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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Jan 26. 2024

두통의 始發

시발(始發) 그 하루, 통틀어 인생

독한 글, 그로테스크 취향 아니신 분들은 '뒤로가기' 누릅니다.



괜한 반항으로 새벽을 연다. 전생에서부터 따라온 두통, 오늘의 시발(始發)이다. 始發이라는 한자 자체도 내겐 욕이나 마찬가지지만, 오늘은 그 소리까지 허공에 지른다.


새벽에 눈 떠 하루 삶의 탯줄을 자른다. 가만히 눈을 뜨고 어머니의 흐드러진 땀냄새를 맡는다. 그런 상상을 뒤로하고 전부터 따라붙은 두통에 두 다리로 일어나지 못한다.


어제, 나의 전생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AI의 두뇌로 돌아가 스캔한다. 필사, 운동, 독서, 영어 모임, 수업... 먹은 건 삶은 달걀, 두부, 버섯 수프, 아몬드 한 줌, 그리고 커피, 약, 홍차, 뜨거운 물...


내 전생은 일찍 종료했다. 8시 엔딩. 뜨거운 두 눈알을 양손에 들고 침대로 기어들어가며 '안녕,' 세상과 작별했다. 다음 생은 말끔한 새벽으로 오너라. 다음은 오는 걸까. 아니어도 괜찮아. 제발.


두통은 흔하다. 누구나 하루에도 몇 번, 평생 동안 백만 번이라도 기어코 견뎌낸다. 그 始發을 잘 감지해야 한다. 오늘 새벽엔 다섯 번만 내지른다. 그 始發을!


하기 싫은 거 억지로 할 때 始發, 지끈지끈 스트레스 두통

스트레스, 분노, 슬픔에 감정적 폭식하고 회한의 始發, 저절로 두통

차갑게 뇌의 핏줄을 자극하는 始發, 아이스크림두통, 의학계 정식 명칭

앞이 멍하고 두피가 뜨끈해지는 始發, 편두통, MRI 뇌 순수 깨끗, 약은 없다더라

세상이 흐릿하고 눈이 타들어가는 始發, 세상이 소리로만 변하는 마법을 즐기라 한다


전생에서 넘어 이어온 10시간쯤의 잠이 두통을 부른 건가. 겪어보지 못한 두통은 진한 블랙커피의 울렁거림을 기어이 이겨내고야 만다. 원인을 찾고 싶으나 손발이 늘어지는 始發의 순간, 튀어 오르는 본능이 뇌를 깨운다.


필사를 해야지. 탁! 생명의 불을 밝히고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육필의 욕망을 종이에 꾹꾹 쑤신다. 통증의 필사는 한 글자씩 부들부들 벽돌 쌓기를 한다. 맨 정신으로 깔끔하게 해내는 문장 단위 필사의 그리움이 始發한다.


뜨겁게 살았으니 어디가 뜨거운 들 무슨 상관인가. 오늘의 이승이 어제의 전생을 종착지로 희망해도 다시 말려들어가 전생으로 갈 수 없으니, 오늘을 기어코 살아낼 수 밖에는 없는 숙명이다.


오늘도 전생의 루틴이 때마다 시발(始發)이다.


새벽, 필사의 始發

10분 후 운동의 始發

운동하며 책 읽는 始發

재미있는 수업을 짜는 始發

친구의 건강을 간절히 비는 始發

잘 살아낼 거라는 다짐의 始發

오늘, 이승을 마치는 감사의 始發

내일, 다음 생의 두통 사절, 경고의 始發


오늘도 하나씩 숙명을 밟는다, 자 始發!



비속어, 욕에 대한 연구가 많다. 가장 긍정적인 욕의 효과는 통증이 극에 달할 때, 있는 힘껏 소리 지르는 욕은 통증을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물론 고상한 사람들의 다른 방법도 있으리라. 나는 욕을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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