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로 보는 세상 - 책 지도가 지구를 덮은 날, 영화 삼체
#진짜가 진짜 있긴 할까
구분할 수 없는 세상.
이제 가상 VS 현실의 문제가 아니다.
현실과 현실의 충돌.. 이것도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개념으로 상상하려니 세상의 모습이 단조롭게 보인다.
내가 아는 줄 알고 있는 것에 속지 말자.
몇 개의 현실이 뒤엉켜 있을까.
무엇을 어디까지 구분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애초에 ‘구분’이라는 것이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이쯤 되니 그냥 그때그때 마음에 드는 개념을 골라서 적당히
“아 그런가 보다” 하고 즐기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로울 듯하다.
다만 무언가를 잃게 된다면,
게임머니가 아닌 내 인생일 테니 목숨이 하나인 것만 알면 되고.
그러니 얻게 된다면 그 또한 내 인생의 보상이 될 수 있겠지.
#세상이 만든 이의 의도대로 되어가긴 하는 걸까
인간이라서 생각하지 못한 것들.
생각해 볼 생각조차 못 하고 있는 것들.
생각의 능력이 미치지 못해 모르는 줄도 모르는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세상이 만들어진 거라면,
짐작도 안 되는 우주도 누군가 만들어놓은 거라면,
그중 인간이라는 종은 2차원적 형태를 만들어낼 수는 있어도
‘숨’을 불어넣어 생명이라는 것을 탄생시킬 수는 없지만, 숨 대신 연료로 움직이는 것들.
그러니까 저게 어떻게 우주로 날아갈까 싶은 로켓도 만들어 날리고,
심해의 깊이가 가늠도 안 되는 바다 위에 다리도 놓고,
인간을 잔뜩 태운 비행기도 하늘에 띄우는 걸 보면, 인간이 무언가를 창조해 내는 것처럼
그 어떤 초월적인 존재는 당연히 우주도, 생명도, 인간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 아닐까.
그 또는 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만들진 것들은 왜인지도 모르며 일단 살아 있으니 살고 있는,
그중 하나가 나인가.
인간들이 신이라 부르게 된 그 존재가 만든 세상이라면,
세상은 만든 이의 의도대로 되어가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답이 없으면 만들면 되지
인간은 어떻게 무엇을 주입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쓰임을 갖는다.
나와보니 한국.
우리 가족, 우리 동네, 우리 학교, 우리 사회, 우리나라.. 하며 ‘우리’를 40년간 듣던
그 무렵 ‘나는 무엇인가’라는 괴로운 숙제를 맞이하게 됐다.
내가 언제 이곳에 나오겠다 동의한 지는 모르겠으나, 원래 다 모른다 하고,
왜 나왔는가를 고민하는 것은 이제와 내 몫이라 하니..
기억을 가지고 분열하는 삼체인이 차라리 낫지 않은가 싶다.
일개 개체의 자유의지 따위 의미 없으니 문명이나 지켜라.
목적과 메시지가 명확하니 고민 없이 그대로 살면 될 것 아닌가.
‘하나가 생존하면 모두가 생존하는 것.’그런데 문명을 지킨 그 ‘하나’는 무엇을 얻는 걸까.
나는 여전히 풀고 있는 숙제,
이제 답을 기대하진 않지만 방향이라도 찾으려 오기를 가지고 덤비니
심지어 괴롭지만 즐거운 변태 같은 지점을 맞이하기도 하는 이 숙제를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포기하고 사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안 해도 될 고민을 하고 있는 걸까, 사람들이 해야 할 고민을 하지 않는 걸까.
답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거라면
내가 답이라고 하는 그게 답이 되겠지.
#도대체 생존이 뭐길래
나 없이 나와 같은 종족이 존재할 필요가 무엇일까.
나를 기억해 줄 누군가가 필요한걸가.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내가 보는 세상 또한 존재하지 않을 텐데,
맹목적인 본능은 무엇에 기인한 걸까.
본능이 ‘생존’에 맞춰져 있다면,
그렇게 소중한 나라면 인간은 그 ‘나’의 현재에서 왜 남의 길을 따라가는 걸까.
종족 보존에는 관심 없는 나는 삼체인들이 더 이해되지 않는다.
멸종을 두려워하는 것이 내가 가진 죽음이라는 것에 대한 알 수 없이 만들어내는 두려움과 비슷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 이상의 무언가 있는 것 같다.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게 무엇일까.
어디선가 들었다. 자살하려던 사람에게 총구를 들이대면
“살려주세요!!”라고 한다고..
생존본능,
현실이 괴로워 죽자고 결정한 이성이 마비되면 본능은 생존인가.
이 세상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르면서,
그렇다면 사는 동안의 소명은 어떻게 찾아야 하나.
#인류에게 해충은 결국 인류인가
‘침묵의 봄’ 삼체에서 안경 쓴 비겁한 놈이 예원제에게 건넨 책.
호기심에 찾아보니 내용이 흥미롭다.
벌레를 죽이려 만든 살충제가 결국 그 벌레를 먹어야 하는 새의 식량을 앗아가
먹이사슬의 연쇄적인 죽음으로 침묵의 봄이 온다는 이야기.
산업화 이후 인간에 의해 멸종되었다고 추정되는 종은 38만 종 이상이라고 한다.
이 수가 틀렸다 하더라도 더 많으면 많았지 적진 않을 듯.
자연 그대로 두어도 멸종의 개념이 있지만,
인간이 인위적으로 멸종시킨 종의 수와 그 속도는 전혀 자연스럽지도,
심지어 인간에게 이익이 되지도 않는다.
살충제조차 원래는 인간을 죽이려고 개발하던 중에
‘벌레도 죽네?’ 하며 부수적인 효과를 얻어 살충제로 쓰게 되었다는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되었다.
해충이나 박멸할 것이지, 그것도 인간 기준의 해충이 라지만심 지어 해충들은
살충제에 면역력 생겨 개체수가 더 늘어났다고 한다..
아.. 알면 알수록 인간.. 점점 마음에 안 든다..
이 것들이 인간의, 인류의 진실인 걸까.
#포장하면 과학, 벗겨보면 썰
과학자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가설 하나 붙잡고 남들 눈엔 쓸데없어 보이는 걸 파헤치고 또 파헤치고.
그러다 결국 ‘모르겠다’ 혹은 ‘답 없다’에 이르는..
결과를 지향하지만 어떤 결과에 도달하든 그 과정들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아닐까.
짜증 나면서도 흥미롭고 매력적이다.
나는 과학이 무언가를 증명해 내는 도구로서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점이 흥미롭다.
아무리 완벽한 이론도 조금 더 넓히고,
시간이 더 흐르다 보면 틀릴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하는 알 수 없음 마저도.
인간 아닌 누군가가 이런 불완전한 존재인 우리를 본다면,
나 자신도 잘 모르면서 세상을 이해하겠다고 덤벼대는 꼴을 보면,
귀여울까..
#결국 내가 믿는 것이 내 세상이다
인간이 세상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짐작, 나름의 정의, 추측은 해볼 수 있겠지만 ‘안다’라는 경지에 이르기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내가 눈 뜨고 있는 이 세상이 현실인지 현실 밖인지도 모르겠지만,
천국에 사는 방법은 단 하나,
내가 사는 곳을 내가 천국으로 만드는 것뿐.
메타버스든, 멀티버스든, 4차원이든, 10차원이든
가능성을 열어둘 것인가,
그중 하나를 골라 믿어버릴 것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같은 상황도 다르게 해석되듯,
내가 무엇을 믿는가에 따라 내 세상이 달라지는 듯합니다.
인생의 답을 결국 찾을 수 없다 해도, 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내 존재의 이유 아닐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