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진한 끝을 대강 대강 꿰매어 닫고 이번 여행의 목적은 다했다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살아가는 색깔을 더 명확하게 하고 잘 정리하기 위해 반듯한 여러 개의 상자 안에 시간을 구획해서 쌓아 두었다. 지금 하는 이것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마지막 소지품을 가방에 챙겨 넣고 이렇게 글을 쓰면서 약간 슬퍼지는 게 당황스럽다.
오늘이 나의 유효기간이다. 아니 이 새벽이 유효기간이다. 나를 가둬두었던 이 공간을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매몰차게 문을 박차고 나갈 땐 이미 새로운 다른 생명체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난 며칠의 갈등과 고됨, 취기 오른 게으름, 뇌를 쥐어짜며 노트북을 노려보던 퀭한 눈빛을 모두 한 보따리에 싸서 과거 어디론가 부쳐두기로 한다. 필요할 때 다시 현재로 끌어올려 뒤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땐 씁쓸한 고통의 되새김이 아니라 그 현재를 더 갈고닦기 위한 윤활유처럼 써야지. 열심히 보냈다.
책을 읽는 대신 하늘을 더 많이 올려 보았다. 책을 한 권만 가져온 게 다행이라 여겼다. 한 자도 읽지 못했다. 읽기는커녕 책을 들춰보지도 못했다.
커다란 욕조에 빨강 장미 꽃잎을 상상한 찰나가 있었지만 고되고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하는 데는 핫샤워로 충분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뜨거운 물줄기가 하루 피로를 다 가져간다.
낯선 곳에서 만난 헤어디자이너의 감각은 만족스러웠다. 우리 동네 헤어샵처럼 나를 혼내지 않았다. 머리를 스스로 자르기도 하는지 한번 물어봤을 뿐이다.
진한 음악이 흐르던 바에서 마신 독한 스트레이트 두 잔과 약한 테킬라 두 잔은 미진했던 글마무리에 힌트를 주었다. 알코올이 주는 유연함을 간간이 즐길 수 있는 건 분명 행복이다.
길을 따라 오래오래 걸었다. 비를 맞으며 숲을 맞으며 걸었던 시간이 이제 과거로 돌아가 현재의 나를 응원할 것이다. 자연은 한없이 치유한다. 자연은 배신하지 않는다.
아무나 마무리는 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마무리를 제대로 하는 건 아니다. 나는 지금 아무나로 지내다가
제대로 하는 누구나로 이곳을 떠나고 싶다.
나의 유효기간, 이 곳을 나가는 순간 새롭게 다시 발급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