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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Nov 24. 2023

투명에 질림

화이트 와인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밤새 불규칙 간헐 두통에 감정들이 오르락내리락한다. 주문한 와인은 화이트로 둔갑해 왔다. 다른 화이트는 다 받아들일 수 있지만 와인만은 제발... 매번 내가 고르던 와인, 이제는 쭉 내가 직접 골라야만 할 이유다. 


떫디 떫은 탄닌이 세상을 덮는 진하고 둔탁한 와인을 좋아한다. 그 떫음 속에 녹아 있을 이야기를 기다리는 맛이 희열을 느끼게 한다. 그냥 바라만 보아도 이야기들이 걸어 나오는 자연스러움에 빠진다.


저 편 세상을 멀겋게 다 비추는 외설이 싫다. 까발려도 까발려도 계속 보라고 재촉하는 그 투명이 두렵다. 근접각 사진으로나 대강 형체 없는 추상화가 되는 화이트 와인, 선택의 여지없이 마주 앉아 커다란 투명 속 작은 탄산 기포를 노려보며 전쟁을 한다. 기포마저도 투명하고 노골적이다. 


부끄럽고 피하고 싶은 심리를 자극해서인가. 까닥까닥 미끼를 흔들고 있는 낚시찌 같은 천박한 유혹, 아니 유혹이라기보다 가여운 동정으로 세상을 구걸하는 것처럼 보여서이기도 하다. 


지난 산행을 위해 비행기에 오르면서 비슷한 경험을 어떤 사람으로부터 했다. 


비행기 입구 쪽 비즈니스 석이 서너 줄, 이미 귀빈 대접으로 모두 도도하게 앉아 있다. 통로 쪽 한 사람의 모습이 나를 한 발짝 비켜서게 했다. 그와 눈이 딱 마주치는 순간, 어떤 명령을 받들듯 그의 위아래를 훑었다. 스카프, 셔츠, 가슴에 품고 있는 가방, 바지, 단화까지 같은 무늬였다. 저 무늬를 어디서 본 듯도 한데. 한 방에 몰라봐서 미안하다. 


바로 눈을 피하는 사람을 나도 한껏 피하며 뒤쪽 이코노미 좌석에 앉았다. 꼭 그렇게 같은 무늬로 비명을 지르며 앉아있어야 했나. 나 이런 사람이야. 그거였을까. 이상한 껄끄러움과 부끄러움이 왜 나의 몫이 되어야 하는지 잘 몰랐다. 집으로 돌아와 문득 생각이 나서 그 페이즐리 무늬를 검색하기 전까진. 


화이트 와인은 내게 그런 거르지 않은 가여운 영혼의 절절한 비명 같은 노골적인 느낌이다. 내가 다 쏟아내고 싶지 않은데 더 투명해지도록 요구하는 것 같다. 나는 탄닌 뒤에 조용히 숨 쉬고 싶다. 세상을 들여다보고 싶을 때 살짝 삐끔 문을 열고 한 눈으로 먼저 살펴보고 싶단 말이다.


에스뿌레쏘의 산도는 즐길 수 있지만 화이트 와인의 취기 오른 산도는 기운 빠진다. 즐길 새도 없이 몽롱하게 자극하는 그 도발이 싫다. 


글을 쓰며 '싫다'는 느낌을 이렇게 진하게 가득 마음에 담은 날은 거의 없었다. 화이트 와인으로 망친 나의 시간과 꿈과 잠에서 내가 갈 길을 정한다. 이제는 네가 날 싫어했으면 좋겠다. 싫단 말 많이 하고 나니 몸과 마음이 춥다. 이제는 따뜻한 것들을 찾아 나설 차례다.



사진 - 화이트 와인 병에 비친 나 2023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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