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희수 Apr 08. 2023

내가 종이 신문을 읽는 이유

작은 성취가 만드는 기적

손때 묻은 노트 세 권이 완성됐다. 손바닥만 한 작은 노트에는 고민, 불안, 분노, 기대, 결심. 그동안의 변화무쌍했던 감정의 굴곡이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어느새 지난 2년의 시간은 '노트'라는 물성 있는 물체로 치환돼 있었다. 기분이 참 묘했다. 흐뭇하면서도 뭉클한, 복잡 미묘한 감정이 한꺼번에 스쳤다. 홀로 찾은 카페 구석에 앉아 노트를 여러 번 그것도찬찬히 훑어봤다. 시간을 돌이키듯.  


이른 새벽. 알람이 울린다. 귀를 때리는 알람을 끄고 다시 얼굴을 베개 속에 파묻었다. '더 잘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다시 느리게 몸을 일으킨다. 매일 1시간 일찍 일어나기로 다짐한 첫날이다. 평소보다 조금 이른 출근을 습관으로 만들기까지 숱한 실패와 좌절, 낙담, 자책 그리고 이따금의 성공과 잠깐의 성취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지금이야 몸이 먼저 반응하지만 매일 아침 꽤 오랫동안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을 지속했더랬다.


남편은 내게 말했다. '참 피곤하게 산다' 그도 그럴 것이 새벽마다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의 피해자는 남편이었을 테니까. ‘일어나지 못할 거면 잠이라도 편하게 자’라는 남편의 핀잔에도 굴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어렵사리 얻게 된 출근 전 자유시간에 꼭 해야 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름 아닌 ‘종이 신문 읽기’ 지루한 이 행위에 이름까지 붙였다.이름하여 ‘미라클모닝’. 내게 있어 신문 읽기는 의식에 가까웠다.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일상도 때로는 기적을 만들 수 있다는 의미를 담아 이름을 붙이고 애정을 담아 불렀다. ‘오늘 하루도 잘 지내보자, 꾸준히를 꾸준히 해보자. 스스로 믿을 구석 하나를 만들어보자. 당장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을 거야’라는... 다짐과 세뇌가 반쯤 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아침마다 집 앞으로 배달되는 신문에 직접 줄을 그어가며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하늘색 색연필로 줄을 그으면서 신문을 읽었는데, 색연필이 점점 줄어드는 것도 좋았다. 멈추지 않고 오늘도 나를 이기고 무언가를 지속하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오늘의 주요 키워드와 기사의 핵심은 뭘까’ 고민하며 논리력을 키우는 연습을 해나갔다. 단순히 기사를 읽고 내용 정리를 위해 마련한 노트에는 어느새 각종 메모들도 늘어났다. 독서를 하며 인상 깊었던 문장과 그때의 감상, 호기심을 자극했던 어느 공간에서의 영감의 기록, 부러울 만큼 ‘정말 일 참 잘하네 ‘라고 느낀 동료에게서 발견한 배울 점, 실수를 통해 배운 것 등 보물 찾기를 하듯 일상에서 느낀 점을 하나 둘 쓰다 보니 어느덧 세 권이 노트가 완성됐다.


영상의 밑그림이 될 아이디어를 내고 구체화하고, 기획의도에 따라 알맞은 사람을 섭외해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콘셉트에 딱 맞는 촬영장소를 물색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출연자와 밀당을 방불케 하는 눈치싸움의 커뮤니케이션의 고단한 과정을 거쳐 한 편의 영상을 만들어내는 영상 제작의 일을 하는 나로서는 평소 부지런히 쌓아 올린 경험자산은 곧 재산이 된다. 이 모든 일은 보통 짧은 시간 안에 대부분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더더욱 평소에 쌓아두는 경험과 생각들이 큰 도움이 될 때가 많다.    


그랬던 적이 있다. 회의에 들어가면 단 한 마디도 입을 때지 못했던 적이. 나에 관한 모든 것을 의심했던 적이. 분명하고 싶은 말이, 할 말이 있는데 입 밖으로 차마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고, 탁탁 떠올려야 할 경험 데이터 베이스가 없어서 버퍼링이 자주 걸렸다. 한 달 두 달이 아니라 꽤 오래 이런 상태가 지속됐던 거 같다. 많이 괴로웠으니까  기억도 또렷하고선명 하다. 그쯤이었던 것 같다. 각을 잡고 제대로 공부를 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을 것이. 무엇이든 무조건 경험하고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가짐을 바꾼 것이.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주변에서 ‘공부 좀 해야 되겠다. 공부 좀 해라’라는 식의 핀잔을 들었던 적이 있다. 돌이켜보니 꽤 여러 명에서 여러 상황에서 이런 말들을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몇 년이 흘러 내게 이런 말들을 건네었던 동일 인물에게서 아이러니하게도 ‘요즘 너무 인풋을 많이 하는 것 아니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잘하고 있는 걸까’라는 의심의 소리를 뒤로하고 묵묵하게 쌓았던 시간에 대한 보상처럼 느껴졌다. 불안의 마음은 최소한 방향은 맞는구나 하는 안도감으로 바뀌었고, 스스로에 대한 작은 확신의 씨앗이 싹을 띄웠다.


스스로 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는 일, 그 누구도 모르는 혹은 알아주는 않는 일이라 할지라도 지켜나가는 것이 주는 큰 힘을 어렴풋이 배웠다. 당장 크게 관련 없는 일 일지라도 스펙트럼을 넓혀가는 일이라 생각하며, 오늘도 나를 다독이며 무엇인가를 멈추지 말고 계속 해내자고 셀프 동기부여를 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현실판 기생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