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하의 레드

by 수의서재

숲은 꽤 울창하고 깊게 나 있었다. 천천히 시간을 걸어가는 의식을 하는 듯 둘은 한발 한발 땅을 힘주어 밟으며 걸었다.


"네가 나의 시지프로 들어올 때 무표정한 긴장을 느꼈어. 네가 다시 들어온 문을 통해 돌아갈까 봐 사실은 나 많이 긴장했었어. 어떻게든 너를 세워두고 내게 귀 기울이도록 하려고 엄청 떨었어. 그때였던 것 같아. 난 네게서 스카알렛 레드 같은 신기한 빛을 가진 주홍색이 떠올라 많이 당황하기도 했어. 이상하게 처음인 감정을 어떻게 추슬러야 할지 몰랐어. 아마도 내가 무척 횡설수설했었을 거야"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둘이 처음 만났던 그 시간으로 돌아가는 준하의 떨리는 목소리에 느껴보지 못했던 종류의 설렘이 마음을 채웠다. 희서는 그때 온 세상이 모자라다는 생각에 비뚤어지고 허탈해진 영혼으로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뭐라도 잡으려고 책을 쌓아 읽어대며 세상을 향해 두고 봐라 하듯이 오기로 살던 시간이었다.


희서는 준하의 첫인상이 긴장된 모습이었는지, 자신을 독서토론 동아리 신규회원으로 꼭 잡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든지 하진 않았다. 회장이니 저렇게 궤변 같은 열변으로 회원들을 대하나 보다 했었다. 사실 준하에게 관심을 갖게 된 건 동후 때문이었다. 희서는 동후에게 자꾸 호기심이 생겼지만 동후가 가진 감정의 방향이 준하에게만 향해 있어서 이상한 마음으로 준하를 샘내고 있었을 뿐이었다.


"너는 나를 한번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더라. 동후를 바라보는 너의 시선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적이 있었어. 넌 동후를 알고 싶어 하고 나는 너를 닿고 싶어 하고, 그렇게 다른 방향들을 느낄 때마다 난 비겁하게도 네게 용기를 못 내고 동후를 붙들고 있었어. 동후를 놓으면 너를 영영 못 보게 될 것 같았어. 네가 동후를 잡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난 질투가 나 미칠 것 같았어."


처음 알게 된 준하의 감정에 희서는 다시 대학 3학년 시절로 돌아가 동후의 분위기를 다시 느껴보려 애썼다. 희서가 동후에게 엄청 애달픈 사랑의 감정을 느꼈거나 한 건 아니었다. 동후가 준하에게 집착하는 줄 알았었는데 준하가 동후를 잡고 있었다는 말을 듣고는 동후가 갑자기 짠하게 느껴졌다. 동후가 정말 준하에게 잡혀 순순히 끌려가고 있다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동후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정말 그런 거였을까. 희서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었다.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레드를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천을 오래 찾아다녔어. 가장 부드럽게 살결을 어루만지는 천을 고르는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지. 네가 내게 어떤 감정일지 모르는 상태에서 너를 위한 색깔과 재질과 디자인을 상상해 보고 가늠해 보는 건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어. 거절당하는 꿈을 수없이 꾸면서 좌절하고 눈물 흘리면서도 내가 만든 스카알렛 레드의 슬립을 네가 입는 상상을 하며 용기를 냈어."


스카알렛 레드라는 이름이 분명 존재하긴 하지만 그 색은 희서가 황홀하게 상상해 온 꿈의 색이었다. 언젠가는 한 번쯤 도전해 보리라는 외설의 대담함을 가진 그런 색깔이었다.


사실 희서는 슬립이든 잠옷이든 아무것도 입지 않는다. 잘 때는 세상에 온 처음의 상태로 마치 엄마의 자궁 안 편안함을 느끼듯 맨살을 감싸 웅크리고 자는 게 버릇이었다.


뭐라도 걸치면 활동하는 시간이지 잠자는 시간이 될 수 없었다. 아마 이런 습관이 편하게 혼자서 여행을 다니는 이유이기도 했다. 수학여행이든 졸업여행이든 단체 여행은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가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었다.


그러면서도 주홍색을 꿈꾸었던 건 감히 용기 내보지 못한 희서 안의 숨은 욕망일수도 있었다. 준하에게 슬립을 받았을 때 그녀의 본능과 욕망을 들켜버린 것 같아 얼마나 당황했었는지 여전히 그 느낌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그리곤 바로 준하의 장난이려니 넘겨버린 자신이 참 가벼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희서에게 닿으려 했던 준하의 마음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니 희서의 메말랐던 감성은 가까이 있던 사람을 공감하지 못하고 심지어 고통까지 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미안해. 내가 네 눈을 깊이 바라볼 시간이 있었더라면... 그땐 나에게 급급하느라 너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어. 내 감정에 압도되어 네 마음을 들여다볼 여유를 갖지 못했어. 오랫동안 넌 내게 오고 있었구나. 미안해."


준하가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무승부가 아니라 준하가 이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희서의 긴 손가락이 닿아가는 시간이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준하가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스카알렛 레드의 열기가 온몸으로 퍼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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