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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May 31. 2023

치열한 축복의 시간

마지막 수업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마음을 꾹꾹 누르며 오늘 하루를 마쳤다. 축제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곳저곳 패인 잔디가 마음을 더 허하게 한다. 정말 마지막 수업일까? 사진의 채도를 한껏 낮춰 스스로 정한 길을 지키리라 회색의 절제로 눈을 질끈 감는다. 다음 주 마지막 시험까지 마음을 더 굳게 정하기로 하자. 




7시 30분, 다소곳이 차를 세우고 잔디광장 옆 시멘트 길을 걷는다. 공부하러 다닐 때는 이 길을 직진으로 가로지르지 않고, 왼쪽 옆 소공연장 계단으로 빠져, 나무 그늘에서 차도 마시고 책도 읽고 수다도 떨곤 했었는데. 


가르치는 일은 배우는 일보다 더 바쁘고 긴장되는 일이어서, 지난 15년간은 잔디 광장의 푹신함을 느낀 기억이 거의 없다. 오늘은 일부러 여유의 눈길로 잔디 광장을 마주한다. 한 번쯤은 천천히 시간을 느끼며 걸어나볼걸. 아침 준비로 분주한 지하 2층 학생 식당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오른다. 이곳저곳 안내판의 수많은 교수 연구실을 하나둘씩 세어보며 참 많기도 하다 생각하는 일도 오늘이 마지막일까. 


경영관을 지나 경제관으로 들어가면 옛날의 낡음을 리뉴얼한 깔끔한 세미나실과, 또각거리는 구두 소음을 흡수하는 방음 바닥재가 깔린 긴 복도를 꽤 오래 걷는다. 그 한걸음 한걸음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오늘은 어떤 토의를 어떻게 진행할까 얼마나 가슴 뛰었던가. 청소하시는 어머님들과 크게 인사 나누는 그 짧은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 내 삶이 되었다. 


인문관으로 들어서 쭉 걸어 들어가 우회전하면 교수휴게실이라 붙어있는, 소위 교무실 같은 수업 준비 공간이 있다. '강사실'이라고 붙여 두어도 좋으련만. 가끔 눈치 없는 신입 전임교수들이 '교수휴게실'을 진짜 휴게실로 오해하고 차 마시고 떠들다가, 연륜 있는 강사 선생님들께 주의를 듣기도 하는 곳이다. 그런 광경마저도 진한 애착으로 이제는 아쉬운 시간이 되어 간다. 


그 어느 곳보다 진지하게 수업 준비가 이루어지는 교수 휴게실. 프린터, 정수기, 그리고 무거운 책을 두고 다닐 사물함이 각각의 이름을 붙인 자물통을 매달고 매일매일 왔다가 떠나가는 비전임 교수자들을 맞는다. 어떤 이는 계속 전임의 문을 두드리기도 하고, 어떤 이는 비전임의 자유를 즐기기도 한다. 나도 처음엔 최재천 선생님의 통섭의 세상을 꿈꾸며 전임이 되기 위해 분주하던 때가 있었다. K대학 총장의 일격이 있기 전까지는. 


그리고 자유를 택한 만큼 치열하게 살았다. 자유가 진짜 속된 자유가 되었다가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려야 하는 곳이기도 하니까. 매 학기 저 자물통이 달린 사물함을 쓰기 위해 학생들보다 훨씬 더 열심히 공부하며 보낸 날들, 공부를 좋아해서 참 다행인 나다. 그냥 쭉 이대로 직진하면 된다. 공부.


비전임 교수를 하며 종종 나의 품위유지비는 어느 정도일까 상상도 많이 했다. 분수에 맞게 사는 연습도 해보곤 했다. 어떤 학기는 멋진 이탈리아 식당에서 성게알이 폼나게 올려진 파스타 사치를 부릴 수 있지만, 보통은 학식이나 보리밥, 붕어빵으로 때워야 할 만큼 통장이 가볍다.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다. 


할 수 있는 일들을 더 찾아 해 가며 나의 경제적 자유를 위한 수입을 맞추는 일은 사실, 처절하기보다 재미있는 일이다. 다른 일을 벌여두고 몰랐던 재능을 발견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들 덕분에 새로운 문을 여는 재미가 쏠쏠하다. 나의 이런 비전임 초빙교수 경험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발견이다. 


5년 전, 나는 내 자유를 도와줄 일을 새로 시작했고 씩씩하게 살고 있다. 


박사 학위를 드디어 받았노라는 후배의 연락이 아니더라도, 이제는 기쁘게 떠날 때가 되었다 마음 잡는다. 내가 좋아하고 아끼던 과목이어서 아쉬움이 진하다. 나의 언어학입문. 


마음과 감성의 가치를 잊지 말자는 끝 인사를 하며 정시에 수업을 마쳤다. 아침에 걸어온 복도를 거슬러 지나가며 다시 지하 2층, 카페에서 샷추가 아이스라떼를 주문하고, 점심먹으며 수다로 분주한 아이들을 둘러본다. 이쁜 아이들. 나는 간다. 


이제는 가끔 푹신한 잔디 광장을 여유 있게 산책하러 오고 싶다. 

자동차로 전깃줄로 아래 위로 바쁜 공간들, 수요일 새벽을 가르며 달리는 일이 이제 빨간 신호등이 되려나. 


글을 쓰고 나면 마음 정리가 더 굳건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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