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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Oct 22. 2023

[책] 땅의 예찬 by 한병철

생명에 대한 원초적 본질을 향한 갈망과 시(詩)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읽어야 할 남은 페이지가 줄어들어 눈물이 났다. 




한병철의 속살을 그대로 본다. 아마도 그는 무척 예민하고 까탈스러우며 변덕스럽고 감정 기복이 심하며 때로는 너무 순수해서 눈물을 쏟게 만드는 어린아이 같으리라. 이게 사실과 다른 나의 환상이라도 그대로 품고 살리라 마음을 다독인다. 


구원이란 본래의 본질로 되돌린다는 의미이다(하이데거, 재인용 p.32). 한병철은 겨울정원의 영원한 향기를 갈망하며, 실제 정원을 가꾸는 기록과 상념, 그리고 철학을 통해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여정을 걷는다. 그는 땅을 딛고 꽃들의 빛과 향을 정원에 심는다. 빛나는 노랑으로 환한 겨울정원, 진한 붉은 향기들이 넘실대고, 작가의 사랑과 슬픔의 탄식들이 뜨겁게 오른다. 이 여정을 지켜보다 가슴이 탄다.  


색과 향의 겨울정원은 그의 형이상학적 이상의 실현이다. 타자의 시간이다. 이 아름다운 책을 끌어안고 가끔 나도 그에게 반항힌다. 


자신의 가치를 정원에 실현하기 위해 아름다운 것들에 무한한 집착과 애정을 보이면서, 그 아름다움을 더 아름답게 해주는 주변의 무모함, 무질서함, 빽빽한 추함을 단번에 들어내려는 탐욕을 읽는다. 그의 여린 마음과 욕심을 한번 더 내려보다 짠하고 안타까웠다. 그래도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운명이다.


엄청나게 많은 꽃과 그 이름들에 감탄한다. 한병철이 아니라면 누가 이렇게 눈물 나도록 아름다운 감성으로 꽃을 그리게 하고 이름을 이야기하며 사랑을 하고 구원의 길로 이끌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내 안의 탐욕도 읽는다. 저 꽃들을 다 내 것으로 만들 테다! 이내 곧 멀어지는 꽃 향기로 정신이 혼미하다. 향기는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파랑색의 하늘에서 보는 존재하는 무(無), 지금 파랑 하늘 안에 있지만 보이지 않는 그 신비한 없음에 빠진다. 곤충들을 유인한 바쁨으로 얻어진 열정의 수분(受粉)으로 순결의 흰색에서 농염을 지나 붉은색의 뜨거운 격정을 훔쳐본다. 


장미꽃만을 위한 불규칙 동사, 과거 완료형인 '장미하다(rosen, p.88)'를 속삭이며, 장미를 순수한 모순이라며 그 열망의 시를 쓴 릴케를 읽으며, 보이지는 않지만 벌써 만개한 장미의 향기를 맡는다. 세상에, rosen이라니! 향기가 절정에 달하는 그 동사의 의미로 나는 한번 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 향기를 마시는 것처럼.


수도사후추, 순결나무(p.103)로 불리는 식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도사들의 '혐오스러운 육욕'을 다스리는데 쓰이는 식물들이 꽤 많다는데 놀랐다. 이 원초적 욕구를 잠재워야 하는 삶을 선택한 그들이 얻는 것은 무엇일까. 구원, 그건가. 무엇으로부터 구원되어 어디로 닿아야 하는 건가. 식물 하나 꽃 하나가 나올 때마다 따라가 고민하고 생각하고 알아낸다. 알아내고 이해하면 사랑하게 된다. 


책의 중반 이후는 한병철이 정원을 가꾸며 쓴 일기이다. 그의 날짜를 보며 내가 저 날에 무엇을 했더라 시간 여행도 한다. 당신이 정원에서 땀을 흘리고, 잡초를 향해 독설을 하는 동안, 나는 서너 살쯤 아이들에게 영어책을 읽어주고 있었구나. 나의 목소리가 책 1권이라는 숫자 말고 한병철의 꽃 향기처럼 그윽하게 퍼지는 여운으로 남았기를 바라본다. 


시(詩)와 노래가 풍성해서 이 책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나직나직하게 시를 읽어가며 작가의 시선과 마음을 따라간다. 브레히트와 릴케, 벤의 시를 듣는다. 슈베르트와 슈만의 노래에 마음을 연다. 시(詩) 하나에 얼굴들이 하나씩 떠오르고 노래 하나에 내 사랑이 흘러간다. 한병철의 꽃이 가득한 정원에서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향기를 맡는다. 


이렇게 나는 한병철이 예찬하는 땅으로 초대되어 자유로운 영혼으로 여행을 하고 달라진 내게로 돌아왔다.




디지털을 꺼리는 나조차도 살 곳을 디지털로 옮겨버린 듯한 메마름을 가까스로 견디고 있었다. '땅의 예찬' 책 한 권을 읽었는데 생명이 피어나는 땅을 조금 떼어 받은 느낌이어서 기쁘다. 나도 향기를 품은 땅이 가득한 내 정원 위에 서있고 싶다.



땅의 예찬 미리 보기 by Google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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