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소설] 퇴고
세린은 호스피스 병동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잠시 서 있었다. 잔 바람에 여리게 흔들리는 잔디가 건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듯했다. 강렬한 태양빛 아래서도 그 빛을 받아들여 하늘거리는 차분한 연두색이 세린을 지나갔다. 여러 번 가족과의 통화로 육십을 막 들어선 부인이 무엇을 바라는지 알고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일 거라는 예감이 맞아 들어가고 있었다. 창으로 비치는 가느다란 햇살이 병동 침대에 누워있는 그녀의 핏기 없는 얼굴을 평화롭게 비추고 있었다. 옅은 온기가 여전히 남아있는 손에는 데미안이 쥐어 있었다. 엄지가 차분히 누르고 있던 페이지를 펼쳤다.
'아무도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요. 그렇지만 친밀하게 서로의 마음을 바라보는 두 길이 같이 나 있다면 잠시 고향처럼 느낄 수 있지요.'
책 읽어주는 사람, 그게 세린이 하는 일이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여러 고전 중 하나를 골라 그 속에서 뽑아낸 문장들을 온라인에 띄워 놓으면 누군가 선택을 한다. 이야기를 나누며 여전히 세상의 찌꺼기로 남은 그들의 불안한 기억이나 잔상들을 정리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세린이 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최소한 그렇게 생각했다. 도울 수 있겠다고. 심리학을 전공한 세린은 삶과 죽음을 초월한 가치와 철학을 담은 고전의 힘을 믿고 있었다.
하지만 굳건히 살아내려는 사람들이 더 잘 정리하며 살고 싶을 거라는 세린의 생각은 틀렸다. 이상하게도 자신의 삶을 조용히 정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연락을 해왔다. 어쩌면 그게 맞는지도 몰랐다. '아무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헤르만 헤세가 쓴 데미안의 한 구절 깨달음이 이제야 온 것일 테니까. 싱클레어가 처음 에바 부인을 만났을 때의 흥분을 미소로 다독이며 해주었던 그 말은, 그 친밀하게 마주친 순간, 바로 자유와 충만함이었다. '잠시'의 온기를 전부로 받아들인 세린의 마음을 이 따뜻한 호스피스 병동으로 이끈 말이기도 했다.
세린을 부르는 그곳으로 가는 중이었다. 책으로부터 시작하여 편히 남아 있도록 그리고 가득하게 떠나도록 같이 하는 일이었다. 목적지에 다다랐다고 생각하는 순간 흔들리는 균열을 느낄 수 있어야 했다. 당황하지 않고 발을 디뎌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불안한 거기에서 꼼짝하지 않고 서 있다가 긴 한숨이 그 새로웠던 균열을 덮어 버리고 마는 습관을 오랫동안 버리지 못했다. 책과 책, 그 책의 많은 문장들 사이에 그런 안식들이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었다. 덮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길들. 이 문장을 선택한 사람은 오랜만이었다.
'아무도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요.'
이 일을 시작한 건 세린의 남은 시간 때문이었다.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아 지금 아니면 안 된다는 조급함도 있었다. 세상의 그 어느 일이 확실한 것이 있을까. 십분 후가 될지 내일이 될지 그녀의 불명확한 증상과 그 끝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었다. 몇 번의 알 수 없는 쇼크로 의사마저 고개를 저으며 에피네프린을 처방해 주었지만 어디선가 서 있다가 그대로 하얗게 세상으로부터 사라지는 상상은 습관이 되었다. 곧 현실이 될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결국 세린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진심으로 삶의 남은 균열을 채우고 싶은 사람들이 택한 것이 책이라면 그 사람에게 기울이며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또한 틀렸다. 누가 누구에게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너와 함께 할 거라는 말은 오만일 수밖에 없는데. 결국 스스로 선고를 내리는 거다. 나, 이제 이대로 충분하다고. 잠시라도 스스로 그렇게 자신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잠시'를 벗어나기로 하는 마지막 용기가 결국 돌아갈 수 없는 곳의 향수를 아름답게 한다. 여전히 저릿하고 돌아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이 소풍 같은 이승의 '잠시'가 장자의 나비인지 나비의 장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바라보는 그 길 초입에서 가는 길에 단 한 줌의 온기를 줄 수 있다면 그게 나비가 되었든 장자가 되었든 세린이 되었든 떠나가는 그녀에게는 잠시 고향 같은 순간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세린은 식어가는 온기가 여전한 부인의 손을 꼭 잡았다. 한쪽에서 조용히 바라보던 가족들이 다가와 부인의 눈가로 흐르는 눈물에 낮은 흐느낌을 더하고 있었다. 하얀 천이 끌어올려지는 그 사이로 부인이 남긴 마지막 숨결의 잔상이 평화롭게 세린을 지나갔다.
더 선명했으면 바람에 마음이 허락하는 곳까지 갔다. 정말 그게 맞을까, 그 허락말이다.
나는 여전히 초고에 머문다.
레이먼드 카버가 될 순 없다면서도, 그러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