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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선 Feb 07. 2024

2월 7일

원고 정리하다가

원고 정리 하다가 ​​



2022년 9월 28일


하필이면 가짜라는 괴로움에 시달리는 내가 상봉몰이 한 이벤트에 또 당첨되었단다. <예수가 하려던 말들>(김호경

뜰힘)



오래전, 어느 날이었다. 교회의 담임목사와 장로들의 저녁 식사에 초대받았다. 나는 그 교회에 속해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주변인이었다. 교회 아닌 캠퍼스에서 떠돌이처럼 지냈다. 교회는 나와 같은 캠퍼스 선교사를 그런 자리에 부르지 않았다. 그와 같은 초대에 낀 적이 없다. 그날은 저녁을 사는 한 장로가 특별히 초대했단다. 저녁 식사가 끝난 후, 그 장로는 저녁을 사게 된 이유를 들었다. 주식을 샀다. 주식을 사면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사탄의 세력이 돈을 끌어가지 말게 하시고 당신의 종인 내게 돈이 오도록 해주십시오.” 이런 기도는 계속되었고, 기도한 대로 자신이 산 종목의 주가가 올라 투자 금액의 몇 배가 되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의 믿음이라는 게 웃겼고, 그런 그의 믿음이 부끄러움 없이 말해지는 상황에 속이 뒤집혔다. 그런 역겨운 자랑을 듣게 하려고 한낱 주변인, 어떤 자리에도 부르지 않던 나와 동료들을 초대해준 게 그야말로 미쳐가는 종교계의 현실이었다.


그 상황에서 더 실망한 건, 누구에게나 청빈하게 여겨지는 목사의 농담이었다.



“그래? 그러면 그런 돈은 남 전도회에도 내어놓아야지.”



그건 농담이어야 한다. 그게 농담이 아니라면 청빈하다고 인정받는 그분은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한 사람일 테니까. 그 상황을 이해한다. 담임목사로 있는 교회의 장로가 돈을 벌었다고 자랑하며 저녁을 대접하는 자리에서 “그건 바른 기도도 바른 믿음도 아닙니다.”라고 초를 치긴 어려울 테다. 그런 자리에서 목사라면 어땠어야 할까. 그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농담을 했을까? 굳이 농담할 필요까지 있었을까!



지금 그때 남 전도회에 내놓은 돈으로 무엇을 하는 게 좋겠다고 했는지 기억이 나진 않는다. 남 전도회의 ‘유흥’을 위한 돈을 말한 건 기억한다. 그런 말이 나오는 상황이, 그런 상황을 듣고 그렇게 농담하는 자신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 나와 동료라는 사람은 별 것 아니었을까. 그 세계에서는 그런 농담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일까. 아니 어쩌면 정말 그가 받은 기도 응답이란 게 진짜 믿음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때부터 그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다.



“예수 당시의 사람들이 뒷목을 잡을 만큼 놀랐던 이야기에 나는 왜 놀랄 수 없는가? 이것이 비유에 대한 관심의 첫걸음이었다. 수많은 비유 설교를 들으면서 나는 놀란 적이 거의 없다. 비유에 대한 해석들은 단지 자본주의적 희망만을 쓸어 담기에 급급한 것처럼 보였다. 비유는 우리의 탐욕을 토닥거려 줄 뿐이었다. 어디서든 부자가 되는 수백 가지 방법을 들을 수 있는 세상이 아니던가! 예수가 이와 같은 이야기를 했으리라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다시 예수에게로 돌아가 그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예수의 찰진 비유를 듣고 놀랐던 그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들처럼 놀라고 그들처럼 고민하며 하나님 나라를 희망하고 싶었다. 그들처럼 도전받고 싶었다.” <예수가 하려던 말들>(김호경

뜰힘) 15.



“하나님의 통치를 세상에 통치에 끼워 넣으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왕의 평화로 덮으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가 드러나는 일상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는 것이 하나님 나라 비유다. 하나님 나라 비유는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를 통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이끄는 관문이다.” 14.



나는 다른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평온한 삶을 살고 있다. 자본주의의 이기적인 혜택(?) 안에서, 그리고 온갖 기술의 편리함을 누리며, 자연을 훼손해가며 행해지는 토건 국가의 토건주의가 이룩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 할 말이 없고 부끄러운 사람이다.


그러나? 아니 그래서?, 대세를 거스르지 못하는 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대중의 올바른 이해가 대세의 흐름을 바꾸어 혹 나의 삶이 조금은 덜 부끄러운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만들어 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가 하려던 말들을 많은 사람이 알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비겁하게도 나의 본 모습이다.




10월 3일


“주인이 내게서 청지기 직분을 빼앗으려 하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옳지. 좋은 수가 있다. 내가 청지기의 자리에서 떨려 날 때에, 나를 자기네 집으로 맞이해줄 사람들을 미리 마련해야 하겠다. 그래서 그는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다가, 첫째 사람에게 “당신이 내 주인에게 진 빚이 얼마요?” 하고 물었다. 그 사람이 “기름 백 말이요.” 하고 대답하니 청지기는 그 사람에게 “자. 이것이 당신의 빚문서요. 어서 앉아서 쉰 말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식으로 빚을 줄였을 때, 주인은 그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였다. 그것은 그가 슬기롭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_ (누가복음 16:1-8) 불의한 청지기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성경 말씀이었다. 오늘 비로소 깨닫는다. 처음으로 내 멋대로 하느님을 발명한 게 1984년,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한 게 1987년, 신학을 시작한 게 1998년, 목사 안수를 받은 게, 2002년, 목사직에서 은퇴한 게 2014년. 1984~2014년까지. 무려 34년 만에 처음으로 누가복음 16:1-8의 ‘불의한 청지기’ 본문을 이해하게 되었다.



“(전략)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 것은 주인의 재산에 손해를 입힌 것뿐만 아니라 주인의 명예를 훼손했음(신뢰할 수 없는 청지기를 둔 사실)을 의미한다. 이는 주인에게 매우 치명적이다. 동시에 청지기에게도 치명적이다. 주인의 명예를 떨어뜨린 청지기가 다른 주인 후원자를 찾는 것은 무척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주인을 찾을 수 없다면 청지기는 땅을 파거나 구걸을 할 수밖에 없는 신세로 전락할 것이다. 그가 낸 꾀는 그야말로 기상천외하다. (…)주인의 첫 번째 낭비에 해고를 경계한 반면, 두 번째 낭비에 대해서는 칭찬한다.


청지기로부터 탕감을 받은 빚진 자들은 그 고마움을 주인에게 돌린 것이다. 탕감을 통해 중간에서 마음을 써준 청지기의 관계가 돈독해졌을 것은 분명하다. 더 나아가 이 탕감은 궁극적으로 예기치 않은 은혜를 받은 주인의 명예를 드높인다. 여기서 주인의 재산의 손해를 이유로 빚을 탕감한 청지기를 해고한다면 주인은 삽시간에 자신의 욕심만 챙기는 사람으로 소문이 날 것이며, 그의 명예는 또다시 추락할 것이다. 그는 청지기를 관리하지 못하는 사람일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는 악한 고리대금업자가 될 것이다. 주인이 위기를 벗어나는 방법은 청지기를 칭찬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하여 불의한 청지기는 빛의 아들, 종교적 열심을 가진 유대인, 스스로가 의롭고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보다 나은 사람이 된다. (…) 주인은 돈을 탕감해주는 청지기의 슬기로움을 돈을 쫓는 빛의 아들의 탐욕과 대조시킨다. 거들먹거리며 돈을 좋아하는 것보다는 대놓고 불의하지만 빚진 자들에게 돈을 탕감해주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불의한 방법으로 그들의 빚을 탕감해주는 이 비유에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는 설명이 덧붙는다. <예수가 하려던 말들>(김호경

뜰힘)



빚은 졌던 신세에 불과했던 빚을 탕감받은 자들은 어느새 ‘빚진 자’에서 청지기를 ‘살리는 위치’에 서게 된다. 소외의 자리에서 참여의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며칠 전 정경환 대표가 돌봄민주의를 언급했다면, 예수의 비유는 경제민주주의를 보여준 것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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