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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귄일호 Nov 07. 2017

나는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신입 UX 디자이너의 큰 그림 엿보기

나는 런던 리버풀 스트리트 역 비숍 스퀘어 빌딩에 있는 소시에떼 제네랄의 신입 UX 디자이너다.


처음엔 막연한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런던의 금융 빌딩이 모여있는 이 곳으로 매일 출퇴근을 한다니. 하지만 사람은 참 간사한지라, 이런 심리적 보상이 매 순간 지속되진 않는다는 것을 오래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처음엔 빨리 이 곳에 적응해서,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해야지, 많이 배워야지 다짐하며 온 힘을 다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적응은 익숙함, 그리고 지루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적당히 적응하려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런 노력 중 하나가 '나는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파악하는 것이다.


입사 후 첫 주엔 컴퓨터를 셋업 하고, 여러 가지 액세스를 받는 일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 한국인들이 얼마나 빠른가... 아이디, 비번을 설정하고 메일을 작성하고 전화하고 하는 일들은 빠르게 진행되었고, 나는 금세 할 일이 없어졌다. 그리고 여기서 이 긴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의구심이 들었다. 아마도 내가 너무 회의적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큰 그림을 그리는 일은 동기부여에 너무나도 중요했다. 포토샵으로 미세한 픽셀 단위의 UI를 수정하는 일은 좋다. 그저 그 일 너머의 배경, 예를 들어 유저나 프로덕트 오너가 어떤 피드백을 줬는지, 왜 그런 피드백이 있었는지 궁금할 뿐이다. 더불어 내가 장기적으로 이 일을 하면서 팀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파악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똑같은 포토샵 작업을 해도 나의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그래서 큰 그림을 혼자서라도 그려보는 것은 참 중요하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기 때문에 UX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고, 길게 내다봤을 때에는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줄 아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아직 햇병아리 신입인 지금은 회사에서 시니어 디자이너, 매니저, 프로덕트 오너, IT 엔지니어들이 서로 협업하여 어떤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지, 그 과정을 엿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하다.


자, 서론이 많이 길었다... 이제 내가 소시에떼 제네랄이라는 투자 은행의 디지털 팀에서 엿보고 있는 큰 그림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은행에서도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정립하고 적용해야 한다

소시에떼 제네랄을 포함한 투자/증권 은행은 정말 다양한 서비스를 개인부터 투자자, 기업, 기관, 나라 등 넓은 범위의 클라이언트에게 제공한다. 처음 입사하기 전에는 내가 쉽게 접하는 개인 온라인 뱅킹이나 핀테크 스타트업들의 송금 서비스 정도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었다. 주식이나 선물 투자 등의 금융 서비스에 대한 지식이나 관심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개인을 대상으로 한 나머지 전부가 우리 팀의 업무 범위이다. 내가 하는 일은 SG 내부의 트레이더나 애널리스트가 주요 유저인 폐쇄형 리서치 서비스의 UX/UI를 개선한다던지, 투자 기관이나 개인 트레이더가 주식을 거래하는 서비스의 플랫폼 디자인/개발을 보조하는 것 등이다.


이러한 수십 개의 복잡한 금융 서비스들은 보안이 강화된 내부 서버를 통해 웹으로 보통 제공된다. 그렇기 때문에 디자이너로서 웹 기반의 서비스를 주로 다루고, 그런 웹 사이트나 웹 프로그램에는 통일된 우리 회사 만의 디자인 가이드라인이 적용하는 일을 한다. '가이드라인'이라는 표현은 UX 디자인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두루 쓰이는데, 쉽게 '지침'이나 '안내선'의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수십 개의 금융 서비스들에 일괄적으로 적용될 디자인 지침을 마련하고 이를 적용하는 과정인 것이다. 가끔 가이드라인에 포함되지 않는 디자인 요소가 필요한 경우에는 디자이너가 필요한 요소나 방법론들을 디자인하고 제안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SG Markets (https://info.sgmarkets.com/en/)에서 제공하는 금융 서비스들의 유저 테스트를 진행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론들을 조사하고 어떻게 우리 서비스에 적용할지 제안한다.


이렇게 기존 서비스와 신규 서비스에 일관된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적용하고, 이를 관리하기 쉽도록 정리하고 적용하는 것이 UX 디자이너의 중요한 역할이자, 내가 엿보고 있는 은행 UX 팀의 큰 그림 중 하나이다.




모든 뱅킹 프로세스는 디지털화되고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증권/투자 은행에는 수도 없이 많은 복잡한 금융 서비스들이 있다. 처음 소시에떼 제네랄 런던 지점에 출근했을 때, 오래된 인터페이스가 가득 찬 여러 개의 모니터를 번갈아 보며 일하고 있는 슈트 입은 뱅커들을 보고 정말 신기했다. 여기서 '오래된' 인터페이스란 검은색 바탕에 빨간, 노란, 파란색의 원색이 가득 찬 프로그래밍 화면과 비슷한 블룸버그 통신 화면을 말한다.


사실, 투자은행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거래는 이미 디지털화되었다. 주식을 거래하거나 금융 상품에 투자하는 일은 모두 컴퓨터로 이루어진다. 내가 엿본 바로는 소시에떼 제네랄의 UX 디자이너는 이미 디지털화되어있는 기존 금융 서비스들을 더 사용자 편리하게 리디자인하여 제공하는 일을 한다. 매우 작은 글자와 일관성 없는 마진, 그리고 복잡한 레이아웃의 기존 화면을 I.A.(Information Architecture)부터 화면 구성, 디자인 가이드라인과 최신 부트스트랩에 맞춘 UI 디자인 등의 과정을 통해 리디자인한다. 물론 일반적인 UX-UI-GUI 의 과정을 거치지만, 각 서비스의 상황이나 목적에 따라 과정은 달라질 수 있다.


소시에떼 제네랄은 SG Markets(https://info.sgmarkets.com/en/)이라는 플랫폼을 통해 다양한 금융 서비스들을 제공하고 있다. 거래가 이루어지기 전(Pre-trade)부터 실행(Execution), 거래가 이루어진 후(Post-trade), 그리고 자금 운용(Financing) 단계로 구분되어 있고, 각 단계마다 다양한 서비스가 존재한다. 우리 팀에서는 각자 1-2명의 UX 디자이너가 각 서비스를 맡아 진행을 하고 있다. (각 서비스를 어떤 과정을 통해 기획, 디자인, 개발하고 관리하는지는 조만간 자세히 정리해봐야겠다.)


정리하자면, 소시에떼 제네랄뿐만 아니라 런던의 다른 투자 은행들 역시 자신들의 뱅킹 프로세스를 모두 디지털화하고, 사용자 중심적으로 디자인하는 단계를 거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적인 금융권에서도 사용자 중심적인 디자인 씽킹 사고방식과 방법론은 점차 주목을 받고 있는 상황이고, 이를 담당할 줄 아는 UX 디자이너들을 계속해서 채용하고 있다.





은행 인하우스 UX팀의 전문성을 강화해야 한다

보통 회사의 규모가 큰 경우에 자체적으로 디자인 팀을 구성하고 R&D 인력으로 키운다. 하지만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은행이 인하우스 UX 디자인팀을 크게 구성하고 있지는 않다. 현재는 리테일 뱅킹에 관련된 B2C 금융 서비스들에 한해서, UX적인 방법론과 디자인 프로세스를 적용하기 시작한 단계인 듯하다. (예를 들어, 최근 큰 주목을 받은 '카카오 뱅크'...) 하지만, 앞으로는 은행을 포함한 금융 산업군의 회사들이 자신들의 인하우스 UX팀을 갖출 것이다. (아마 이미 진행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런던의 금융권에서는 최근 들어 UX/UI 디자이너를 뽑는 공고가 많이 뜬다. J.P.Morgan, BCG, HSBC, RBS 등 굵직한 투자 은행, 금융 컨설팅 회사 등에서 UX 팀을 꾸리고 있다. 소시에떼 제네랄 이외의 다른 금융권 회사에서 직접 일해보지는 않았지만, 최근 뉴욕과 런던을 주축으로 금융업계의 UX 가 대두되고 있다는 점을 몸소 느낄 수 있다. 최근 런던에서 인비전(Invision, UX/UI 디자이너들이 간단하게 프로토타이핑하고, 피드백을 주고받을 때 주로 사용하는 프로그램)이 주최한 'Finance+Design' 행사에서도 이러한 트렌드를 읽을 수 있었다. 행사는 금융권에 종사하는 UX 디자이너 혹은 UX 매니저 4분이 패널로 나와 파이낸스 분야의 UX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는 장이었다. 워낙 보수적인 집단인 은행인 데다가, 클라이언트의 정보 유출이 자칫하면 엄청난 금융 사기로 번질 수 있기 때문에, 규제와 제약이 매우 많다는 것이 한계로 꼽혔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며 인하우스 UX 팀을 꾸리고 있는지 등의 사례를 들으니, '정말 변하고 있구나..' 실감할 수 있었다.


사실, 은행의 UX 디자이너로서 일하면서 겪는 한계도 많다. 하지만 금융권에서의 UX 성장 가능성과 업계의 특수성을 전문성으로 승화시킨다면, 한계를 기회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가 소시에떼 제네랄 디지털 팀에서 그려가고 있는 큰 그림을 혼자나마 엿보고, 이를 동기부여로 삼고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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