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작가다> 공모전_직업은 회사원, 취미는 글쓰기입니다
나의 직업은 평범한 회사원이다.
그리고 취미는 글쓰기다.
나는 작년 여름부터 브런치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현재 약 600명의 구독자, 25만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한 달 전부터는 블로그도 운영하기 시작하여 약 9천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쟁쟁한 작가님들과 비교했을 때 한없이 미약한 수준이지만, 현재까지 내 글을 읽어준 사람이 약 26만 명이 된다는 사실은 개인적으로 대단히 뿌듯하다.
이제 와서 솔직하게 말하자면 취미가 직업이 되기를 남몰래 바라던 적도 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학년이 바뀔 때마다 담임선생님께서는 인적사항 기록부를 나누어 주시며 새로 작성하여 제출하라고 하셨었다. 그 종이에는 늘 장래희망을 쓰는 칸이 있었는데, 나는 언제든 지워낼 수 있도록 연필로 '작가'를 썼다가 이내 지우기를 몇 번씩 반복했다. 그리고는 결국 남들처럼 '변호사', '교수' 등을 펜으로 써서 제출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당시, 남들에게 꿈이 '작가'라고 말하면 대부분 반응은 두 가지 중 하나였다.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글로 밥 벌어먹고 살기엔 어렵지 않겠니?"라고 말해주거나, 코웃음 섞인 목소리로 "네가? 야, 그냥 꿈깨!"라고 말해주거나. 적당히 친하지만 약간의 거리가 있는 지인들은 전자의 반응이었고, 오랫동안 내 옆을 지켜준 막역한 친구 놈들은 하나같이 후자의 반응이었다.
물론 소수의 사람들은 나의 꿈을 진심으로 응원한다고 격려해주기도 했다. 대부분 나를 잘 모르거나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랬다.
하지만 응원과 격려보다는 앞서 말한 두 가지 반응이 뇌리에 깊게 박혔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꿈을 가슴 한편에 묻어둔 채 잊고 지냈다.
그렇게 나의 첫 시작은 사실상 시작도 못해본 채 내 손으로 끝을 내버렸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은 말합니다. 의술, 법률, 사업, 기술, 이 모두 고귀한 일이고 생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이지만, 시, 아름다움, 낭만, 사랑, 이런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라고. 듣기엔 꽤 멋진 말이지만, 아등바등 살아도 모자란 판에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면서 잊고 지냈을 겁니다. 그땐 다들 청춘이었으니까요.
- <시를 잊은 그대에게>, 정재찬, p5 -
대학에 진학했다. 전공은 글쓰기와 전혀 상관없는 경제학과. 하루 종일 복잡한 수식과 통계, 그래프로 멘탈이 난도질당했다. 그래도 취업을 하려면 상경계를 나와야 한다는 선배들의 뼈 때리는 조언들을 법칙처럼 신뢰했다.
하지만 인생이란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우연한 사건으로부터 소중한 씨앗을 틔운다.
2학년 2학기 수강신청을 하는 날, 인터넷 서버가 터지는 바람에 원하는 수업을 하나도 담아내질 못했다. 머리가 하얘졌다. 그렇다고 휴학을 할 수도 없는 노릇. 텅 비어있는 시간표를 억지로 채우기 위해 '시 창작'이라는 교양수업을 욱여넣었다.
시 창작이라는 수업은 머리가 희끗희끗하신 국문학과 노교수님께서 진행하시는 수업이었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알고 보니 문단에서 영향력이 지대하신 시인이셨다. 교수님께서 내주신 첫 번째 과제는 영화 한 편을 보여주시고, '사랑'이라는 주제로 창작시를 제출하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그동안 잊고 살았던 글을 쓴다는 것 자체로 가슴이 쿵쾅거렸다.
며칠 뒤, 교수님은 수업이 시작하자마자 내 이름을 지명하셨다.
"경제학과 김희성, 앞으로 나와서 자네가 쓴 시를 낭송해보게"
예상치 못했기에 의아하고 당황스러웠다. '혹시 내가 뭘 잘못했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어리둥절해하면서 일단 시를 낭송했다. 잠시 후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교수님께서는 수업이 끝나고 나를 따로 불러내셔서는 조금 더 가다듬어서 신춘문예를 준비해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말씀하셨다. 피가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제야 깨달았다.
"그래 나는 글을 쓸 때 정말 행복한 사람이구나"
그때부터 시간만 나면 닥치는 대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당시엔 지금처럼 브런치나 블로그 같은 플랫폼이 없었다. 그저 대학노트 하나를 사서 자필로 적었던 게 다였다. 서걱서걱 펜촉이 종이 위를 긁는 소리가 좋았다. 그러던 2010년의 어느 날, 조심스레 문단에 어설픈 창작시 몇 편을 투고했다. 작은 문학 잡지사였는데, 시 부문 우수작으로 당선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렇게 월간 문학지에 내 이름이 실린 작품들이 소개되었다. 그리고는 내 조잡하기 짝이 없는 등단 작품이 실린 출판물을 지인들에게 나눠주었다. 그 후 지인들이 장난 삼아 나를 부를 때, 내 이름 앞에는 항상 ‘시인’이라는 부끄러운 두 글자가 따라다녔다. 그때는 그게 자랑스러웠다. 초심을 잃지 않고 더 열심히 창작하겠다고 남몰래 다짐했었다.
그러나 2015년 대학 졸업예정자가 된 나는 시집보다는 전공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시정과 시상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당장 먹고살 길을 찾는데 모든 촉각을 곤두세웠다. 오래전 많은 사람들이 내게 해줬던 말처럼, 그리고 선배들의 뼈 때리는 조언 앞에서 글쓰기는 사치였다. 결국 당시의 습작 노트에는 고작 몇 편의 졸작들이 마침표도 찍지 못하고 먼지만 쌓인 채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두 번째 시작도 현실의 벽 앞에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취업을 했다.
감사하게도 몇 천만 원짜리 대학 졸업장을 손에 얻음과 동시에 사원증을 목에 걸 수 있었다. 노교수님의 얼굴이 문득 생각났지만 부끄러웠기에 따로 연락드릴 수는 없었다. 신입사원 시절은 녹록지 않았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배울 것이 너무 많았기에 정신없이 지나갔다. 3년 차가 되자 조금은 여유가 생겼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길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브런치라는 플랫폼을 접했다. 기존의 블로그와 다르게 작가 신청 심사를 거친 뒤 자격이 부여되면 글을 써낼 수 있는 구조였다. 그래서 브런치는 많은 예비작가들과 양질의 글을 보길 원하는 독자들이 한 자리에 만날 수 있는 연결고리였다.
또다시 피가 뜨거워짐을 느꼈다. 당장 지하철에서 내려서 노트북을 들고 카페로 향했다. 몇 시간 동안 신이 나서 글을 써냈다. 2019년 여름, 브런치 작가가 된 후 퇴근 이후의 삶이 굉장히 풍성해졌다. 집에 오자마자 침대에 지친 몸을 뉘이던 내가 밥도 거른 채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구독자가 늘어나고, 그만큼 조회수가 커지는 것이 감사했다. 다양한 독자들과 소통을 하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그럴수록 내가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에 존재론적인 안도감을 느꼈다.
나의 직업은 평범한 회사원이다.
그리고 취미는 글쓰기다.
작가가 직업이 되어야 한다는 무거운 의무감을 내려놓자, 나의 세 번째 시작은 비로소 꽃을 피웠다. "작가가 직업이 아니라면 어떨쏘냐!", 그저 이 험난한 세상 속에서 나를 지킬 수 있는 취미 하나만으로도 고마운 것.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눈물겹게 고마운 세상이다.
시인이 꼭 직업이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의 직업이 뭡니까?"를 영어로는 "What do you do for your living?"이라고도 한다던데, 이 물음에 시를 써서 먹고산다 답할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까 말이지요. 하지만 시만 써서 먹고살 수는 없어도 평생의 직분처럼 여기고 시를 써 온 시인은 많습니다.
-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p53 -
작가가 직업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무슨 일을 하시든 그 꿈을 잊지는 말라는 뜻입니다.
지금 시작하세요. 꿈을 놓지만 않는다면 당신도 작가입니다.
작가가 되고 싶은 모든 예비 작가님들이 나의 이야기로 힘을 얻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박목월 시인의 <모일>이라는 시를 선물하며 긴 글을 마무리하겠다.
모일
-박목월-
<시인>이라는 말은 내 성명에 늘 붙는 관사
이 낡은 모자를 쓰고
나는 비 오는 거리로 헤매었다.
이것은 전신을 가리기에는
너무나 어쭙잖은 것
또한 나만 쳐다보는
어린것들을 덮기에도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것
허나, 인간이
평생 마른 옷만 입을 가부냐.
다만 두발이 젖지 않는
그것만으로
나는 고맙고 눈물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