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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성 Feb 14. 2023

오늘, 돌아오지 않는 날

붉은돼지(Porco Rosso, 1992) 리뷰

그랬었지...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린 적이 있는가. 흔히들 명작은 그 전개와 결말을 알고서도 다시 찾게 한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에 무엇이 맞다 아니다 할 수는 없다. 나의 명작의 기준 중 하나는 음악으로 이로 인해 '붉은돼지'를 보게 되었고 눈물 흘린 이 영화를 명작이라 생각하여 리뷰를 쓰게 되었다.


 리뷰의 제목 '돌아오지 않는 날'은 주인공의 테마곡으로 영화를 보게 된 이유이며, 첫 문장인 '그랬었지...'는 엔딩곡인 '가끔은 옛날이야기를'의 가사 중 한 소절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눈물을 흘리게 만든 음악이다.


좋은 녀석들은 모두 죽지
애국채권을 사서 국가에 공헌하라는 은행원의 말에 대한 '포르코'의 대답

 주인공 ‘마르코(모리야마 슈이치로 / 김관철)'는 17살이라는 어린 나이부터 비행정을 몰기 시작했으며, '베를리니'를 포함하여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친구들과 같이 조종사로 군에 입대했다. 군에서도 '마르코'는 발군의 실력으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공군의 에이스 파일럿으로 활약한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어느 날이었다. 정찰 임무를 수행 중이던 '마르코'와 '베를리니'의 편대는 적 공군과 마주치게 되었고 곧 전투를 벌인다. 전투는 '마르코'를 제외한 아군과 적의 기체들이 마구 격추될 정도로 치열했고 어느덧 아군기는 전부 격추되어 버린다.


 아군을 신경 쓸 겨를이 없던 '마르코'는 세 기의 적에게 쫓기게 된다. 죽어라 도망치던 중 손발이 저려올 정도로 지치며 '이젠 끝이다' 생각하고 의식을 잃게 된 찰나,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며 마치 빛 속과도 같은 구름 한가운데에서 눈을 뜬다.


 '마르코'는 조종할 기력도 없이 지쳐있었지만 비행정은 마치 스스로 움직이듯 날아갔고 어느덧 구름 위로 떠오르게 된다. 거기서 '마르코'는 높은 곳에서 마치 은하수와 같이 흘러가는 이상한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본다.

'포르코'의 과거 회상 장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르코'의 비행정 옆으로 방금 격렬한 전투를 치렀던 비행정들이 날아오르더니 이내 '베를리니'가 몰고 있는 비행정도 떠오르게 된다. '마르코'는 안도 섞인 목소리로 '베를리니'에게 소리치지만 '베를리니'는 '마르코'의 말을 무시한 채로 계속 위로 갈 뿐이었다.


 이에 '마르코'는 '베를리니'에게 '지나'는 어쩔 거냐며 차라리 자신이 가겠다고 외치며 비행정을 몰아보려 하지만 정상적으로 조종이 되지 않았고, 끝내 '베를리니'는 주위의 비행정들과 함께 위에서 흐르던 이상한 구름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이내 말을 듣지 않던 '마르코'의 비행정은 구름 아래로 내려갔고, 정신을 차려보니 '마르코'는 아슬아슬하게 수면 위를 혼자 날고 있었다. 훗날 마르코가 회상하기를 조금만 더 밑으로 내려갔더라면 죽을지도 모르는 그런 높이를 날고 있었다.


 이후 전쟁에서 돌아온 '포르코'는 원인 불명의 마법에 걸려 돼지로 변한 채 파시즘에 미친 조국에 실망하여 지중해 어딘 가에 아지트를 차리고 자신의 적색 비행기를 몰아 공적(공중해적)과 싸우며 현상금을 사냥하는 '현상금 사냥꾼'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포르코'의 니보드(knee-board). 조종사는 니보드에서 비행에 관련된 정보를 참고한다.

또 한 명의 여자를 불행하게 만들 셈인가요?
'체리가 익어갈 무렵'을 부르는 지나

 호텔 아드리아노의 주인 '지나(카토 토키코 / 차명화)'는 뛰어난 미모와 가창력의 소유자로 성품도 온화하여 호텔 아드리아노의 모든 손님은 물론이고 공적들까지도 '호텔 50km 반경에서는 싸우지 않는다'며 '지나'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된다. 특히 그녀가 노래를 부를 때면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로 오직 그녀의 목소리에 집중한다.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은 ‘지나’지만 그녀는 세 번의 결혼에서 모두 남편을 잃은 아픔이 있다. 지나는 '포르코'와 함께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베를리니'를 포함하여 파일럿들과 세 번이나 결혼했는데 그들 모두 하늘에서 죽어버렸다.


'지나'는 '포르코'를 잡기 위해 고용된 미국 파일럿 '도널드 커티스(오오츠카 아키오 / 오세홍)'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 청혼을 했을 때도 세 번에 결혼 끝에 모두 사망한 파일럿 남편 이야기를 하며 그의 청혼을 거절한다.


 그런 '지나'에게 있어 오랜 친구이자 늘 그녀를 찾아와 주는 '포르코'는 소중하고 고마운 존재다. 그녀는 물심양면으로 그를 돕는 한편, 비행정을 몰며 현상금 사냥꾼으로 살아가는 '포르코'가 자신의 전 남편들처럼 떠날까봐 두려워한다.

어릴 적 '마르코'와 '지나'와 친구들

 언젠가 ‘커티스’가 비행정을 정비하러 가던 '포르코'의 비행정을 격추시킨 뒤 '지나'를 찾아와 다시 청혼을 했을 때, 그녀는 내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을 떠날 수 없다고 말한다. 자신과 내기를 하고 있는 '그 사람'이 해가 떠 있을 때 이곳에 온다면 그를 사랑할 것이라는 내기를.


 그 순간 호텔 아드리아노의 하늘 위로 붉은 비행정이 날아왔다. 그것은 '커티스'와 전투를 벌인 뒤 '포르코'가 '피콜로 영감(카츠라 산시 / 이재명)'과 그의 손녀 '피오(오카무라 아케미 / 은영선)'의 손으로 새로 만든 비행정으로 '포르코'는 하늘을 몇 바퀴 돌다가 날아가고 지나는 또 내기에서 졌다며 아쉬워한다. 그리고 내기를 하는 '그 사람'이 '포르코'냐고 묻는 '커티스'에 질문에 화를 낸다.


 시간이 지나 공적들의 협박에 반강제로 '포르코'가 '커티스'와 '피오'를 걸고 내기로 결투를 벌일 때였다. 두 사람은 막상막하의 승부를 펼치다 '커티스'는 탄약이 바닥나고 '포르코'는 기관총이 고장나며 이내 비행정의 잡동사니를 던지며 싸운다. 끝내는 비행정에서 내려 바다 위에서 주먹다짐을 하고 서로에게 동시에 일격을 가한 둘은 나란히 기절하게 된다.


 그때 포르코의 옛 공군 동료 '페라린'에게 이탈리아 공군이 그리로 가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온 ‘지나’가 ‘포르코’를 향해 '또 한 명의 여자를 불행하게 할 건가요'라고 물었고, 그 소리를 들은 '포르코'가 일어나 승부에서 이기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기절한 포르코에게 말하는 지나

히사이시 조 / 출처 : 지니뮤직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은 특유의 그림체와 마음이 따뜻해지는 줄거리로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지브리 작품이 많은 사랑을 받는 또 하나의 이유는 '히사이시 조'가 맡은 음악이다. 그는 1984년부터 지브리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하며 '인생의 회전목마(하울의 움직이는 성)', ‘바다가 보이는 마을(마녀 배달부 키키)’ 등 여러 곡을 작곡했고, 이 곡들은 작품만큼이나 유명해져 작품은 보지 않았어도 음악은 들어본 사람이 제법 될 정도다.


 '붉은돼지'를 보게 된 계기도 히사이시 조의 음악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듣던 지브리 피아노 모음에서 어릴 적 어렴풋이 영화의 제목만 알고 있던 '붉은돼지'의 '돌아오지 않는 날들'이 흘러나왔고 음악에 빠져 영화를 보게 되었다. '돌아오지 않는 날들' 역시 '히사이시 조'가 작곡한 곡이며, 작중 '포르코'의 테마곡으로 작품의 그의 심리와 어우러지며 작품의 깊이와 여운을 더한다.


 그 여운은 삶에 녹아들었다. 이 영화를 본 시기는 명작을 정하는 이유만큼이나 다양한 이유로 힘들던 때였는데, 한창 장마철이 지나고 강변을 따라 지브리 피아노 모음을 들으며 걷고 있었다. 구름과 산 사이에 뜬 해가 강을 비추는 풍경이 아름다워서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었다. 마침 '돌아오지 않는 날들'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정말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 순간의 풍경과 음악은 힘들었던 이유가 다 잊혀질 정도로 황홀감을 선사했다.


 황홀감 속에 문득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언젠가 본 영상에서 "모든 고민의 끝은 '왜 사는가'에 귀결된다"라고 하던데 '나는 왜 살지?'라고. 그리고 정말 그 순간만큼은 질문에 대한 답이 분명했다. '이러려고 사는구나.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음악을 듣기 위해 살 수도 있겠구나. 여러 가지 사는 이유가 있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러려고 사는구나'. 


 물론 그 순간은 음악의 길이와 같은 5분이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고, 집으로 돌아갈 즈음에는 해가 져서 다시는 못 볼 풍경이 되었다. 다만 그 느낌은 계속되었고 집에 도착해서 음악을 계속 들어보며 '돌아오지 않는 날들'의 의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음악의 제목은 분명 과거를 말하는 것이지만 그날의 나에게는 조금 다른 의미였다. 아니 다른 의미어야만 했다.

  '지나'의 성우이자 싱어송라이터 '카토 토키코'는 그녀가 맡은 배역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녀가 곧 '지나'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영화 같은 삶을 살아서인지 작중 그녀의 연기와 노래는 달리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감동이 있다.


 그녀가 주는 감동은 엔딩 크레딧에 맞춰 흘러나오는 영화의 주제곡 '가끔은 옛날이야기를'을 통해 폭발한다. 이 곡은 그녀가 만든 곡으로 격동하는 시대를 겪으며 살아간 '카토 토키코' 본인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녀는 잔잔한 피아노 반주에 맞춰 이야기하듯 노래하는데, 가난했지만 희망을 품었던 시절에 대한 회상을 담담하게 노래하며 힘들었던 시절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말한다.


 노랫말 중 '그랬었지...'라는 노랫말에는 참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힘들었던 옛날을 돌아보며 '그랬었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행복했던 날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왜 사람은 힘들었던 과거도 '그랬었지' 하며 그리워하게 될까.


 너무도 당연하지만 그 이유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속성 때문이 아닐까. 좋은 의미는 아니지만 '과거미화'라는 말도 있듯이 시간이 지나 돌아갈 수 없는 날들은 아름다워 보인다. 힘들었던 날도 돌아보니 행복했던 이유가 한 가지쯤은 보이고 행복했던 날의 행복은 배가 되어 커 보이지만 두 번 다시는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날의 나에게는 이 노래를 듣고 나서의 감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무언가 더 나아간 감상이 필요했다. 힘든 시간에 대해 '그랬었지...'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치지 않고, '힘든 이 순간도 언젠가는 그랬었지라고 말할 수 있다면 오늘을 살아갈 때 조금은 다른 태도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인터넷 커뮤니티 캡처

 언젠가 이 영화를 볼 때쯤에 우연히 인터넷에서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막연하게 '아 항상 좋았구나'하며 이런 것에서라도 힘을 얻고 싶은, 항상 좋지는 않았음을 알았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위안을 받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 글 밑에 달린 댓글에는 이런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환상을 깨버리는 댓글이 적혀있었다. '뭐야 갈수록 안 좋아진다는 뜻이잖아'. 초등학교 때보다 못한 중학교 때를 고등학생이 그리워하고 중학교 때보다 못한 고등학생 때을 대학생이 그리워하니 갈수록 안 좋아졌음에도 '과거미화를 하는 사람의 본성 때문에 그냥 좋았구나 하는 것'이라는 것이 댓글의 의도였다.


 무엇이 사실이던 상관은 없지만 당시 내 생각은 '좋았던 옛날이 있었으니 오늘 또한 좋지 않겠어? 오늘 또한 옛날이 될 테고 미래에서 봤을 때는 그때가 좋았지' 하게 될 테니 오늘은 분명 좋은 것이야 라고 생각하며 작더라도 한 가지 행복한 것을 찾으려고 했다. 그때 본 영화가 붉은돼지였다. 그리고 한 가지 깨닫게 된 것은 굳이 행복한 것을 찾으려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오늘 안에서 작더라도 행복한 것을 하나 정도는 찾자' 했지만, 이제는 '오늘 안에서'가 아니라 '오늘'을 바라보게 되었다. 행복하던 힘들던 언젠가 돌아오지 않을 오늘이, 돌아봤을 때 '그때가 좋았지' 할 오늘 그 자체가 작은 행복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정확하게는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노력한다는 말도 사실은 무언가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려고 할 뿐이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겁니다'와 같은 무한긍정은 아니다. 분명 때로는 부정적인 순간도 있고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순간도 있기 마련이다. 또 사실 영화 한 편 본다고 무언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오늘도 '그때가 좋았지' 하며 과거를 그리워하다 보면 미래에 대한 불안이 엄습한다.


 다만 주위에 달라진 것은 없지만 나 자신은 조금 변화했다. 과거를 그리워하고 미래를 두려워하는 오늘을 느끼다며 보면 '불안한 미래가 오늘이 된 날이 온다면 그때는 돌아갈 수 없는 날이 된 오늘을 되돌아보며 그때가 좋았지' 생각할 것이다. 그리움과 불안 속에 역설적으로 '오늘'을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 그 자체라는 행복을.


 혹시 오늘 눈물을 흘리고 있다면 그 이유가 어찌 되었건 한번쯤 이 영화의 음악을 들어보기를 권한다. 물론 그 감상은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에 무엇이 맞다 아니다 할 수는 없다. 다만 행복하던 힘들던 언젠가 돌아오지 않는 날이 될 오늘을 조금은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음악을 듣는 당신의 오늘이 조금은 더 아름답기를. 언젠가 다시 찾게 될 우리의 오늘이 명작이기를. 더 나아가서는 오늘이 명작이 아니더라도 명작으로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며.



* 돌아오지 않는 날들 - https://www.youtube.com/watch?v=BEXBLeM9xkM

** 가끔은 옛날이야기를 - https://www.youtube.com/watch?v=7sZI-V6kW6M

*** 카토 토키코에 관한 내용 참고 - https://blog.naver.com/bldeimos/222045199971

**** 여담으로 영화의 에필로그에서 '지나'와 '포르코'의 내기 결과를 추측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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