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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rlotte Apr 02. 2022

벚꽃이 필 때

유독 길었던 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왔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 처음 왔을 땐 집 앞에 한가득 피어 있었는데, 그 날을 기준으로 일 년 하고도 며칠이 지난 시점에서야 올해 벚꽃은 드디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동안 참 많은 것들이 변했다. 바람이 불면 버티다가 어김없이 흔들려 꺾일 것만 같던 내가, 이제는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바람을 따라갔다 다시 제자리를 찾고,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설명하는 것도 어려워하던 것도 한결 수월해졌다. 연말연초에 돌아봤던 일 년은 내가 뭘 하고 살았는지, 기억에 남는 것도 의미가 있는 것도 별로 없어 보였는데, 이렇게 같은 공간에서 작년의 나를 떠올려보니 아무것도 안 한 건 또 아니었나 보다. 이래서 일기를 꾸준히 써야 하는데, 아무것도 아닌 일상들이 궁금해지는 지금 같은 순간에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는지, 어떤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자리하고 있는지. 기록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사진으로 추억을 남기는 것도 좋아하는 편이려나. 사진이라는 게 좋은 순간들 위주로 모인 순간들이긴 하지만, 사실 그 안에 담긴 수많은 에피소드는 따로 적어놓거나 애써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떠오르곤 하니까. 불편한 기억들은 잊어버리고 행복하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는 라이프 스타일과 맞물려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건 행복했던 순간들을 사진으로 남겨놓는 일은 참 좋다. 각자의 취향이겠지만 난 그렇다. 촬영하는 그 순간까지 소모되는 게 아까워 눈으로 담고 온 몸으로 느끼는 게 좋다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사진으로도 남기고, 충분히 여유를 갖고 즐기는 것도 좋아한다. 기억은 왜곡되고, 역사는 기록된다는 말이 여기에도 해당되는지 모르겠다만 문뜩 떠오르는 저 문장의 뉘앙스를 빌리자면, 기록하지 않고 기억에만 남겨놓는 것도 내 시선 속에서 왜곡되어 나만의 감성으로 남아 추억이 되는게 아닐까. 이러나 저러나 추억이란건 내가 느끼는대로 기록되기 마련인 것 같다. 그럴거면 사진으로 남겨 더 선명하게 추억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다. 또 사진으로 그 순간을 담아놓으면 촬영하고 보정하는 사람만의 감성이 담겨있어 그 사람이 그 순간을 어떻게 기억하고자 하는지 보이는 것 같아서 더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지만, 내가 바라는대로 살아가길 원하고, 그렇게 노력하면서 꿈꾸고, 나를 채워가는 인생도 좋은 삶이지 않을까. 각자 동기부여와 추진력을 얻는 방법은 모두 다르겠지만, 나는 그런 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보여지지 않는 깊숙한 곳의 나와도 너무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 정도는 괜찮지 않으려나. 이건 다른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이기도 하다. 오히려 내가 행복해 하는 순간들과 좋아하는 것들을 남기고 기록하면서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지는걸 느꼈달까.이전의 나를 떠올려봤을 땐 많은 부분에서 다른 사람의 시선보다 내가 원하는 것에 더 집중하게 된 것은 확실하다. 아무도 바라지 않는 배려를 혼자 하면서 속앓이하고 힘들어하던 내 모습이 자연스럽게 옅어져가고 있으니까.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언젠가는 또 다른 상황들을 경험하고, 변하면서 지금 하고 있는 생각들이 변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는 또 다른 무언가를 알게 되지 않을까.


하루, 또 하루 일주일 내내 숨 가쁘게 다니던 출근길에 가득 피어난 벚꽃길 위를 금요일 퇴근길에 차분하게 걷고 있자니 문득 궁금해졌다. 딱 일 년 전 내가 겨우 실어온 짐들과 함께 달리던 그 강변길이. 벚꽃이 만개해있는 이 동네를 수없이 드나들며 내 행복을 바라던 그때가. 일 년 동안 어떤 행복을 찾았는지, 이제 또 일 년은 무슨 행복을 바라고 싶은지. 겨울에 태어났지만 겨울에 제일 약해지는터라, 새해에 세울법한 계획과 일 년을 되돌아보는 일을 이제야 하려고 마음먹게 되다니. 이제라도 걸으며 되새길 수 있어 다행인 거겠지. 앞으로는 항상 초조해지는 연말연초에는 마음응 편하게 먹고, 그때 즈음해오던 것들을 가장 많이, 화사하게 피어나는 벚꽃이 피어날 때 하는 걸로 해야겠다. 따뜻하기도 하면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 봄인데 겨울인 것 같기도 한 벚꽃이 피는 이때 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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