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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선 Feb 10. 2024

2월 5일

“고전 읽기, 그리고 쓰기” 시즌 1에 6분이 참석했는데 2기는 10분이 모였다. 첫 모임 <고전을 만나는 시간>(앨런 제이콥스

) 에 이어, 오늘은 <이방인> 각기 다른 번역본을 읽고 만났다.

  

혼자라면 불가했을 풍성한 나눔이 있었다.

고전을 읽고, 함께 읽어야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알 수 있


서로 다른 생각, 성격과 경험.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예외 없이 존재하는 부조리.


“카뮈에 의하면 부조리는 인간의 숙명이다. 카뮈의 세계가 합리와 비합리, 도덕과 배덕, 태양과 바다, 긍정과 부정, 고통과 기쁨, 광기와 이성 등 반대되는 두 항의 양립을 특징으로 하는 것은 그러므로 필연적이다.” <알베르 카뮈>(유기환

살림) 23.




참여한 분들 한분 한분이 글을 풀어가는 형식과 내용이 다르고, 같은 주제를 들여다보면서도 각자의 서로 다른 날카로운 관점으로 글 안의 특징적 소재를 끄집어내는 덕에 나는 빛에 대한 다양한,  놓쳤을 지도 모르는 의미를 깊이 생각할 수 있었다. 모두의 글에서, 그리고 글로 드러내지 못한 생각을 나누며 비로소 카뮈라는 사람, 이방인이라는 작품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더 가능해진다.


쓰고 있는 원고를 정리하다, <진리의 발견>(마리아 포포바

다른)을 읽던 중, 손자가 커서 읽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써놓은 편지에서 발견한 글이 눈에 들어왔다.

 

“쓰려고 하는 글이 글을 쓰는 사람보다 훨씬 크다. 그래서 글을 쓰려고 하는 그 내용을 깊이 알려고 해야 한다.”


지난번 함께 읽은 <고전을 만나는 시간>에서 앨런 제이콥스가 같은 말을 했다. 미국의 건국 이념을 작성한 미국의 건국자들은 실제로는 건국이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그 건국이념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이해된 것이다. 우리 역시 우리가 안다고 생각한 어떤 것들에 대해 조금씩 더 알게 될 것이며, 아마도 끝까지 알지 못하게 될 수 있다. 아니 그렇다.




뫼르소가 마주한 부조리, 법, 종교, 죽음, 혹은 어떤 개인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리고 유난히 많이 강조되는 빛! 알제를 싱징하는 빛!

부조리의 총체를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 때문에 따뜻하고, 그것 때문에 뜨겁다.

그것 때문에 좋고, 그것 때문에 견딜 수 없다. 그것 때문에 사람도 죽인다.


세상이 시대가 혹은 지역이  권위를 부여한 유한하고 지엽적인 가치, 질서,

도덕관, 권리들, 종교가 규정해놓은 신, 국가 권력, 종교 기관과 종교인, 제도 등등을 지칭할 수 있을까?


각각 고유하게 존재하는,  스스로 있는 자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고,

스스로 창조하는 삶을 살아갈 자에게 마치 보편타당한 존재 형식이 있다고 가정하고


-“토라에서 거듭 강조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에게는 형상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을 금지한다. 하나님은 모든 표현, 모든 범주를 초월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될 것이 될 것이다.(I will be what I will be)” (…) 하나님은 한정되거나 정의될 수 없다. 그렇게 하려는 시도는 우상 숭배의 한 형태다. 그렇다면 “형상”은 특별한 형태를 소유한 것과는 전혀 다른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것임에 틀림없다. 창세기 1장의 핵심은 하나님이 자연을 초월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분은 자연의 법칙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분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심으로 우리에게 그와 비슷한 자유를 주셨고, 그리하여 스스로 창조할 수 있는 사람을 창조하셨다.”(36)

“토라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이며, 자유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가장 위대한 선물이자 가장 운명적인 선물이다.”(37) -조너선 색스 <랍비가 풀어내는 창세기>한국기독교연구소 -


그 형식 안에 각각의 존재를, 혹은 모순되는 상대 가치를 욱여넣으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을까! 부조리!




뫼르소가 마침내 다정한 세계를 느낀 곳이 빛이 들지 않는 곳이다. 강력한 부조리가 결여된 곳.


"<이방인>의 마지막 몇 페이지는 형이상학적 반항의 폭발 그 자체이다. (…) 뫼르소도, 사제도, 소설가도, 독자도 모두 처형일만 다를 뿐 사형수이기는 매한가지다. 부조리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는 사제에 대한 분노는 사형집행일 날 최대한의 증오의 함성에 대한 소망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부조리를 의식하지 못하는 구경꾼들이 뫼르소를 증오하면 증오할수록 그의 죽음은 더 부조리한 죽음이 되기 때문이다. 카뮈에 의하면 뫼르소는 부조리한 진실의 순교자, 즉 '우리들의 분수에 맞는 그리스도인'이다" <알베르 카뮈> 31.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온 부조리를 인식할 수 있었다.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부조리에 대한 태도는 각자에게 맡겨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온전치 못한 채로.


<최초의 인간>(알베르 카뮈 지음

호세 뮤노스 그림

미메시스)을 읽으면 카뮈를, 그리고 부조리에 대한 저항이 어떻게 가능하지 알 수 있을까? <백치>를 읽은 후 <최초의 인간>을 함께 읽고 싶다.


나눔 가운데 저자와 다른 생각을 가질 자유가 언급되었다.


* 독서 중, <이방인>의 저자와 독자 간에도 저자가 부조리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독자의 해석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독자는 독자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어쩌면 저자보다 풍성한.


자신의 자녀가 더 나은 정신의 소유자가 되기를 바라는 게 부모의 심정이듯,

독자가 자신의 책을 읽음으로 더 깊고 넓은 사유를 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 또한 저자의 바램이 아닐까 싶다.


다시 한 번 빛의 의미를 생각한다.

빛!

알제를 싱징하는 빛!종교가 말하는 '신'이라 하는,

'국가 체제'라는,

'도덕관'이라는,

'진리'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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