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잠> 3. 연의 세계지도

03 현주

by HANA


연의 세계지도






현주




인생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부분을 얼마나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을까. 내가 지금 기억하고 있는 것들은 얼마나 온전한 것인가.

세월의 풍파 속에서 기억은 속절없이 왜곡되고 미화되며 퇴화해간다. 몹시도 부서지기 쉬운 것이어서 떠받들지 않으면 그 형체를 보존하기가 쉽지 않다. 육십 가까이 살아오면서 웬만한 기억들은 변질된 채 사라졌고, 그 사건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쩔 땐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는지조차 가물가물했고, 꿈만 같았던 그 일이 차라리 그냥 꿈이었기를 바라기도 했다. 아직도 그 얼굴이, 그날의 정취와 풍경들이 생생하게 떠올랐지만 내가 얼마나 왜곡 없이 온전하게 기억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차라리 전부 내 망상이었음을 인정하는 것이 마음이 편안했다. 머나먼 옛날 잠결에 읽었던 어느 동화의 무섭고 슬픈 장면들이었음을, 사실은 이게 정답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고,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며 위로를 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여름날 이런 나의 바람은 완전하게 깨졌다. 연이의 책상에 놓인 스케치북은 지난날들이 결코 망상이 아니었음을 명실히 증명해주었다. 또한, 일주일째 집을 활보하고 다니는 저 아이가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맞음을.

연이가 평소 세계지도책이라며 보물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스케치북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이 페이지는 연이가 그린 그림이 아니다. 나는 알 수 있다. 연이는 이 그림을 절대 그릴 수 없다. 왜냐하면 이건 내가 그린 그림이기 때문이다. 행복만 가득한 아름다운 나비섬. 아무도 없는 집의 어느 구석에 웅크려 앉아, 최대한 화려하게 그림을 그리며 무서움을 달랬던 여러 날들이 있었다. 나는 늘 똑같은 그림을 그렸고, 내가 그린 그림을 보며 실제로 세상 어딘가에 이런 곳이 정말로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희망 같은 것을 꿈꾸며 무서움을 견뎠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모사해낸 나비섬의 모습을, 연이의 스케치북에서 보자 소름이 돋았다. 까마득하게 사라져가던 어린 시절이 느닷없이 튀어나와 뒤통수를 갈겼다. 무방비 상태로 맞은 지난날들은 여전히 쓰라렸고, 파노라마처럼 스치는 여러 장면들 속에서 또다시 또렷해지는 기억들이 있었다.

이 지구에 나비섬의 모습을 이토록 생생하게 그릴 수 있는 사람은 딱 두 명뿐이다.

나, 그리고 내가 그림을 보여주었던 유일한 사람.


점차 그쳐가는 줄 알았건만, 빗줄기가 다시 거세지기 시작한다.

온종일 방 안에서만 놀던 연이와 그 아이는 갑갑했는지 빗줄기가 약해진 틈을 타 밖으로 나갔다. 베란다 창문으로 집 앞 공터에서 놀고 있는 연이와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야무지게 장화도 신고 나가 웅덩이에서 첨벙거리며 아이에게 물을 튀기고 있는 연이다. 비가 거세진 것을 느꼈는지 두 팔로 머리를 가리며 하늘을 올려다보던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베란다에 있는 나를 본 것일까. 아이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나를 응시했다. 순간, 얼른 창문가에서 떨어졌다. 소용돌이치는 심장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처음 연이가 그 아이를 집에 데려왔을 때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이름도 ‘준원’이었다. 외모도 이름도 나이도 똑같은 그 아이는, 사실 존재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이었다. 단지 동명인일 뿐인 그 아이를 보고 떠올려버린 과거들에 이성의 끈이 잠시 풀린 거라고 생각했다. 집을 잃어 갈 곳이 없다는 딱한 사연도 이상하게 들렸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아량을 베풀고자 했다. 그 아이가 오고 악몽의 강도는 더욱 심해졌고 집안에서 이전과는 다른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으나 궁극적으로 아이는 나를 생전 처음 보는 듯했다. 아이는 나를 몰랐다. 그게 내가 진정할 수 있는 이유였다.

그런데, 연이의 스케치북을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아이는 최준원밖에 없다. 그런데 어떻게 그 아이가 이렇게 온전하게 존재할 수 있을까.





“장현주?”


나지막한 저음이 들려왔다. 깊숙한 동굴 저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타오르는, 오랜 시간을 품은 그 익숙함에 선뜻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장현주 맞아?”


연이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며 매무새를 정리해주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고는 있었으나, 방정맞지 않은 놀라움의 표정을 장착하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문 앞에 그 아이가 서 있었다.


“어른 이름을 그렇게 부르면 못 써.”

“맞아?”

“...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니? 연이가 그런거도 알려줬어?”

“장현주.......”


이 아이는 왜 지금 내 이름을 이렇게 함부로 되뇌고 있는가. 괜히 불안해지게 말이다. 내 예감이 적중하지 않기를 바랐다.


“나, 최준원이야.”

“알지. 네가 최준원인 건 여기 사람들 다 아는걸.”

“나 정말 모르겠어? 기억 안 나?”


아이는 연이의 그림들이 무수하게 채운 벽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한쪽 벽에 붙어있는 수많은 세계지도 그림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정확하게 그의 손가락은 세계지도 속 나비섬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 최준원이라고.”


정적이 흘렀다. 더이상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도무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인정해야만 했다. 나를 바라보는 그 아이의 눈에도, 그 아이를 바라보는 나의 눈에도 서로만이 알 수 있는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 때로는 지나친 부정은 긍정을 의미하고, 기나긴 침묵은 암묵적인 긍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떨리는 동공을 통해 우리는 서로의 정체를 확신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왜 하필 이 동네에서 연이를 만나서 이 집에 오게 된 걸까, 나는 대체 여기서 뭘하고 있는 걸까.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것들 투성이었는데. 이제야 다 해결된 거 같아.”

“......?”

“장현주. 결국, 누나를 보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벽에 기대어 주저앉은 아이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어둠 속에 웅크린 형체를 보며 머리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나를 보러 여기에 왔다니.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눈을 감고 우리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무서웠던 그 날. 그 애와의 마지막 만남. 마지막 말. 이별. 그리고,

준원이는 그때 그렇게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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