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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Jun 04. 2023

힘이 없어도 입이 없어도

공무원 시절 을질 3종 세트

입이 있어도 없는 듯해야 하는 때가 있더라고요. 수습 딱지를 붙이고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어리버리 분위기 파악하면서 눈치 볼 때 말이죠.


대학 졸업 후 원하던 회사에 들어가지 못하고 공무원이 되었어요. 20여 년 전에는 공무원이 되는 것이 지금처럼 어렵지 않았어요. 중앙직, 지방직에 모두 합격하고 중앙직에 먼저 발령을 받았습니다.




본부 격인 도사무소와 출장소가 나란히 붙어있는 곳, 출장소에서 9급 행정서기보로 일을 시작했죠. 자잘한 총무일을 하며 출장소장의 업무적인 무능함을 안주 삼는 곳이란 걸 알아채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너무한 거 아냐? 그래도 저의 첫 직장 상사입니다.


출장소장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을 입에 달고 사는 도사무소장에게, 온갖 눈치 보며 결재받을 서류를 내밀었던 어느 월 말, 저는 입이 없었어야 할 순간에 입을 열고 말았어요.


이소장님!!! 출장소장님이 제 상사인데요, 어떻게 제 앞에서 그분 욕을 이렇게 심하게 하실 수가 있나요?


얼굴이 점점 벌게지는 이소장의 패닉 표정 앞에는 20여 명의 도사무소 직원들이 프레리독 마냥 고개를 들고는, 쟤 미쳤구나 표정으로 결재받은 서류를 들고 출입구로 걸어가는 저를 보고 있더군요.


이후 도사무소 직원들은 제게 말을 걸지 않았어요. 저는 과묵해진 도사무소장님께 진심으로 감사했고요.




지방직 수습 후 첫 발령은 시청 건설과였어요. 건설과라니! 제가 건설적이긴 합니다.


온 세상 거친 말은 다 모인 것 같은 건설과, 일도 많고 말도 많고 싸움 민원도 많아요. 토목직으로 다혈질인 윤주사는 민원인과 전화 통화를 하고 나거나 민원인이 직접 와서 한바탕 하고 가면, 세상의 온갖 쌍욕을 허공에 날립니다.


공무원은 품위유지 조항이 있지 않나?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아직 여린 20대 말, 막막했습니다.


초과근무를 해야 할 땐 보통 사무실 작은 책상에 모여 중국 음식을 먹습니다. 저녁으로 볶음밥을 먹던 저는, 아직도 화가 안 풀린 윤주사가 시커먼 짜장면을 입에 물고 후루룩 튀겨가며, 한 젓가락 넘길 때마다 민원인 쌍욕질을 해대는 걸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윤주사님은 걸레를 물고 주무시나 봐요.

... ...


저랑 눈 마주치지 않아요. 쌍욕 소나기를 덜 맞게 되었지만, 저의 똘끼가 소문나기 시작하는 계기도 되었어요. 그러거나 말거나.




시청에 국정조사로 국회의원이 온다고 분주합니다. 일 잘하고 잘못한 거 없으면 되지 뭐가 이렇게 법석일까. 각 사무실마다 여직원들 몇 씩 차출되어 주방으로 내려갑니다. 특별 손님이 오면 룸 타입의 식당을 개방하는데 음식 서빙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였어요. 식당이 셀프니 그럴 수 있겠다 생각했죠.


그다음 말에 저는 귀를 의심했어요. 내일은 모두 한복을 입고 오세요.


한복이라뇨! 지금이 어느 땐데요! 그리고 여기는 그 옛날 요정이 아니고 시청 식당이라고요!


다음 날 출근하여 식당으로 내려가니 저만 혼자 치마 정장, 나머지는 모두 한복이더군요. 그때 왜 머릿속이 뜨거워졌는지 모르겠어요. 같이 투덜거렸던 직원들에 대한 배신감 같은 거였는지, 혼자만 뻘쭘해서 민망해서였는지.


이를 꽉 물고 음식 나르기를 하다가, 갑자기 저를 국회의원들이 식사를 하는 그 방구석에 세워두고는 식사 중 필요한 거 달라고 하면 챙겨다 주라고 하더군요. 계장님! 아우! 이런! 쉐잇! 제가 한방 먹은 건가요?




3년, 빠글 빠글 일 많고 충격 많던 공무원 생활, 숨이 안 쉬어져 자료실에서 두 번 쓰러지고... 결국 그만두었습니다. 부천에 유명하다는 심장 내과를 돌아 한의원을 다니며 왜 숨이 안 쉬어졌었는지 이유가 궁금했어요. 그런데 나중에야 그게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이란 걸 알게 되었지요. 공무원 부적응, 슬픈 과거입니다... 만!


그럼에도, 책에서 배웠거나 학교에서 배운 이상과 다른 현실을 마주하면 주먹부터 불끈 쥐는 이 버릇, 삶의 모자람을 채우기 위해 하고 싶은 공부를 하기로 했어요. 제가 사랑하는 '영어'로 돌아갔어요. 행복하려고요!



삽화 Yoonas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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