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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Mar 02. 2024

나흘간의 짐

더 막막해진 시간들

커다란 여행 가방을 열어두고 눈에 보이는 것들과 머릿속에 생각나는 것들을 무작위로 던져 넣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수도 없이 보아온 여행 필수 리스트를 꼼꼼하게 읽어본 적이 없다. 결핍과 갈증 뒤엔 모험이 있을 뿐이다. 머릿속엔 단 한 가지 미션만 넣어 집중하리라 했다.


가구들을 끌어다 동선에 맞게 배치하고 짐을 쏟아 각자의 용도에 맞게 걸어두고 던져두고 밀어둔다. 노트북에 외장키보드가 링거처럼 달려 뜨겁게 달구어지길 기다리지만 내가 마주한 공포로 차가워지기 일쑤다. 왜 이따위로 글을 썼을까.


처음을 고치고 고치고 커피 한잔 독하게 마시고 고치고 또 고친다. 머리를 하도 쥐어뜯어서 왼쪽 머리카락이 뭉텅 뜯겨나간 꿈을 꾸었다. 왼쪽 뇌 속 끝까지 깊은 상처가 난 것 같았다. 감성 부족이라는 건가. 처음을 대강 꿰어두고 그다음을 달려 중간쯤까지 마무리했다. 휴우 한숨 쉬며 심신의 갈증에 뛰쳐나가다 끼익! 선다.


Hotel California 가사 마냥 결국 이곳을 벗어나지 못했다. 어슬렁어슬렁 다시 기어들어와 새하얗게 화장을 한 웨이터에게 꼬냑을 주문했다. 알코올 기운 따뜻할 때 수업 준비를 하며 아이디어를 뽑는 신공에 스스로 놀란다. 냑 스트레이트 두 잔에 업되어 검은 밤바다를 마주하며 책을 펼쳤지만 보이지 않으니 읽을 수 없다.


나흘 내내 출렁이는 어두운 회색 바다를 마주하는 건, 내 글을 다시 읽는 것만큼 고통이다. 하루도 해를 볼 수 없었다. 비가 오면 바다는 더 검다. 눈이 오면 바다는 더 회색이다. 바람이 불면 바다는 더 신경질적이다.


문밖의 'DO NOT DISTURB'는 자꾸 노크를 부른다. 저, 살아 있다고요! 다음 날부터는 알아서 그 시간에 나가 물을 받아온다. 제발, DO NOT DISTURB!


해결되지 않은 마음의 짐들이 여기저기 산만하게 널브러져 있다. 해결이 쉬운 짐들이 굴러다니는 방 안을 욕실을 옷장을 서랍을 냉장고를 테이블을 화장실을 샤워부스를 한바탕 스캔하고 나니 제대로 돌아가기는 글렀다. 포장이사를 해야 할 판이다.


내 나흘의 짐이 더 늘었다. 혼자 고백을 한 눈물이 짐이 되었고 눈물을 흘리다 코를 풀어 던져둔 얇은 티슈 한 장도 짐이 되었다. 전전긍긍하며 어찌어찌 마무리한 내 글이 짐이 되었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마음이 큰 짐이 되었다. 눈에 보이는 짐들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순간이다.


대체 이 짐을 다 제대로 싸려면 어떤 포장 이사를 불러야 할까.


손 하나 까닥하고 싶지 않은 비겁함에 떨고 서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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