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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나를 반겨준 것은 우중충한 하늘이었다. 곧 비가 한바탕 쏟아질 것 같으면서도, 오늘만큼은 절대 비 한 방울 흘리지 않겠다고 이를 악 문 듯한 하늘을 보면서 밤새 어딘가에 갔다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까이에 있지만 멀기만 한 곳. 간절히 원했지만 또 간절히 미워했던 누군가를 만나고 온 것만 같은 이 기분은 뭘까. 우산을 가져갈지 말지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빈손으로 집을 나왔다.
7년 된 여자친구와 헤어진 지 딱 7일 되는 날이다. 열다섯 살, ‘전국 청소년 음악 콩쿠르’에서 나는 피아노를 쳤고, 그녀는 노래를 불렀다. 그 때까지만 해도 우린 꿈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의 순수한 눈동자에 비춰진 서로의 모습은 너무 아름다웠고, 이 멋진 세상을 사랑하는 당신과 음악 속에서 영원히 함께 하리라는 정말 말도 안 되는 꿈을 꾸었다. 그 당시 우리에겐 또래의 다른 친구들과는 다르게, 학교에서 지내는 시간보단 무대에 서는 시간이 더 많았다. 모든 게 경쟁으로만 치부되었던 우리는, 같은 학교 학생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서로에게 조금 의지했는지도 모른다. 날마다 다양한 경험과 낯설고 두려운 환경 속에서, 그나마 소소한 장난을 치고 함께 까르르 웃으며 사랑이 싹텄던 것 같다. 사랑이 이 세상의 전부라고만 생각했던 그 시절. 우리는 함께 꿈을 꾸었고, 어쩌면 내 인생 최고의 황금기라고 할 만했던 그 시절은, 어느 날 누나가 사라지면서 막을 내렸다. 불안하게 초인종이 마구 울리던 날. 아버지와 함께 아무 생각 없이 택배로 배달되어진 상자를 열었던 날. 택배기사가 미세한 표정의 변화를 보이며 기침을 한 번 하고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누르던 날. 언제나 나의 공간 속에서 작은 울림으로 꿈을 예쁘게 장식하던 피아노 소리가 멎었다. 그 이후 아무리 두드리고 내리쳐도 나의 피아노는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았다. 눈을 하얗게 치켜뜨고 굳어있는 누나의 싸늘한 주검처럼.
“난 피아노 치는 네가 좋았어.”
여자친구는 울었다. 아직도 그녀의 눈동자에는 어린 시절 아름다웠던 나의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난 더 이상 피아노를 칠 수가 없어. 그건, 너도 잘 알잖아.
“치면 되잖아. 다시, 예전처럼, 피아노 치면 되잖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데, 언제까지 죽은 누나 껴안고 살 건데!”
아니야. 그거랑은 별개야. 난 이제 누나 얼굴도 가물가물하다고. 단지, 피아노만 보면 숨이 턱하고 막혀와. 피아노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난 꿈을 꾸는 네가 좋아.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지금. 네 눈동자에 뭐가 있는지 알아? 아무것도 없어. 네 눈동자에 내가 비춰지지 않아. 그냥 아무것도 없어. 그게 너무 싫단 말이야. 무서워.”
아니야.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여전히 꿈을 꾸는 네가 너무 부럽고 점점 내게서 멀어져 가는 네가 가끔 두려워. 이게 사랑이 아니고 뭐겠어.
“사랑이 아니야. 넌 네 안에만 틀어박혀서 날 봐주지를 않잖아.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더 힘들어야 돼. 빈아, 다시 원래 네 모습으로 돌아와. 제발. 언제까지 이러고 살 거야. 빈이 너답지 않게.”
“이게, 원래 내 모습이야.”
우리는 헤어졌다. 7년 동안 쌓은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이렇게 쉬운 거였구나. 사랑이라는 건. 7년 동안 나의 전부라 여기며 애지중지 만들어온 나의 종이성이 소나기 한 번으로 철저하게 짓밟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프진 않았다. 오히려 하나의 어려운 과제를 해결해낸 것처럼 홀가분하기만 했다. 여자친구의 눈을 보는 것은 점 점 고통스러워만 갔다. 나는 이렇게 크고 너덜너덜해졌는데, 그녀의 눈에 비친 나는 여전히 상처 하나 없이 꿈 많은 작은 소년이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점점 예뻐져만 가는 그녀에게서 괴리감을 느꼈고 이별을 예감했다. 그 날이 그 날이었을 뿐이다. 그녀와의 종이 성을 가위로 싹둑 잘라버린 날, 나는 친구들과 밤을 새서 술을 마셨다. 딱히 슬프거나 괴롭거나 한 건 아니었고, 그저 나는 술을 마시면서 내내 한 생각만 했다. 이젠. 진짜로. 다시는. 피아노를 치지 않겠어.
7년이 통째로 없어진 지 7일 되는 날. 내 인생의 공백기처럼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것만 같다. 편의점 쇼윈도에 웬 남자가 한 명 비춰진다. 그의 눈을 뚫어지게 보고 있자니 낯설기만 하다. 독하게 눈을 부릅뜨고 절대 물 한 방울 흘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하늘에서 막아둔 둑이 터지듯이 와르르 물이 쏟아진다. 하늘은 누구의 그림자들이 그렇게 길게 늘어진 건지 어둑하기만 하다. 사람들은 모두 보이지 않는 그림자에 뒤덮여 자신의 젖어있는 공간을 감쌌다.
하늘색 우산 하나가 스쳐지나간다. 기울여진 우산 속에서 무언가를 찾는 듯 가방을 뒤적거리는 그녀가 보인다. 그녀의 가방에서 지갑이 툭 떨어진다.
“엇. 저기요! 저기, 지갑 떨어졌는데!”
내 소리를 못 들은 건지 못 들은 척하는 건지, 그녀는 가방 속에 얼굴을 파묻고 빠른 속도로 사라져갔다. 나는 지갑을 열어 보았다. '허빈우'하고 뭐라뭐라 적혀있는 그녀의 주민등록증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녀의 주민등록번호와 주소가 내 것과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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