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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수 Oct 12. 2022

부산 중앙동 굿올데이즈(good old days) 호텔

좋았던 시절의 기억을 깨우는 공감각적 공간

우중충했다. "젠장" 단전에서 짧은 외마디가 툭 뛰어나왔다. 이런 막돼먹은 날씨는 내 플랜에 없었다. 그날은 파랗고 쾌청한 푸른 하늘이었어야 했다. 어렵사리 다시 떠나게 된 여름휴가 일정이 있는 날이었으므로.


'이런 젠장'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안겼다는 태풍 사라(Sarah)와 매미(Maemi). 이에 맞먹는 태풍 힌남노(Hinnamnor)가 대한민국으로 북상 중이라는 뉴스 보도를 한동안 매섭게 노려봤다. 필리핀, 일본, 제주도를 차례차례 집어삼키며 부산으로 진격해 오고 있단다. '하아-' 일말의 희망마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불현듯 몇 달 전 일이 스쳤다. 제주도 푸른 밤을 기대하고 올랐던 여행길. 제주 공항에서 코로나19 확진으로 격리 될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나. 작심에 작심하고 벼른 여름휴가였기에 이번 여행만큼은 완벽해야 했다.


"출근해야 할 것 같아" 여행을 함께하기로 한 남편은 비상근무를 가야한다며 출근을 선언했고, 일정은 시작도 전에 꼬여버렸다. 정말 울어버리고 싶었다.




어쩌겠는가. 서운하고 아쉬운 마음은 툭툭 털어내고, 3박 4일 일정을 1박 2일로 대폭 조정했다. 로컬리티 느낌 물씬 풍기는 그곳, 꼭 한번 묵고 싶어 오래전부터 눈여겨봐 왔던 호텔 예약 하나만 남기고 모든 스케줄을 취소했다. 이번에는 무조건 떠나겠다는 다짐이자, 이곳만큼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였다.  


매섭게 때리는 강풍을 뚫고 우리가 호텔에 어렵사리 도착했을 땐 이미 해가 떨어지기 시작한 늦은 오후. 호텔이 위치한 부산 중앙동은 크고 작은 회사와 가게들이 모여있는 동네라 그랬던지, 주말이었던 그날은 한산하다 못해 스산했다. 더욱이나 역대급 태풍이 오고 있다고 하니, 가게 사장님들도 문을 걸어 잠그고 저마다 태풍 맞이할 채비를 단단히 했을 테다. 먹구름을 잔뜩 머금은 회색의 하늘. 오래된 건물들이 풍겨내는 중앙동 특유의 정취. 무질서한 듯 정연히 뒤엉킨 전신주의 전깃줄만이 우리를 반길 뿐이었다.


부산 중앙동에 위치한 굿올데이즈(good old days) 호텔 풍경


'부산 중구 중앙동' 그 이름에서 느껴지듯 1980년대 부산 중앙동은 말 그대로 부산의 중심이었다. 행정의 중심인 부산시청부터 각종 대기업, 공기업, 금융기업, 해운회사는 물론 국제신문 부산문화방송과 같은 언론사도 몰려있었다. 당시 거리와 골목은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렸을 거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부산시청이 연산동으로, 2000년대 중반 금융기관들이 문현 금융단지로, 해운회사들은 부산신항으로 이전되기 전까지 말이다.



좋았던 그 시절의 중앙동
시간을 기록하는 공간

굿올데이즈 호텔 (good old days)




굿올데이즈 호텔의 포토존(이라 할 수 있는) 시그니처 안내데스크


내가 굿올데이즈 호텔(good old days)에 첫눈에 반한 포인트는 바로 이거였다. 중앙동이 가장 멋졌던(요즘 말로 리즈시절) 시간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호텔이라니. 호기심 천국인 내가 안 가볼래야 안 가볼 수 없지 않겠나. 호텔이 어떤 요소들로 나에게 어떤 말을 건낼지 너무 궁금했다.


깜깜한 골목 끝, 주황색 조명을 밝히며 우두커니 서 있던 굿올데이즈 호텔. 드디어 만났다! 유난히 어두컴컴했던 무채색의 그날. 회색빛 골목에서 홀로 빛을 밝히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듯했다. 태풍을 뚫고 오느라 고생했다고, 어서 들어오라고 말이다.




호텔 이용객에게는 웰컴 커피 1잔씩 무료로 준다
여행에 관련된 책과 부산의 풍경을 담은 엽서들



'머무는 시간을 디자인하다'
세심한 고민과 따스한 배려가 스민 공간  





턴테이블의 LP판을 돌리면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시작된다


"와. 오빠 디테일 미쳤어" 호텔 안 객실로 들어서자마자 냅다 환호성을 질러버렸다. 잘 정돈된 뽀얀 침구 그 위에 놓인 손 편지와 웰컴 키트 때문이었다. 살다 살다 호텔에게 손 편지를 받은 건 머리털 나고 처음. 편지 자체가 귀한 요즘 시대에 더군다나 손글씨로 직접 쓴 편지라니. 외부인이었던 내가 공간 안으로 쑥- 스며드는 순간이었다. 중앙동의 전성기를 기억한다는 소개처럼 객실 안으로 들어서자 타임슬립(time slip)을 하는 듯 정말 그때 그 시절로의 시간 여행이 시작되는 듯했다.




'청각, 시각, 후각, 촉각, 미각'
잠든 감각을 깨우는 공감각 공간 디자인    





호텔을 설계하고 디자인한 공간 지기는 어떤 마음으로 이 공간을 꾸미고 가꾸었을까. 이곳에 머물게 될 여행객들이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추억을 떠올리며, 어떤 기억을 가지고 돌아가길 원했을까. 가장 빛났던 그 시절의 중앙동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고 상상해보길 바라는 마음은 아니었을까. 어떤 이야기들이 더 숨겨져 있을지 궁금해졌다.


객실 전체 분위기를 좌우하는 짙은 우드 톤의 가구, 아날로그 감성의 턴테이블, 핸드드립 커피 키트(kit), 공간의 깊이를 더하는 조명 배치, 세심하게 신경 쓴 소품들. 모든 요소들이 말을 걸어왔다.


기억의 저편. 잊힌 지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데 음악보다 더 탁월한 것은 없을 것이다. 턴테이블이라는 청각적 장치는 잠들어있던 감각을 깨운다. '지지 재직..' 모든 타임슬립 영화가 그렇듯. 턴테이블 위 LP판이 돌아가자 그렇게 또 한 번 장면이 바뀌기 시작했다. 영화로웠던 그때의 중앙동으로.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파동이 공기 중의 틈을 촘촘하게 매운다. 창밖 너머 중앙동의 거리를 내려다본다. 중앙동이 부산의 중심지라 불렸을, 그 시절의 동네 풍경이 그려졌다. 하루의 끝을 알리듯 해가 저물기 시작했을테고 퇴근을 재촉하는 직장인들은 우르르르 거리로 쏟아졌겠지. 골목마다 뺵빽히 들어선 식당들은 저녁 장사를 위해 간판 불을 밝혔을테고, 긴 하루의 고단함을 한 잔의 술로 털어내려는 이들은 식당으로 모였을테다. 술잔을 부딪히며 덜어내는 삶의 고단함. 그래도 참 좋았던 그 시절, 거리는 활력이 넘쳤을거다.


객실 안 조명을 켜자 여러개의 방이 생겨났다!
독서하는 방, 커피마시는 방, 글을 쓰는 방



'조명 하나를 켜자, 방문 하나가 생겼다'
공간의 깊이를 더하는 조명




이번엔 객실 안 조명을 하나둘 켰다. 침대 옆 작은 조명 두 개, 간의 의자 옆 큰 조명 하나, 책상 위 스탠드, 핸드 드립 커피 존(zone) 옆 귀여운 무드등. 자칫 건조할 수 있었던 공간에 생기가 감돈다. 일차원적인 연극무대에 조명으로 공간감을 더하고 장면을 연출하듯. 밋밋했던 객실 안의 조명을 켜자 공간의 깊이감이 생겨났다. 조명 하나를 켤 때마다, 객실 안 작은 문들이 하나 둘 열리는 듯 했다. 조명이라는 시각적 요소로 공간을 나누자 원룸 형태의 객실에 '독서하는 방, 커피 마시는 방, 글쓰는 방, 잠자는 방'이 생겨난거다.  


캡슐 커피만 먹던 내가 '사부작사부작' 원두를 갈고 물을 끓이고 커피를 내린다


참 신기한 호텔이다. 늘어지게 늦잠을 자야 마땅할 여행지에서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났다. 그것도 새벽 시간에 손수 커피를 내려 먹으려고. 커피포트 옆 작은 무드 등을 켠다. 작은 방 하나가 생겼고, 그 방 안으로 들어갔다. 원두콩을 글라인더로 천천히 그리고 정성스럽게 갈았다. 막 끓인 물을 '또로로록...' 핸드드립 커피를 내려본다. 묵직한 커피 향이 방안 전체에 퍼졌다. 고요함이라는 동굴 속에 웅크리고 있자니 신기하게도 마음 구석구석을 살펴볼 여유가 생겨났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계획하고 있는 일. 잊고 지냈던 기억, 감정, 추억들... 과거를 기억하는 공간이라더니, 잊고 지냈던 나의 감각들이 깨어난다.



'띵동- 조식 배달왔습니다'
  대문 앞으로 도착한 앙증맞은 아침식사 




객실 앞에 배달된 조식 꾸러미. 정말 정말 귀요미다!
따뜻한 빵과 반숙 계란 체리, 과일주스 그리고 견과류. 조식도 알차다


"아니, 아니 아니 잠깐만. (다급) 오빠 잠깐만 사진 찍어야 해" 아마도 이곳 굿올데이즈(good old days)호텔에서 내가 가장 많이 한 말이지 않을까. (미안해 남편) 그만큼 매 순간이 오래도록 기억하고 간직하고 추억하고 싶었던 순간이지 않았나. 모든 순간을 사진으로 남겨 놓고 싶었으니까.


분명 안내데스크에서 아침 조식이 객실 앞으로 배달 될 것이라는 사전 안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방문 앞으로 배달된 조식 꾸러미를 보고 심장이 멎을 뻔했다. 따뜻한 삶은 계란과 짙은 버터 향을 머금은 갓구운 빵, 체리 몇 알, 오렌지 주스, 견과류. 이렇게나 정성스럽고 앙증맞은 조식은 경험해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호텔에 묵기 시작했던 그 시점부터 이곳을 나서는 순간까지. 미래의 누군가가 이곳에 머물게 될 시간을 상상하며 디자인하고 세심하게 설계한 공간지기의 디테일에 또 한 번 더 감동할 따름이었다.




굿올데이즈 호텔에서 마지막은 오늘 여행에 대한 기록



오늘은 미래의 어느 날
다시 꺼내어 보고 싶을 소중한 순간


오래 전 인상 깊게 읽었던 소설책 한 권이 있다. 일본 소설가 히기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이 책에 등장하는 잡화점은 '편지'를 매개체 삼아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삶의 소중함을 깨우치게 해주었던 걸로 기억한다. 굿올데이즈 호텔 1층에도 미래의 나 혹은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서 보낼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마치 소설속 잡화점처럼. 마음에 드는 엽서를 골라 편지를 쓰고 안내데스크에 발송하고 싶은 날짜를 말하면 배송해주는 시스템이다.


편지를 쓰겠다고 펜을 잡고 앉으니, 괜히 진지해진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나 자신에게, 미래의 나에게 편지를 썼다. 거긴 안녕한지. 친절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마 나 자신도, 이곳 중앙동도, 세상 모든 만물도 시간이 흐르면 어떤 형태로든 변하고 달라지겠지. 지금의 중앙동이 그래왔던 것처럼.


찬란했던, 가장 빛나고 멋졌던, 전성기였던 그 시절의 중앙동. 그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해 세워졌다는 호텔은 또 다시 이렇게 말을 걸어온다. '오늘의 이 순간도 미래의 어느 날 다시 꺼내어 보고 싶을 소중한 순간이 될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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