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 오늘날의 이별법
"여기까지 오게 해서 미안하고, 와줘서 고마워" 대충 신발을 구겨 신고 뛰어나와 나를 반기는 친구. 친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글썽이는 얼굴로 연신 고맙다고 되뇌는 친구.
우연인지 필연인지 우린 초등학교 2학년 꼬맹이 시절에 만나 같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까지 함께 다녔다. 그러는 사이 우린 20년 지기 찐 친구가 되었다. 나로선 이런 친구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데, 코로나가 뭐 그리 큰 대수인가 싶었다. ‘야 당연히 와야지. 무슨 소리고’라며 장난을 쳤지만, 친구는 그게 아니었나 보다. 내가 문상을 마치고 겨우 숨을 돌 릴 때까지 고맙다는 인사를 연신 건네었으니 말이다.
친구는 올 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장례를 한 차례 치르기도 했고, 코로나 시국이라 전화로 위로를 대신 전하는 분들이 많았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여느 때 같으면 테이블마다 사람들로 가득 차야 할 빈소가 간간이 찾아오는 손님들로 겨우 채워졌다. ‘우리 할머니가 불쌍해서 연락했어. 와서 밥이라도 같이 먹어달라고’ 두툼하게 썰어낸 돼지 수육을 양껏 담은 접시를 내 쪽으로 쭉 밀며 운을 뗀다.
오랫동안 치매를 앓다 요양병원에서 생활하게 된 할머니. 코로나 확산세가 꺾이지 않자 병원에서는 외부인은 물론이고 가족들과의 면회도 엄격하게 제한했단다. 그 덕에 할머니와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하고 보내드려야 했다며 애먼 쥐포를 조몰락거리며 친구는 애써 담담히 말을 이어나간다.
가족들의 발길이 뜸해진 요양병원에서의 생활. 외부와의 연결이 끊어진 상황. 속절없이 흘러가는 수많은 시간 동안 할머니는 어떤 생각을 하며 지내셨을까. 하루아침에 달라진 환경을 인지할 겨를 도 없이, 치매로 점점 더 흐릿해져 가는 기억 속. 할머니가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었던 기억의 조각은 무엇이었을까.
자식들의 왕래가 끊어진 틈 사이로 할머니의 마음속엔 외로움이 자라나고 있었을 테다. 좁은 병실의 작은 창. 창밖을 바라보며 우리 아들, 손주들이 나를 보러 오지 않을까. 어제도 그제도 할머니는 가족들을 기다렸겠지. 친구의 이야기에 내 마음 한쪽이 괜히 애잔하다.
배부르니까 괜찮다는 만류에도 친구는 뭐라고 챙겨주고 싶었는지 사이다도 주전부리 땅콩도 계속 더 가져다줬다.
"속상하게 뭔 줄 아나?"
"뭔데?"
"할머니가 치매였잖아.
근데 가끔 정신이 돌아올 때면 늘 입버릇처럼 말했데"
"뭐라고?"
"코로나가 뭔지. 설명을 해줘도 이해가 안 되니까
자식들이 내가 늙어서 보러 안 오는 것 같다고,
아들이 내를 잊어버린 거 같다고 했데. 간호사한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코로나 난리 속. 할머니는 끝내 가족들의 얼굴 한번 편히 보지 못하고 세상과 작별 인사를 하셨다. 눈을 감고서야, 차가운 부검이 되어서야. 다시 할머니와 얼굴을 맞대어 볼 수 있게 된 가족들. ‘엄마, 할머니 보고 싶었어요’ 그동안 켜켜이 쌓아 뒀던 그리움을. 물어보고 싶어도 묻지도 전하지도 못했던 서로의 안부를 그제야 묻는다.
‘내가 죽으면 나를 위해서 울어줬으면 좋겠어. 많이 울어달라고 꼭 전해줘’ 간호사에게 전달받은 할머니의 마지막 이별 인사에 먹먹해진다.
썰렁한 빈소 안 오랫동안 엉덩이를 붙이고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얼굴 한 번 뵌 적은 없지만 영정사진 속 할머니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다.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 이제 만났잖아’하고 말이다. 뜨끈한 국밥 한 그릇. 뽀얀 쌀밥을 푹 말아 맛있게 먹으며 생각한다. ‘가족들과 진한 포옹과 인사를 나누고 좋은 곳으로 가시길. 저도 할머니를 기억할게요’라고 나도 인사를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