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납게 비가 내린다. 장마의 색깔을 서서히 벗고 아열대 스콜로 가는 기후는 어쩌면 내가 원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한 번에 싹 어둠을 쓸어가는 비, 바람, 비바람.
창 밖 하루가 폭풍처럼 시작하면 마음속으로도 그 바람에 거친 숨을 쉬면서 한 번쯤은 내게도 예상치 못한 폭풍이 닥칠 수도 있겠다 직감한다.
조심해야지.
거울로 자신을 보지 않고 타인의 눈을 타격한다. 다른 사람의 눈을 감겨 자신의 불안을 재우고 평안을 찾을 수 있는가. 대체 신념이란 게 뭘까. 인간은 소스라치게 놀랍고 잔인하고 처절하며 누추하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
피아니스트(The Pianist)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
홀로코스트(Holocaust), 절멸이라니. 600만 명, 내가 사는 시의 5배도 넘는 수의 사람들이 찢기고 잘리고 태워지고 검붉은 영혼을 머금은 회색으로 휘발한다. 새벽을 싹 쓸어갔던 폭풍은 죽은 이들의 영혼을 돌풍으로 몰고 왔다.
온몸을 쭉 펴고 편히 늘어져 하루를 정리하려다가 반격당한다. 부들부들 떨리는 세포들이 내 심장을 뜯어먹으려 달려든다. 손으로 틀어막았던 입은 어느새 뭉개져 닫혀 버린다. 죽은 이들로부터 뽑아낸 기다란 금니 뭉탱이에 별 먹은 것도 없는 위장이 울컥 뒤집혔다. 위산의 쓴 물이 식도를 태운다.
조심하라고 했잖아.
붉은 옷을 입은 작은 아이가 수레 위에 늘어져 영혼의 핏물을 흘리며 지나갈 때 쉰들러의 공포와 분노를 읽는다. 눈물인지 콧물인지 땀인지 피인지... 닦을 기운도 없는데 심장은 터질 듯이 울렁거린다. 산사람이 가지고 나온 가방과 신발과 머리카락과 금이빨이 죽은 이들의 영혼마저 길 잃게 한다. 떠돌게 한다.
텅 빈 기운, 자정이 다 되어가는데 첼로가 흐른다. 남은 영혼의 끝 마저 태우고 만다.
붉은 옷의 작은 아이가 걸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