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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선 Feb 11. 2024

2월 11일

<이방인>(알베르 카뮈



민음사)을 혼자 읽으며 글을 썼고, 함께 읽고 나눈 후  조금은 더 풍성하게 쓸 수 있었다.




“안 보시렵니까?”“네”“왜요?”“모르겠습니다.”“마지막으로 한 번 더 어머님을 보시겠습니까?” “나는 안 보겠다고 말했다.” ‘왜 엄마의 시신을 보지 않겠다고 했을까?’ ‘왜 죽은 이를 향해 네 발의 총을 더 쐈을까?’ 독자인 나도 의문이다. 어떤 이들이 기대하는 정서와는 좀 다르다. 바로 그 어떤 이들이 기대하는 정서에 부응하지 못함으로 필시 일을 당하겠구나 싶었다. 결론적으로 그렇게 된다. 점점 그의 사람, 사물, 사람들의 행동, 옷차림 등 외면과 자기 내면 의식의 흐름 등에 대한 세심한 관찰,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 무심한 듯한 그의 세심함과 그에 더한 솔직함에 마음을 빼앗기며 읽어갔다. 무심한 듯 세심한 그의 관찰력, 며칠 전 ‘관찰=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아직은 사랑에서 먼 관찰자 <이방인>의 뫼르소 안에서 내 모습을 만났다.

누구라도 자기만의 성격, 혹은 신념이 있다. 그것을 부정하지 않으며 살아간다. 레몽 생테스는 참지 못하는 성미를 ‘사나이다움’이라고 여긴다. 바로 그의 성미와 사나이다움이 살인사건을 불러왔다. 뫼르소는 뭐라도 크게 문제로 여기지 않는다. ‘누군가 자신을 친구라고 하면 그의 친구가 되어도 상관없고’, ‘그의 여자친구를 혼내주기 위해 대신 편지를 써주는 일도, 여자친구를 폭행한 그를 위해 증언하는 일에도 거리낌 없고’, 심지어 ‘결혼하자는 여자가 있다면 그 여자와 결혼해도 문제일 게’ 없다. 웬만하면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뒷 일 걱정 안 하고 계산하지 않는다. 그게 현재의 뫼르소다. 그 점이 살인을 불러왔다.

살인자가 된 뫼르소는 자신의 살인을 인정하고, 어쩌다 살인하게 된 경위를 설명한다. 더는 설명이 불가하다. 왜 다섯 발이나 쐈을까? 감정적으로는 공백이 있지만, 거짓이 없다. 정상참작도 가능하다. 그러나 재판의 세계는 그 세계가 신이라도 되는 양, 공백을 채우려 한다. 판사와 변호사가 각각 자기가 속한 그룹의 법칙과 언어를 수단으로. 게다가 법과는 무관한 자신의 신앙, 하나님을 넣어서, 사실에 근거해야 하는 법 세계 안에 존재하는 부조리다.

재판은 뫼르소를 그 자리에 있게 한 살인사건 아닌,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낸 일, 장례식에서 어머니 시신을 보지 않은 일,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일, 특히 그의 무신론적 태도에 집중한다. 뫼르소라는 사람의 진실을 철저히 삭제한다. 사형이 선고된 후까지 신부가 찾아와 뫼르소에게 신심을 강요한다. 뫼르소를 가깝게 아는 소수 증인을 제외한 몇몇 증인들의 증언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사법 집단은 ‘학습된’ 지식, 언어, 가치, 신념체계로, 자유인 뫼르소를 삭제하려 한다. 결코, 같을 수 없는 자신만의 성격, 신념들을 갖고 사는 이들이 마치 누구라도 당연하게 품고 행동해야 할 정서와 규범, 혹은 신앙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그것이 없다면 죄의 성격과 무관하게 처벌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조리다. 당사자를 소외시키는 재판의 세계, 자기들만의 언어로 모든 권리를 장악해서 당사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하는 법의 세계 앞에서 뫼르소는 절벽에 부딪힌다. 그러나 이 일로 뫼르소는 그때까지 볼 수 없었고 느끼지 못하던 구체적 대상에게 마음이 가게 되었다. 사랑일까! 성숙일까! 부조리라는 절벽 앞에서 그는 달라졌다. ‘관찰력’, ‘냉철함’, ‘계산 없음’은 어떤 사람들과는 다른 그 무용함이 어느새 그의 유능함이 되고 용기의 근원이 되는 듯하다. 그 유능함과 용기의 근원이 부조리한 세상, 재판의 세계를 부정하면서 마침내 현실에 직접 관여한다. 더는 이래도 재래도 상관없는 그가 아니다. 결국, 재판의 세계는 뫼르소를 이기지 못했다. 뫼르소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연기하지 않았다. 그들의 언어에 흡수되지 않고, 그대로 죽기를 결정한다. 그의 죽음을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진실을 말한 자가 죽는다.” “그 죽음을 많은 사람이 보게 하리라.”

그의 마음은 어떤 것인가? 아득히 멀리 당시를 깨운 이들, 조금 멀리는 동학의 최제우, 20세기라면 전태일로부터 끊이지 않고 이어진 정치인, 노동자, 지식인, 빈곤과 폭력의 희생자가 된 억울한 개인들과 최근의 이선균 등. 스스로 목숨을 던짐으로 그 사실을 환기하는 사람. 그들의 죽음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굴복?, ‘너희 자신을 보라, 알라, 괴로워하라’라는 의미의 복수?, 계몽? “나 아닌 다른 이가 되지 않는다.” “나는 부조리에 무릎 꿇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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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읽으며 쓴 글이다.

그러나 이 글에선 작품 안에서 계속 언급되는 "빛"을 해석할 수 없었다. 여러 분이 글을 써왔고, 빛을 언급했으나, 누구도 그 빛을 어떻게 해석할 지 분명히 다루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러나 함께 이야기하며, 다양한 의미를 끄집어 낼 수 있었다.

고전을 읽고, 함께 읽어야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서로 다른 생각, 성격과 경험.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예외 없이 존재하는 부조리.


“카뮈에 의하면 부조리는 인간의 숙명이다. 카뮈의 세계가 합리와 비합리, 도덕과 배덕, 태양과 바다, 긍정과 부정, 고통과 기쁨, 광기와 이성 등 반대되는 두 항의 양립을 특징으로 하는 것은 그러므로 필연적이다.” <알베르 카뮈>(유기환

살림)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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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한 분들 한분 한분이 글을 풀어가는 형식과 내용이 다르고, 같은 주제를 들여다보면서도 각자의 서로 다른 날카로운 관점으로 글 안의 특징적 소재를 끄집어내는 덕에 나는 빛에 대한 다양한,  놓쳤을 지도 모르는 의미를 깊이 생각할 수 있었다. 모두의 글에서, 그리고 글로 드러내지 못한 생각을 나누며 비로소 카뮈라는 사람, 이방인이라는 작품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더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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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있는 원고를 정리하다, <진리의 발견>(마리아 포포바

다른)을 읽던 중, 손자가 커서 읽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써놓은 편지에서 발견한 글이 눈에 들어왔다.

 

“쓰려고 하는 글이 글을 쓰는 사람보다 훨씬 크다. 그래서 글을 쓰려고 하는 그 내용을 깊이 알려고 해야 한다.”


지난번 함께 읽은 <고전을 만나는 시간>(미래의창)에서 앨런 제이콥스가 같은 말을 했다. 미국의 건국 이념을 작성한 미국의 건국자들은 실제로는 건국이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그 건국이념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이해된 것이다. 우리 역시 우리가 안다고 생각한 어떤 것들에 대해 조금씩 더 알게 될 것이며, 아마도 끝까지 알지 못하게 될 수 있다. 아니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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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르소가 마주한 부조리, 법, 종교, 죽음, 혹은 어떤 개인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리고 유난히 많이 강조되는 빛! 알제를 싱징하는 빛!

부조리의 총체를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 때문에 따뜻하고, 그것 때문에 뜨겁다.

그것 때문에 좋고, 그것 때문에 견딜 수 없다. 그것 때문에 사람도 죽인다.


세상이 시대가 혹은 지역이  권위를 부여한 유한하고 지엽적인 가치, 질서,

도덕관, 권리들, 종교가 규정해놓은 신, 국가 권력, 종교 기관과 종교인, 제도 등등을 지칭할 수 있을까?


인간은 각각 고유하게 존재하는,  스스로 있는 자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다.

스스로 창조하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로.


-“토라에서 거듭 강조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에게는 형상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을 금지한다. 하나님은 모든 표현, 모든 범주를 초월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될 것이 될 것이다.(I will be what I will be)” (…) 하나님은 한정되거나 정의될 수 없다. 그렇게 하려는 시도는 우상 숭배의 한 형태다. 그렇다면 “형상”은 특별한 형태를 소유한 것과는 전혀 다른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것임에 틀림없다. 창세기 1장의 핵심은 하나님이 자연을 초월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분은 자연의 법칙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분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심으로 우리에게 그와 비슷한 자유를 주셨고, 그리하여 스스로 창조할 수 있는 사람을 창조하셨다.”(36)

“토라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이며, 자유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가장 위대한 선물이자 가장 운명적인 선물이다.”(37) -조너선 색스 <랍비가 풀어내는 창세기>한국기독교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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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보편타당한 존재 형식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 형식 안에 각각의 존재를, 혹은 모순되는 상대 가치를 욱여넣으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을까! 부조리!


뫼르소가 마침내 다정한 세계를 느낀 곳이 빛이 들지 않는 곳이다. 강력한 부조리가 결여된 곳.


"<이방인>의 마지막 몇 페이지는 형이상학적 반항의 폭발 그 자체이다. (…) 뫼르소도, 사제도, 소설가도, 독자도 모두 처형일만 다를 뿐 사형수이기는 매한가지다. 부조리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는 사제에 대한 분노는 사형집행일 날 최대한의 증오의 함성에 대한 소망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부조리를 의식하지 못하는 구경꾼들이 뫼르소를 증오하면 증오할수록 그의 죽음은 더 부조리한 죽음이 되기 때문이다. 카뮈에 의하면 뫼르소는 부조리한 진실의 순교자, 즉 '우리들의 분수에 맞는 그리스도인'이다" <알베르 카뮈> 31.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온 부조리를 인식하고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기회가 되었다. 부조리에 대한 태도는 각자에게 맡겨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온전치 못한 채로.


<최초의 인간>(알베르 카뮈 지음

호세 뮤노스 그림

미메시스)을 읽으면 카뮈를, 그리고 부조리에 대한 저항이 어떻게 가능하지 알 수 있을까? <백치>를 읽은 후 <최초의 인간>을 함께 읽고 싶다.


나눔 가운데 저자와 다른 생각을 가질 자유가 언급되었다.


* 독서 중, <이방인>의 저자와 독자 간에도 저자가 부조리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독자의 해석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독자는 독자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어쩌면 저자보다 풍성한.


자신의 자녀가 더 나은 정신의 소유자가 되기를 바라는 게 부모의 심정이듯,

독자가 자신의 책을 읽음으로 더 깊고 넓은 사유를 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 또한 저자의 바램이 아닐까 싶다.


다시 한 번 빛의 의미를 생각한다.

빛!

알제를 싱징하는 빛!


한 시대, 어떤 지역을 지배하는


종교가 말하는 '신'이라 하는,

'국가 체제'라는,

'도덕관'이라는,

'진리'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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