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가 화요일에 다하지 못한 마지막 이야기
올해 여름 친할머니를 거의 10년 만에 뵈었습니다.
친할머니는 제가 초등학생 시절 할아버지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습니다. 할머니가 한국에 도착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히 퇴근하여 어머니댁을 향했습니다. 문을 열고 두 팔을 벌려 밝게 맞아주시는 할머니의 모습은 제 기억 속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완전히 새하얘진 머리칼과 굽은 등, 세월의 무게만큼 내려앉은 주름진 얼굴을 보니 가슴 한켠이 뻐근하고 뭉클해졌습니다. 비록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할머니의 변한 모습이 그동안 타지에서 얼마나 외로운 시간을 보내셨을지 반추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까요?
그제야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6살 조카가 어머니를 할머니라고 부르고, 아버지를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있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동안 제가 무심해서였는지, 결혼을 하고 전처럼 많이 뵙지 못해서였는지 모르지만 분명 어머니, 아버지도 할머니가 그러셨듯 무심하고 잔인한 세월과 싸워내고 계실 겁니다.
늙는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모든 사람이 겪어야 할 자연의 순리입니다. 긴 인생을 짧은 하루로 묘사하자면 할머니는 어두운 밤 언저리에 있으실 것이고, 어머니와 아버지도 점점 어둑어둑 해 지는 시간에 서 계실 것입니다. 저 또한 아직 해는 떠있지만 슬슬 노을이 지는 것을 대비해야 하는 어디 즈음에 있겠지요.
이렇게 생각하면 저 또한 밝은 곳에 있다가 어둠 속에 갇히는 것을 무서워하는 어린아이가 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경험적으로 나이가 들면서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비로소 밤이 되어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녁이 되어야 우리는 퇴근할 수 있고, 밤이 되어야 정말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며 따뜻한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마음 편히 친구들과 술을 한잔 할 수도 있지요. 혹은 운동을 하거나, 독서를 하거나, 보고 싶었던 드라마를 정주행 할 수 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캄캄한 밤이 되어야만 하늘에 뜨는 아름다운 밝은 별과 달을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잠든 밤이 되면 시끄럽고 정신없었던 낮에는 들을 수 없었던 풀벌레 소리와 새벽 내음을 만끽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저 슬프고 무기력하고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서 인생을 하루로 비유할 때, 밤이 되어야만 우리는 온전한 자기 자신과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노후는 독특한 제약과 기회가 있는 특별한 성장기이다. 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기간이기도 하다. 진심으로 원한다면 노후에 큰 변화를 이룰 수 있다. 어떤 이들에게 늙어가는 과정은 괴로운 변화의 연속이다. 당연시했던 것들이 산산조각 난다. 나이 드는 일에 놀라거나 창피해하거나 위축되거나 두려워하며 거기에만 정신 팔려 있거나 세상이 이미 정한 정체성을 못 견디면 '웰 에이징'에 집중하기 어렵다. 반대로 늙는다는 것을 잘 받아들여 도발적인 기회로 본다면 노화의 문제들을 좋은 사람이 되는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
- <이토록 멋진 인생이라니>, 모리 슈워츠 -
하지만 우리 모두 처음 사는 인생입니다. 모든 순간이 처음이기에 우린 매번 서툽니다. 그래서 실수하고 다치면서 성장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인생을 배우는 학생처럼 앞으로의 삶에 대해 미리 공부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헤매게 되고, 헤매게 되면 소중한 시간들을 낭비하게 되며 다치지 않아도 되는 것에 상처를 입거나 더 멋지고 황홀한 순간을 놓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10대에는 <20대에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 20대에는 <30대에 알았으면 좋았을 것들>, 30대에는 <마흔이 되기 전에> 등등의 연륜 있는 인생 선배들이 쓴 책들을 읽었습니다. 이처럼 인생의 선배들이 알려주는 연륜 있는 경험과 생각들은 막막한 망망대해의 등대처럼 나아가야 할 길을 밝게 비춰줍니다. 하지만 '노년기'의 삶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딱히 생각해 본 적도, 공부해 본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는 와중 출판사로부터 신간 <이토록 멋진 인생이라니>라는 책을 선물 받았습니다. 이 책은 '웰 에이징', 다시 말해 '노년의 삶'에 대한 내용입니다. 책을 읽으며 제가 미처 알지 못했던 노년기의 삶에 대해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책을 덮으며 비로소 미지의 세계이고 그저 두려움에 대상이었던 나이 듦에 대하여 조금은 더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이토록 멋진 인생이라니>라는 책의 저자 '모리 슈워츠'는 브랜다이스 대학교의 사회학과 교수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라는 책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미 아실지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모리 슈워츠는 1995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지금은 2023년인데 세상을 하직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이 책이 출간된 이유가요. 사실 이 책은 그의 아들 롭 슈워츠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모리 슈워츠의 서재를 정리하다가 서랍 구석에서 발견한 원고들을 모아서 편집하여 세상에 나오게 된 책입니다. 이 책은 모리 슈워츠가 노년기를 보내면서 '어떻게 해야 행복한 노후를 보낼 수 있는지', '노년기가 되어서도 끊임없이 성장하는 방법'에 대하여 스스로 깨달은 내용을 글로 정리해 놓은 원고입니다. 원고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이 모리 슈워츠가 직접 쓴 소개글이 담겨있습니다.
"40년간 사회학 교수로 지내며 축적한 사회학과 심리학 지식,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를 근거로 삼았다. 또 친구들, 동료들과 대화하면서 알게 된 바를 근거로 삼았다. 내 직업인 고령자 상담과 노화 관련 심리치료를 근거로 삼았다. 노화를 다룬 대중서와 학술서를 꾸준히 검토하고 고령자들의 자서전을 읽었으며, 이와 함께 내 노화를 고찰하고 70대로 접어드는 경험을 반영했다."
- <이토록 멋진 인생이라니>, 모리 슈워츠 -
이 책의 전반부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무기력한 노년기의 삶을 새로운 기회와 성장의 단계로 올려놓고 새로운 관점으로 재조명합니다. 그러면서 현실적으로 맞닥뜨리는 다양한 노년의 문제들을 이야기합니다. 주로 고독과 외로움, 인간관계, 건강 등(이 책에서는 '이슈'라고 지칭합니다.)을 다각도로 조망합니다. 중반부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해 다양한 사례를 통해 현실적인 방법론을 제시합니다.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는 노년기를 단순히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인생의 정리단계'가 아닌 '새롭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학과 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은 인류 그 어느 때보다 길어졌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결국 노년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길어질 것입니다. 어떤 노후를 보낼 것인가에 대해서도 우리는 미리 공부해야 합니다. 이 책을 읽으며 결국 노년기의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실천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이는 머릿속에, 마음의 태도에 자리한다.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잠재성 실현이다.
우리는 잠재성을 충분히 갖고 있으면서도 잘 모른다.
- <그로잉 영>, 애슐리 몬터규 -
사실 저는 아직 젊기에(?) 이 책의 내용이 피부에 직접 와닿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노후의 삶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노년기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마인드셋은 미리 준비하고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가슴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당장 나의 부모님, 조부모님 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노인분들의 삶을 이해하는 반경이 훨씬 넓어지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을 부모님께 선물하려고 합니다. 어머니, 아버지도 처음 맞이하는 노년입니다. 그래서 이 책이 노년의 삶을 보다 풍성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한 '선택'을 하시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이 드네요. 부모님이 노년기의 중턱에서 "이토록 멋진 인생이라니!"라고 감탄하시는 삶을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나이 듦에 대한 지혜로운 고찰이 담긴 문구로 글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늙는 방법을 아는 것은 지혜의 걸작이며, 삶이라는 위대한 예술에서 가장 까다로운 장이다.
- <아미엘의 일기>, 앙리 프게데릭 아미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