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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rlotte Jan 20. 2022

나의 좋은 퇴근을 위해서

아이스 바닐라 라떼가 생각나는 날이 있다. 평소에 즐겨먹던 아메리카노는 생각나지 않는 그런 날. 오늘이 그랬다. 파란불에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를 당해버린 것 같은 날. 오전 업무를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느닷없는 일이 벌어졌다. 교통사고를 당하면 한방병원 1인실에 입원을 해야 한다는데, 사무실 안에서 일방적으로 당했을 때는 어디로 입원을 해야 하는지. 마음의 교통사고를 당한 돈도 힘도 없는 직장인이 갈 수 있는 곳은 김치찌개를 파는 식당과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파는 카페였다. 그래도 오늘은 기분전환 겸 카페에 가서 당 충전을 하는 걸로 일단은 만족하자며 나를 위로했다. 시옷으로 시작하는 비용이라고들 말하는데, 딱 그게 필요한 날이었다. 이런 날은 나에게 관대해진다. 평소 관리하던 식단도, 깨끗하게 정리하던 공간들도, 항상 사고 싶은 게 많아 인터넷 쇼핑을 참는 습관도. 정말 교통사고 난 걸로 따지면 입원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약국에서 반창고라도 사다가 덕지덕지 붙이는 꼴인 거다.


그렇게 점심시간에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바로 퇴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깟 일 때문에 피 같은 연차를 쓸 순 없기에 정신을 차려야 했다. 입사 3년 차, 아직 햇병아리지만 살아남기 위한 나름대로의 노하우는 있다. 또 시작이네- 라던지, 그동안 너무 조용했지, 그까짓 게 뭐라고 등의 말들을 중얼거리다 보면 해야 할 일들이 점점 눈앞에 보이기 시작하는데, 예전에는 상처 난 마음을 이끌고 움직여야 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더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 생각에 빠져 있는 게 뭔가 더 억울한 일인 것 같아서 방법을 바꿨다. 오히려 일을 더 열심히 해서 스스로의 자존감을 올리려고 하곤 하는데, 제법 효과는 괜찮은 것 같다. 가해자를 이긴 느낌, 퇴근길이 뿌듯해진달까.


'나의 좋은 죽음을 위해서'. 얼마 전에 읽은 여행에 관련된 에세이에 나오는 문장이다. 인도의 한 노인이 작가의 질문에 나의 좋은 죽음을 위해서 일을 한다, 라는 내용의 대답이었다. 읽을 때는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글을 쓰다 보니 이 문장이 절로 생각이 나면서 조금은 알 것도 같아졌다.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고 하던가, 왠지 모를 묘한 감정도 잠시, 온몸의 근육들과 신경들이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역시, 무리하긴 했던 게다. 시위는 내가 하고 싶은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래- 고생했다' 하고 동그란 달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가득 차오른 달을 보며 기분이 좋아야 하건만, 씁쓸한 마음이 가득 차 버린 퇴근길은 너무 어두웠다. 기분이 저녁 메뉴를 바꾸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 라는 마음은 상대적으로 힘이 너무 약했다. 뭘 시켜야 하나- 뭐라도 먹어야 될 것 같은데- 라는 생각만 가득한 뇌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결국엔 만족스럽지 못한 하루가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아니 평소에도 관대해져도 될 텐데. 하며 나한테 제일 관대한 사람에게 전화를 했다. 예상대로였으려나, 엄마였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아니- 말을 하지 않고 있어도 통화가 가능한 사람. 친구 같은 엄마라 너무 고마운 우리 엄마. 대단한 게 없는 딸인데도 항상 최고라며 응원해주는 든든한 사람. 밖에서는 하지 못한 잘난 척을 하다가 결국엔 오늘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다. 그 사이에 아빠도 퇴근을 하셨고, 그 소식을 들은 아빠는 역시나 위트 있는 말들로 나를 웃게 해 주셨다. 애교 없는 말들을 툭툭 던지는 퉁명스러운 딸보다 사랑한다는 말을 더 많이 하는 애교만점 우리 아빠, 덕분에 나는 오늘도 사랑을 듬뿍 받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교통사고로 시작했던 아침이, 특급 입원실에서 보내는 편한 밤으로 끝이 났다. 나름 공개적인 곳에 말하는 게 부끄럽지만, 침대 위에선 솔직해지기로 했기 때문에, 따뜻한 차 한잔의 힘을 빌려 말해봐야겠다. 부족한 게 많은 딸 곁에서 지금처럼 힘이 되어주셨으면, 항상 건강하시길, 소원을 빌 때마다 빼놓지 않는 한마디. 이렇게 쓰고 나니까 우리 집에서 제일 바쁜 동생도 생각이 난다. 요즘 들어 부쩍 오빠 같은 말을 툭툭 던지는 남동생. 귀여우면서도 든든하다. 곧 다가올 설에는 마주 보고 얘기할 수 있으련지, 사랑해요-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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