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는 얼마큼 거리에 있나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몰리는 숨이 가슴 가득하다. 흙도 돌도 잡초도 무게를 지탱하느라 더 이상 산길은 납작해지지 않는다. 윤기 나는 길 양쪽에는 빨간 세모 리본이 일정 거리를 두고 바람에 흔들린다. 지나가던 사슴이 펄럭이는 빨강을 바라보다가 저 뒤로 물러서서 그 길을 지나는 사람의 흔적들을 확인한다.
그 사슴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안전하게 오르라는 나무 발판과 그 사이에서 올려다보는 검은 바위들을 지난다. 지나는 걸음 사이에는 삐죽하게 올라온 굵은 나사 대가리들이 발바닥을 누르며 소리 지른다. 땅이 꺼지는지 계단이 지치는 건지 알 길은 없다. 나사는 그저 힘에 뒤틀려 위험해질 뿐이다.
언젠가는 인간의 안전을 위해 몸뚱이 중간이 부러질 나사들이다
낙엽이 수북한 계단 끝마다 노란 페인트가 경고한다. 보폭을 제대로 맞추지 않으면 미끄러지는 아래로의 계단이 아득하다. 이내 펄떡이는 심장 높이를 잴만한 올라가는 계단이 까마득하다. 마주 보고 있는 계단 사이에는 단단히 준비하라 경고를 담은 벤치 두 개가 다닥다닥 쇠못을 깊이 품고 바라보고 있다.
자연 속에 걸쳐둔 비자연의 흔적은 상처일까 치유일까
가장 높은 정상을 향해 와글와글 행군한다. 몸뚱이 어디에선가 악다구니를 하는 유행가가 과거를 훑는다. 다음 옆구리에서 바로 전날 어느 카페에서 들었던 무슨무슨 차트 정상을 차지했다는 음악이 비명을 지른다. 소리의 템포와 볼륨에 따라 얼마큼 살아온 건지 낡은 시간들이 예상된다. 새소리와 바람소리가 복잡한 음악에 묻혀 슬프게 떠도는 산길이다.
그 산의 까마귀가 분주한 이유는 자연의 소리를 지키느라 음표를 쪼아 먹어야 하기 때문일 거다
정상이 다가오면 이명이 시작된다. 눈이 커지고 코도 부푼다. 무궁화 줄기에 빠글 하고 노랗게 빛나는 진드기를 보는 듯 움직임이 미세하다. 다양하고 뜨거운 광경에 멈칫한다. 밑바닥을 뜨겁게 달구어 후루룩 먹다 튄 음식 국물이 찬바람의 저항에도 땅으로 스민다. 하얀 사슴이 물을 마신다는 그곳 작게 남은 연못에 짠기를 섞는다.
전설 속에만 있었다는 흰 사슴은 아마도 나트륨 과다 섭취로 수분이 휘발되고 피부가 건조해진 걸 거다. 우굴 쭈굴 많아진 주름 그늘 때문에 지금은 황토색이나 진한 갈색 무늬의 그 사슴이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정상의 표지석에 기댄 흔적을 위해 다투며 욕심내며 늘어선 줄은 앞으로 얼마나 더 길어지려나
그 사슴을 위해, 그 까마귀를 위해, 아니 사실은 세상의 비평화에 눈감고 등 돌리려는 슬픈 이기심으로 나는 백록담의 그 바람을 자연에 돌려주기로 한다. 내 흔적의 고약한 습성을 포기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