처럼 웃는다. 그렇게 살다 보면 내가 하는 말이 진정 나의 언어인지, 나는 나의 언어로 세상에 얘기하고 있는지 자신도 모를 때가 많다. 승진해야 하니까 부장님께 맞추고, 투자자가 원한다고 하니 작품이 안 좋아질 걸 알면서도 얼마든지 시나리오를 고친다. 음악에 정말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흥행에 필요하다며 컬래버레이션을 하고, 책으로 자기만의 이야기를 할 생각은 시도조차 않고 남의 말부터 먼저 빌려온다. 심지어 그 많은 행동들이 다 스스로 진정 원해서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흔들리지 않고 싶은데 세상은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나를 위한다는 수많은 주위의 소리들은 과연 걱정일까 방해일까. 우리에겐 흔들리지 않을 자유가 없었던 게 아닐까.


한 잔 더 주문한 커피가 내 앞에 놓이는 모습이 작은 비행기가 착륙하는 것 같았다. 나는 문득 오래전 캘커타에서 방콕으로 향하던 부탄 에어라인이 생각났다. 그때 나는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소형 항공기를 처음 타 보았다. 작은 비행기인 만큼 기류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때마다 함께 탄 인도인들은 놀이기구를 탄 것처럼 소리 질렀다. 그리고 방콕에 도착했을 때는 기내의 모든 승객들이 박수를 쳤다. 처음 보는 이질적인 광경이었고 난 기내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그들이 경박하다고 생각했다. 인도인들은 극장에서도 영화 속 주인공이 악당을 물리치면 박수를 친다. 나는 그들이 영화관에서 박수를 치는 것이 아직 선진 문화가 몸에 베지 않아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제 마데이라 공항에 착륙하던 비행기에서의 박수는 왜 그때처럼 느끼지 않았던 걸까. 나는 어제의 기내 박수가 안전하게 착륙한 기장에게 보내는 감사의 메시지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난 이제야 오래전 인도인들 앞에서 고상한 척했던 스스로를 창피해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길들여졌다. 어울리지 않는 껍질을 쓰고 다닌 것이다. 분명히 내 안에 있는 나만이 진짜 나라는 걸 알면서도, 다른 사람만 만나면 그들처럼 행동하고 훈련받은 남의 언어를 말하는 것이다. 난 온전히 백 퍼센트 나의 생각을 백 퍼센트 나의 언어로 말하고 싶은데, 다른 사람들은 자기의 말을 하는 것보다 다른 이의 말을 빌어오는 게 더 좋을까. 아마도 그들도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오랜 시간 훈련받은 언어에 길들여진 것 아닐까.

여행은 나에게 남을 위한 옷을 벗고 다닐 수 있게 해 준다. 나의 여행과, 나의 고독과, 나의 단절은 나를 지켜준다. 아직은 기억하는 나의 언어를 잊지 않도록, 가까스로 지켜 온 나의 자유가 허물어지지 않도록. 다행인 건 나는 나의 언어를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인은 물론 동양인은 전혀 보이지 않는 바다 위 작은 섬에 있는 동안 나는 전혀 외롭거나 심심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맞출 필요 없고, 누구도 나를 방해하지 않는 이 섬이 나를 지켜주는 커다란 성 같았다. 숙소로 돌아와 카페에서 메모를 했던 영수증을 꺼내놓았다. 영수증 뒷면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섬은 외롭다고 바다를 건너지 않는다. 그러니까 당신도 당신을 지켜요."


/ 글, 사진. 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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