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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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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연안선 한 척이 눈발이 휘날리는 서해바다를 가르고 있었다. 오후 2시임에도 어둑어둑한 하늘 아래, 파도가 넘실대며 배는 연신 휘청거렸다. 그래도 갑판 위 아이들의 표정은 무척 밝았다. 계획에 차질이 생길 뻔한 순간, 천사와도 같은 은인 중학생들이 나타나 그들의 탐험은 문제없이 지속될 수 있었다. 대륙과 섬을 잇는 작은 도선은 하루에 두 차례밖에 운행하지 않았고, 마침 출항하는 배에 그것도 ‘공짜로’ 탈 수 있었던 것이다.
“덕적호를 탄 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 될 거야.”
누구보다도 기뻐했던 범석은, 무슨 영화대사 같은 말을 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쨌든 범석의 인맥 덕분이었던 것은 모두가 인정했다. 한달간 준비했던 것이 수포로 돌아갈까봐 통인시장에서부터 여기까지 오는 내내 얼굴에 근심이 드리워 있던 범석이었다. 원래 가기로 했던 제주도가 아닌 것은 마음이 걸리지만, 나름 무인도행 배를 탔다는 것에 이제야 마음이 놓인 듯 범석은 환하게 웃었다.
“우와! 갈매기다!”
“와, 진짜네! 갈매기가 엄청 많아. 우리 따라오고 있어!”
“야, 조심해. 떨어져! 뒤로 와!”
“우리 새우깡 가져온 거 있지 않냐. 그거 좀 꺼내봐.”
꾸무럭한 날씨에도 해맑은 아이들의 모습에 승객들의 얼굴에도 괜시리 웃음이 지어졌다. 50명 정원인 그다지 크지 않은 배였지만, 불안한 날씨 탓이었는지 오늘은 평소보다도 승객이 없었다. 정원을 채우지 않은 다소 가벼운 배는 흔들리는 눈보라에 이리저리 종잇장처럼 흔들렸다. 사실 출항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 사태를 예감하진 못했다. 하루에 두 차례밖에 운행하지 않았으므로 결항에는 신중을 가해야 했다. 변덕스러운 기상상황에서, 눈이 점차 그쳐갔던 2시에 결국 원래대로 운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새우깡을 높이 들고 날아드는 괭이갈매기들을 보며 깔깔거리다, 덕적호가 가르는 물살의 하얀 물거품을 보며 꿈에 젖어있기도 하고, 돌고래가 보인다며 바다를 향해 꺅꺅 환호성을 지르던 아이들. 어느덧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되어 쉬지 않고 단행되었던 여정이었다. 아이들은 무척 고단했다. 목적지가 정해지고 배에 탑승하여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 아이들에게 극도의 피로가 몰려왔고, 도착할 때까지 객실 안에 들어가 잠을 청하기로 했다.
두시간 즈음 지났을까. 준원은 잠결에 서늘한 기운이 목 주변에서 넘실대는 것을 느꼈다. 엉겁결에 깨어난 준원은, 비몽사몽한 가운데 목까지 차올라 눈앞에서 출렁이는 물을 보았다. 그는 아직 그가 심각한 악몽에 빠져있다고 생각했다. 육중하게 조여오는 수압으로 온몸을 제 맘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고 숨은 점점 더 가빠왔다. 준원은 이 꿈의 내용이 무척 기분 나빴으며 얼른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곧, 이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들 어디에 갔는지 그 많던 사람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선체 내부는 온통 어둠에 둘러싸여 앞을 제대로 분간하기 어려웠다. 어딘가에 있을 통로로 쏟아져 들어오는 물소리만이 온 신경을 자극했다. 가만 그 소리를 들으며 온몸을 옥죄는 차갑고 축축한 감각을 느끼고 있자니, 준원은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이것이 생의 마지막 순간인가. 죽음은 이렇게 영문도 없이 찾아와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부숴버리는 것인가. 의미 없는 발버둥과 가쁜 숨 내쉬기를 반복하며 준원은 점차 혼미해갔다.
잠시 후, 선체가 크게 휘청하며 어떤 거대한 힘이 준원을 위로 끄집어올렸다. 침몰하는 배에서 간신히 빠져나오게 되었지만, 이미 죽음의 문턱까지 간 준원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 괴력의 손아귀에 잡혀 이끌리는 대로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흘러가며 준원은 의식을 잃었다.
한참 후, 준원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쏟아지던 눈발이 어느덧 잠잠해졌을 때였다. 먹구름이 개며 점차 모습을 드러낸 오후의 태양이 수면을 반짝이고 있었다. 태양 옆에는 붉은 낮달도 버젓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두 개의 천체가 공존한 하늘은 오묘한 빛을 발산하였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준원은 문득 발의 감각이 없음을 깨달았다. 지면을 단단하게 딛는 그 익숙한 힘이 느껴지지 않자, 현재 처한 상황이 물밀 듯 밀려오며 자각되기 시작했다. 그렇다. 아직도 준원은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었다. 의지를 가지지 못한 몸뚱어리는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리며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알지 못했다.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았을까. 망망대해 한가운데에서 정신이 들 것은 또 뭐람.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검푸르기만 한 액체더미에 준원은 멀미가 났다.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다에는, 특히 준원의 주변에는 검푸른 색만 있지는 않았다. 준원의 주변은 바다의 다른 부분들보다도 유난히 반짝였고, 이 반짝임은 어딘가를 향해 길게 뻗어있었다. 준원은 그 길을 따라 세차게 흘러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를 자세히 들여다볼만한 여유 따위는 준원에게 없었다. 준원은 끝을 알 수 없는 바다에서 숨막히는 영겁을 느끼고는, 토악질을 해대다가 다시 정신을 잃었다.
등에 닿은 딱딱한 감촉을 느끼며 준원은 눈을 떴다. 단단한 지각이 준원을 떠받들 듯이 받치고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에 불편함을 느끼며 몸을 일으킨 준원은 눈앞의 풍경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드넓게 펼쳐진 바닷가 모래사장. 세찬 기운을 몰고온 파도가 지면에 부딪히며 하얀 물보라가 되어서는 사라졌다. 모래사장 곳곳에는 준원과 같은 조난자들이 파도에 떠밀려와 있었다. 낯익은 그 얼굴들을 보자, 준원은 눈물이 핑 돌았다. 살았다. 살아났다.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네 명의 동료들을 번갈아 마구 흔들며 준원은 미친 듯이 소리쳤다.
“일어나! 도착했어! 우리가 진짜로 무인도에 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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