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지하철을 타러 간다. 첫 번째 역에서 세 번째 역까지는 외부승강장으로 열려 하늘을 볼 수 있다.
슬픈 하늘이 어두운 구름을 모아 아래로 불어 비를 내리면 고독을 희석하여 견디겠다는 의지다. 내려가 외로운 사람들을 위로해 주고 엄마 품 같은 대지 위에 꿀물이 되길 바라는 거다.
대지가 막혀 외로움이 피할 길을 찾을 수 없을 때는 눈으로 내리는 하늘의 마음을 읽는다. 얼마간은 소복하게 쌓여 순결한 바람을 이루어 주려는 거다. 질척이며 대지로 녹아 더 쓰라릴 것을 안다.
식탁 위에 숟가락과 포크와 버터나이프를 정갈하게 나란히 놓았다. 새벽 6시다. 5시 55분에 그의 방에서 희미하게 알람 소리가 새어 나오면 나는 로봇처럼 일어나 서둘러 주방으로 나간다.
예쁘게 반짝이는 숟가락이 내가 사랑하는 그의 눈 같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 매일 똑같이 무언가를 퍼가는 사람, 내게는 외로움을 퍼간다.
바람이 휘돌 만큼 성큼성큼 거실을 건너오는 뒤꿈치 소리가 들리면 나는 가지런히 차려진 식탁 앞에 정갈하게 서있어야 한다. 그가 그러길 원한다.
잠깐 나와서 식탁을 확인한 후 화장실에 갔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간다.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내 시선을 느끼고 싶어 하는 그가 요즘 수상하다.
식탁 확인 30분 후 들어갔던 방에서 나와 반드시 숟가락을 먼저 들고 수프를 뜨는 그가 순서를 바꾸고 있다. 포크를 들고 샐러드부터 먹는 건 그가 아니다. 무슨 일이지?
맞은편에서 가만히 샐러드를 먹고 있던 나는 같은 것을 함께 먹고 있다는 것에 반가웠지만 그가 이내 소스라치듯 놀라 포크를 내려 두고 수프를 한 숟가락 뜬다. 살짝 김샌다. 그와 눈을 맞춰 본 지 한 달이 넘어간다.
그가 예술을 한다며 하루 이틀씩 집을 비울 때 나는 자유다. 매일 아침 6시 5분 전에 식탁으로 달려가지 않아도 된다. 30분 후 유럽식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전 날 샐러드 재료를 다듬어 준비하거나 매일 달라야 하는 수프 레시피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나는 비나 눈이 오길 기다린다. 오늘은 바람이 심하게 불어도 좋겠다. 외로움을 꾹꾹 뭉쳐 두었다가 지하철을 타고 외부승강장을 통해 하늘의 위로를 받기 위해 나간다.
그가 자유를 찾아 예술을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가 돌아올 때 생소하고도 신비로운 향기와 함께 온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에게 어떤 사람이 생긴 걸까.
나는 괜히 그 사람이 걱정된다.
그럼 그 사람도 곧 지하철 외부승강장의 빼꼼한 하늘을 향해 위로를 구걸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무슨 예술이길래 스마트폰 화면에 알 수 없는 미소를 보내기도 하고 뭔가 클릭하며 신호를 교환하기도 하는 것 같았다.
요즘 그의 거주지는 휴대폰이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참 다정한 사람이었다. 눈을 마주 보며 이야기할 때 나는 무척 행복했고 그의 농담에 박수까지 치며 깔깔 웃으며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며 넘어가곤 했다.
가끔씩 들여다보는 휴대폰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우린 결혼한 지 두 달 되었다. 한 달쯤 전부터 문화 예술 여행을 간다며 집을 비우는 날이면 킹사이즈 침대는 나의 독차지가 되었다.
그에게 사람은 한 달의 쓸모일까.
결혼 첫 주에 집에서도 휴대폰에 눈을 꽂고 다니는 횟수가 점점 늘더니 두 번째 주에는 자기를 위해 준비할 아침과 저녁을 말해주고 확인하고 또 확인할 때만 눈을 맞추었던 것 같다.
휴대전화보다 못한 인간이 되었다.
이 당황스러움을 어디에 하소연할 곳은 없었다. 누가 봐도 신혼의 달콤함에 젖어 있어야 할 때 그는 일주일에 한 번 주는 풍성한 생활비를 식탁 가운데에 툭 올려놓고는 예술이 더 진지할 필요가 있다며 다른 방을 쓰겠다 했다.
존재가 사랑 그 자체이니 변함없는 마음을 믿으라며 낯선 한 지붕 별거가 시작되었다.
냉장고의 칸칸마다 넣어두어야 할 것을 메모에 써서 자석으로 붙여 두고는 시간 날 때마다 내가 그렇게 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냉장고가 그를 한껏 안으며 바라볼 때 나는 그의 등을 보면서 황폐해지고 있었다.
그의 방에서 새어 나오는 길고 다정한 전화 통화 목소리를 거실을 지나며 듣는다.
그가 사랑하는 휴대폰과 그를 살게 하는 냉장고, 그의 그 또는 그녀? 그들 다음으로 나는 어떤 가구쯤일까.
집 안팎으로 그는 오직 그 만을 위한 가구를 모으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