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그림자
커튼을 여니 다닥다닥 올망한 도시의 집은 대부분 어둠이다. 이따금 가로등만 새벽을 거스르며 혹여 그런 어둠에 발걸음을 재촉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흐릿하게 졸고 있었다. 해는 여전히 다른 세상을 밝히느라 중천에 흐린 무지개 고리 속에 달을 가두어 두었나 보다. 빛을 돌아가면 어디나 어둠이 있다. 빛을 따라가면 어둠을 소홀히 하고, 어둠을 따르면 빛을 두려워한다.
새벽빛이 새어 나오기 전에 세상을 서성거리는 것이 습관이 된 지 오래다. 엉덩이로 막 기기 시작하던 아기 때부터 제일 먼저 깨어 차가운 달걀을 엄마 볼에 비벼대며 난 이른 시간을 깨우는 알람이 되었다. 새벽은 정상에 오르기 쉬운 시간이다. 세상의 주도권을 쥐고, 일어나는 사람들의 눈에 낀 눈곱이나 하품을 구경하며 세상을 배운다.
살아가며 몸과 마음에 내려앉은 통증과 상처, 그 세상의 흉터들을 스스로 치유하는 법을 자연에서 얻는다. 모든 왁자지껄함을 정리해 어디론가 보내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주는 새벽이 좋다. 그 새벽의 나무들 사이가 좋다. 그런 길, 하얗게 눈 쌓인 숲길을 걸었다. 어둠을 가득 머금은 한 가지 색의 나무들에 움찔거리면서도 그 위에 작게 뜬 달과 촘촘한 별을 보며 위안을 얻는다.
작은 랜턴을 손목에 감고 어둠을 휘저으며 가다가 랜턴을 껐다. 나무가 많아질수록 그 사이는 칠흑 같다.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 관계가 수렁에 빠지곤 하는 것처럼 두려움으로 그 새벽과 맞선다. 하나도 보이지 않는 절벽같은 어둠에 마치 새로운 발자국을 찍듯이 힘을 실어 천천히 걷는다. 뽀드득 소리가 깊지 않으면 넘어지지 않는다.
세상을 걷는 깊이는 사람들의 예상만큼 얕으며 그렇게 셈을 하며 발을 디디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는다. 얕으면 안전한 줄 알고 성큼성큼 걷는다. 하지만 그 새벽 내가 디딜 얕음마저 어둠이 삼켜 버려 그대로 멈추어야 할지, 손을 뻗어 볼지, 누군가 지나가면 한 걸음만큼이라도 안전하게 뒤따를지, 그렇게 거품처럼 생각이 넘쳐흘렀다.
랜턴을 켜면 될 것을 왜 그런 생각을 못했는지 모르겠다. 혼자는 안된다는 무의식으로 세상에 의지하려 애써 왔던가. 의식적 외로움이나 고독을 반긴다고 큰소리치면서, 멈칫거리며 시간을 기다리고 사람을 기다리며 사는 건가, 발을 내디뎠다. 새벽은 멈추지 않는다. 세상이 그라데이션으로 빛을 흡수하고 있다. 조금씩 나무의 실루엣이 뚜렷해지고 나무 사이의 살랑거림에 한기를 느끼며 계속 걸었다.
우울하고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들 땐 나가 걸으라는 어느 작가의 말이 생각난다. 에스키모인들도 마음이 상하고 화가 날 때 무작정 걷는다 한다. 그러다 마음이 풀리면 그제야 멈춰 서서 그때까지 걸어온 길을 다시 되돌아 걸어오며 뉘우치고 이해하고 용서하고자 하는 것이다. 분노와 서운함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다시 되돌아 주워 찌꺼기와 앙금을 털어 가슴에 담아 다시 살려고 돌아오는 것이리라.
내가 얼마나 걷고 걸어야 다시 멈춰 섰다가 되돌아올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여전히 나는 걷고 있다. 뉘우치지 못할 일에 걸려 넘어지고 이해하지 못해 뒤돌아 소리치고 여전히 용서가 안 돼서 전전긍긍하며 초조하게 산다. 그런 마음을 쏟을 수 있는 새벽 산책이 있어 다행이다. 언젠가는 새벽이, '이제 되돌아가도 좋아' 하며 작은 소리로 말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비겁함이 여전히 마음을 채운다.
새벽의 여명을 헤치고 아침해가 늘어지자 지나오는 길마다 나무 그림자가 하루를 시작한다. 하얗게 폭신한 눈 위에 드러누워 편안하고 따뜻하게 일광욕을 즐기는 것 같은 그들이 산책길 끝까지 릴레이로 따라와 나를 배웅해 주었다.
새벽은 빛과 그림자를 낳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